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다자키 쓰쿠루가 심각하게 죽음을 갈구하는 일을 그만둔 것은 바로 그 시점이었다. 그는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벗은 몸을 응시하고, 거기에 자신 아닌 자신이 비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날 밤, 꿈속에서 질투의 감정(으로 보이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체험했다. 그리고 날이 밝았을 때는 죽음의 허무와 한 치 앞에서 마주하던 다섯 달에 걸친 암흑의 나날을 이미 뒤로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7

아마도 그때 꿈이라는 형태로 그의 내부를 통과하던 그 타는 듯한 삶의 감각이 그 순간까지 그를 집요하게 지배하던 죽음에 대한 동경을 죽여 없애고 지워 버린 것이 아닐까. 세찬 서풍이 두꺼운 구름을 날려 버리듯이. 쓰쿠루는 그렇게 추측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8

그리고 남은 것은 체념을 닮은 조용한 사색뿐이었다. 그것은 색채가 없는 잔잔한 바다처럼 중립적인 감정이었다. 그는 텅 비어 버린 오래되고 큰 집에 혼자 동그마니 앉아 오래되고 거대한 괘종시계가 시간을 새기는 울적한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입을 다물고 눈길 한번 떼지 않고 시곗바늘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얇은 막 같은 것으로 감정을 몇 겹이나 감싸고 마음을 텅 비워 낸 채 한 시간마다 착실하게 늙어 갔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58

새롭게 얻은 자신의 모습이 쓰쿠루의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도 싫지도 않았다. 이것 또한 어차피 하나의 방편이고 급한 대로 만들어 본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 나타난 얼굴이 지금까지 보아 온 자기 얼굴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무튼 고마웠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60

어쨌든 다자키 쓰쿠루라는 이름을 가진 예전의 소년은 죽었다. 그는 황량한 어둠 속에 잠겨 들듯 숨을 거두었고 숲 속의 작은 공터에 묻혔다. 사람들이 아직 깊은 잠에 빠진 새벽 시간에 아주 은밀하게. 묘비도 없이. 그리고 지금 여기 서서 숨 쉬는 인간은 내용물이 크게 바뀌어 버린 새로운 ‘다자키 쓰쿠루’이다. 그러나 그걸 아는 사람은 그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60

가능한 한 남는 시간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밤에는 두 시간 정도 책을 읽었다. 대부분 역사서 아니면 전기였다. 그런 습관은 옛날과 변함이 없었다. 습관이 그의 생활을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완벽한 공동체를 믿지 않고 케미스트리의 온기를 몸으로 느끼지도 않았다.
그는 매일 욕실 거울 앞에 서서 잠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새로운(달라진) 자신의 존재를 조금씩 마음에 새겨 갔다.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그 문법을 암기하듯이.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61

"쓰쿠루 선배는 뭔가를 만드는 게 좋은 거로군요. 이름대로."1)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63

그의 이름은 하이다였다. 하이다 후미아키(灰田文紹).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여기에도 색이 있는 인간이 있다.’라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미스터 그레이. 회색은 물론 눈에 잘 안 띄는 색깔이기는 하지만.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65

하이다는 선이 가늘고 잘생긴 청년이었다. 고대 그리스조각처럼 얼굴이 작고 날렵했다. 반듯하게 정돈된 얼굴은 고전적이면서 지적으로 겸허한 인상을 풍겼다. 몇 번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그 단아한 아름다움이 자연스럽게 부각되었다. 화려하게 사람의 눈길을 끄는 타입의 미소년은 아니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66

아무튼 그렇게 하여 그는 ‘다자키 쓰쿠루’라는 하나의 인격이 되었다. 그 이전의 그는 무이며 이름이 없는 미명의 혼돈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겨우 숨을 몰아쉬며 울음을 터뜨리는 3킬로그램이 안 되는 분홍색 살덩어리였다. 먼저 이름이 주어졌다. 그다음에 의식과 기억이 생기고 이어서 자아가 형성되었다. 이름이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71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예요.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의 제1년, 스위스에 들어 있죠."
"르 말 뒤……?"
"Le Mal du Pays. 프랑스어예요. 일반적으로는 향수나 멜랑콜리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전원 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정확히 번역하기가 어려운 말이에요."
"내가 아는 여자애가 자주 그 곡을 쳤거든. 고등학교 때 같은 반 친구였는데."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74

"라자르 베르만(Lazar Berman).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인데 섬세한 심상 풍경을 그리듯이 리스트를 치지요. 리스트의 피아노 곡은 일반적으로 기교적이고 표층적이라는 평을 받아요. 물론 개중에는 기교 위주의 작품도 있지만 전체를 주의 깊게 들어 보면 내면에 독특한 깊이가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러나 그런 것들은 대부분 장식 속에 교묘하게 감추어져 있어요. 특히 이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이 그래요. 현존하는 피아니스트 가운데에서 리스트를 올바르고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비교적 요즘 사람 가운데에는 베르만이 뛰어나고, 예전 사람 가운데서는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 정도가 아닐까 해요."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75

연주를 부탁하면 그녀는 곧잘 그 곡을 쳤다. 「르 말 뒤 페이」. 전원 풍경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향수 또는 멜랑콜리.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76

"요리사는 웨이터를 증오하고, 그 둘은 손님을 증오한다. 아널드 웨스커(Arnold Wesker)의 『부엌』이라는 희곡에 나오는 말이에요. 자유를 빼앗긴 인간은 반드시 누군가를 증오하게 되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그런 삶은 살기 싫어요."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78

"자유롭게 생각한다는 건 다시 말해 자기 육체를 벗어난다는 말과도 같아요. 자기 육체라는 한정된 우리를 벗어나, 사슬을 벗어던지고, 순수하게 논리를 비약시키는 거예요. 논리에 자연스러운 생명을 주는 거죠. 그것이 사고에서 자유의 핵심입니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78

"무슨 일이건 반드시 틀이란 게 있어요. 사고 역시 마찬가지죠. 틀이란 걸 일일이 두려워해서도 안 되지만, 틀을 깨부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돼요. 사람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게 무엇보다 중요해요. 틀에 대한 경의와 증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늘 이중적이죠.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예요."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80

이름은 미도리카와(綠川). 숙박계에 이름과 도쿄 고가네이 시의 주소를 적었다. 꼼꼼한 성격인 듯, 계산은 매일 점심 전에 전날 몫을 현금으로 지불했다.
(미도리카와? 여기도 색이 있는 인간이 있다. 녹색. 그러나 쓰쿠루는 입을 다문 채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88

"자신이 네 친구들에게 왜 그렇게나 심하게 거부당했는지, 당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이제는 자기 손으로 밝혀도 좋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어."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19

그사이 줄곧 그의 뇌리에는 간결한 하나의 멜로디가 반복해서 흘렀다. 그것이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의 주제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순례의 해, 제1년, 스위스. 전원 풍경이 사람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우울.
그런 다음 거의 폭력적인 잠이 그를 휘감았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38

그러나 쓰쿠루는 더는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해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그 의문을 ‘미결’ 표시가 붙은 서랍 하나에 넣고 훗날 검증해 보기로 했다. 그의 내면에는 그런 서랍이 몇 개 있었고 많은 의문들이 거기에 내버려졌다.

-알라딘 eBook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중에서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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