공항에서 헤맨 지 7시간째. 너무 힘들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형형색색의 올드 카(클래식 차)가 도로를 으르렁거리며 지나갔다. 단추가 터질 것같이 배가 나온 아저씨들이 만화 속에서나 보던 두툼한 시가를 멋들어지게 피웠다. 도로 끄트머리에 보이는 말레콘비치에는 노을이 활활 불타고 있었다. 흑백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두 눈이 마카롱마냥 부은 채 망연자실하게 앉아 있는 나와 쿠바의 화려한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더 초라하게 느껴졌다. -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9795 - P74

햇빛에 녹은 설탕 알갱이처럼 진득한 능구렁이가 다 되었을 때쯤 카리브해를 보러 갔다. 잭 스패로우 선장이 사랑하던 그 카리브해가 맞았다. 이렇게 맑은 바다는 처음 봤다. 신이 이곳에 축복을 내린 것일까. 투명하고 푸른 바다가 사방에 펼쳐져 있었다. 작은 오두막집에서는 살사 노래가 끊임없이 흘러나왔고, 건강하게 그을린 쿠바 사람들의 모히토 만드는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9795 - P87

오랜만에 텐션을 되찾은 우리의 목소리는 구름을 뚫을 것처럼 높았고, 내리쬐는 강렬한 햇볕보다 더 뜨거웠다. 선글라스를 쓰고 수영하는 사람들, 햇빛에 탄 건지 술에 취한 건지 구별되지 않는 붉은 얼굴로 하하 웃는 할아버지들, 네 자리 내 자리 구별 없이 아무 바닥에 드러누워 모히토를 마시며 담배 피우는 여자들과 이가 쏟아질 듯 까르륵 웃으며 뛰어다니는 어린아이들, 그리고 이 모든 소리를 한순간에 잠재우는 바다 소리까지. 바다에서 온화한 박력이 느껴졌다. -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9795 - P87

콜카타는 인도에 입문하기 가장 좋은 도시다. 당시에는 모든 게 충격적이었지만, 내가 여행한 인도의 지역 중에서 적당함을 가장 잘 아는 지역이었다. 콜카타는 적당한 강도로 상식을 부숴 버렸다가 적당한 강도로 인도를 다시 사랑하게 만들었다. 콜카타를 먼저 여행했기 때문에 그다음 더한 것들을 대비할 수 있었다. -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9795 - P105

꾸역꾸역 올라탄 인도 버스는 살면서 만난 버스 중에서 제일 정신없었다. 쇳덩어리 버스는 승객들이 쏠리든 말든 요단강을 휘젓는 뱃사공처럼 차체를 여기저기 흔들면서 달렸다. 인도인들은 땅 위를 걷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위치를 찾아갔다. 보따리에 목만 빼놓은 닭들의 꽥꽥대는 소리는 바람 소리가 어우러져 귓구멍을 따갑게 때렸다. 따가운 건 귓구멍뿐만이 아니었다. 버스를 꽉 채운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봤다. 뒤통수가 따갑다 못해 뚫릴 지경이었다. -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9795 - P113

그는 죽음이란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일이기 때문에 전혀 무서워하거나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어머니의 강에서 태워지면 좋은 곳으로 가기 때문에 슬피 울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힘겹게 릭샤를 몰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갠지스강에서 죽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일하셨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죽음은 슬픈 게 아니야. 다른 세상으로 가는 거야. 누구나 죽으니까 나도 언젠가 그 세상으로 갈 거야. 우리는 다시 만날 거니까 슬퍼하지 말자. -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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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레 집시 아저씨가 피운 모닥불로 옹기종기 모였다. 어디선가 젬베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맞춰 내 심장도 둥둥 울렸다. 꿈만 같았다. 나무토막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주황빛 불꽃을 피워 냈다. 게슴츠레 뜬 내 눈두덩이 위로 연기와 고운 모래가 춤을 추면서 날아가고, 모래 언덕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등 뒤로 모래의 서늘함이 부드럽게 느껴졌다. 집시 아저씨들이 넓적한 은쟁반에 인도 쌀밥과 커리와 난을 담아 줬다. 딸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와 이리저리 흔들리는 장작 불빛, 낙타 몰이꾼과 집시 아저씨들이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가 잔잔하게 퍼졌다. 커리를 다 먹고 장작불에 구워진 닭고기와 고구마도 호호 불어 가며 먹었다. 어둠 속에 딸랑거리는 낙타 종소리와 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이 계속해서 꿈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 <설레는 건 많을수록 좋아>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39795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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