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노인이 되어 가시는지 싸부는 여섯 시면 깨어났다. 그가 내 주변을 어슬렁댈 즈음 원고의 마지막 페이지를 출판사 웹하드에 올렸다. 싸부는 마감 원고 분량을 살피며 따봉이라고 외쳤고, 나는 깨우지 마시라는 말을 남기고 싸부가 비워둔 침대로 스며들어 갔다. 이후로 폭음 뒤 필름이 끊기듯 기억이 희미해졌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70

만 원짜리 하나 호주머니에 찔러넣고는 옥탑방을 나서는데, 그러고 보니 아무도 없다. 김 부장도 싸부도 모두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했나보다. 이런 날이야말로 오랜만에 혼자 살던 시절(어느새 시절이 되어버렸다)의 기분을 만끽해야 하는데, 저놈의 오픈 이벤트 때문에 집을 나서야 한다. 오호 통재라!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72

삼척동자는 대학 졸업 뒤 신림동에서 사법 고시를 2년 준비하다 포기한 뒤, 망원동 정진고시원에 자리 잡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했다. 서울에 집이 있는데도 굳이 고시촌과 고시원을 전전하는 건 부모님과 트러블이 있어서일 것이고. 나는 녀석에게 사실 너는 법관이나 공무원이 어울릴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솔직히 말했다. 녀석은 그 말을 수긍했다. 자긴 특별한 꿈도 없고 그저 학교라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고시라는 정거장에서 내린 뒤, 세상이라는 버스로 환승하지 않는 것일 뿐이란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87

삼척동자 녀석, 아저씨들의 부추김에 민망해한다. 역시 아저씨들 넉살에는 녀석도 당할 수가 없나보다. 뒤이어 아저씨들은 삼척동자에게 이런저런 인생 충고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 하기를 좋아한다. 충고란 것도 알고 보면 자기 이야기다. 그리고 아저씨들은 누구보다 자기 이야기 늘어놓는 걸 좋아한다. 아저씨가 되면 그런 자격증이라도 나오나보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90

삼겹살, 삼척동자, 삼동, 삼차……. 참으로 삼삼한 밤이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ㅐ - P191

어느새 백수들의 놀이터가 된 나의 옥탑방.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을까. 더 이상 고요한 옥탑의 아침은 사라지고 없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일제의 침략에 점령된 뒤 겪은 식민지 백성의 슬픔이 이러했을 터. 실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92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텐트에서 나왔다. 방 안을 살피니 내 말은 죽어라 안 듣는 세 사람을 슈퍼할아버지가 닥치는 대로 깨우고 있다. 마치 바퀴벌레 박멸을 위해 출장 온 세스코 직원처럼 슈퍼할아버지는 가차가 없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94

슈퍼할아버지의 채찍과 당근에 바퀴벌레들이 순순히 옥탑을 내려갔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95

그러고 나서 침대에 누워 TV를 보며 바퀴벌레들이 일당을 물고 돌아올 때까지 게으름을 피우도록 하자. 어쨌거나 나만의 평화. 몇 개월 만의 인디펜던트 데이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98

나는 그것을 ‘빈대 정책’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바퀴벌레, 나는 빈대. 칙칙한 남자들이 사는 방이 다 그렇지 뭐. 바퀴벌레와 빈대, 개미, 귀뚜라미, 곱등이 등이 널린 공간. 차라리 카프카의 소설에 나오는 벌레라면 어떨까?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단편소설『변신』의 주인공). 싸부라면 잠이나 자라고 농담하겠지. 잠자. 잠자리도 폼이 나는 것 같다, 드래곤플라이. 나비는 버터플라이. 그냥 플라이는 파리. 지금 나를 괴롭히는 건, 모스키토라 불리는 모기. 그렇게 랩을 하듯 곤충과 벌레의 이름을 호명하다가…… 다시 잠이 들고 말았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199

일에도 삶에도 마감이 필요하다. 마감.

내가 마감을 잘 지키는 만화가가 된 것은 마감이 스스로 작품을 그려나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억지 같지만 진짜로 마감이 되면 알 수 없는 집중력이 솟아올라 어떻게든 원고를 끝내게 만든다. 학창 시절 시험 기간 때의 벼락치기 같다. 그때의 집중력. 그게 마감이란 놈이고, 그놈이 결국 스스로를 완성한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268

동창들의 질문 공세와 꿈 타령도 없었다. 두툼해진 살집들처럼 삶의 무게를 출렁이던 그들은 더 이상 내게 새삼스런 질문과 뻔한 타령을 할 겨를조차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새로울 것 없는 세상과 새로울 것 없는 삶을 사는 우리. 그걸 용인하며 늙어가는 거다. 당연한 듯 주어진 삶. 오히려 그게 다행인 날들이다. 그런 이야기가 떠올라 핸드폰을 꺼내 메모를 한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276

나는 그들을 뒤로하고 가게를 나섰다. 아무도 나에게 인사하지 않았다. 새벽 어스름의 찬 공기가 나를 깨웠다. 세상은 혼자라는 걸 폐 속으로 들어온 차가운 공기가 상기시켜주는 듯했다. 망원동이 이처럼 쓸쓸한 적은 처음이다. 어쩌면 이곳을 떠날 때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321

저녁 내내 원고에 집중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집을 나가기로 마음먹자 모든 게 새롭게 보였다. 누군가 그랬지. 사랑하기는 쉽다고. 그것이 사라질 때를 상상할 수만 있다면. 덥지만 햇살만큼은 마음껏 쪼일 수 있었던 창문, 2주일치 빨래를 한 번에 널어도 충분한 길고 튼튼한 빨랫줄, 그 빨랫줄이 있는 넓디넓은 마당, 괴팍하고 잔소리는 많지만 그만큼 잔정도 많은 주인할아버지와 할머니 내외, 서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재래시장인 망원시장, 아직도 사람 사는 냄새가 그득한 망원동 구도로와 아기자기한 골목들, 산책하러 가기 딱 좋은 시야가 탁 트이는 한강 둔치까지……. 벌써부터 망원동의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339

네 명의 남자는 나란히 해변에 서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본다. 연고도 나이도 다른 네 명의 남자가 서울 한구석 옥탑방에서 만나 여기까지 동행해와 해를 바라본다. 옥탑방에서 보던 그해와 별다를 바도 없다. 근데 뭉클하다. 지난 몇 개월, 함께 먹고 자다시피 한 이 빈대 기생충 바퀴벌레들…… 같지만, 사실은 ‘입구멍’이라는 식구. 그동안 이들을 미워하고 꽁했던 내 소갈머리는 뜨거운 태양에 소독되고 시원한 파도에 세탁되고 있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354

너무 익숙해 이제 꿈 같지도 않은 내 꿈.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면 그건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직업이 된다는 말이 있었지. 틀렸다. 하고 싶은 일은 하면 할수록 더 파고들게 만드는 직업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그 열정이 고갈될 거라면 처음부터 그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한때의 시도였을 뿐이다. 나는 집중한 채 파고들었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410

그러던 어느 날 각각 다른 연령대의 사내 다섯 명이 동시에 우리 집에서 자게 됐다. 깨어나 보니 집은 대학 시절 자취방 꼴이었다. 각각은 무명작가, 만년 대학원생, 일 뜸한 번역가, 백수 기러기 아빠, 자칭 독거노인이었다. 직장인이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시간에 우리는 집에서 기어나와 동네 해장국집을 찾았다. - <망원동 브라더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5344491 - P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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