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런 희망없이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옮겨다니게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자흔이 지쳤다는 것, 이십몇 년이 아니라 천년이나 이천 년쯤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처럼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다만 신기한 것은 때때로 자흔의 얼굴에 떠오르는 웃음이었다. 모든 것에 지쳤으나 결코 모든 것을 버리지 않은 것 같은 무구하고도 빛나는 웃음이 순간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어둠을 지워내버리곤 했다. 그런 자흔을 보면서 나는 종종 어떻게 사람이 저토록 희망 없이 세상을 긍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의아해지곤 했던 것이었다.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25
난 어디에서든 머리만 바닥에 닿으면 잘 수 있어요.
그러나 새벽이 되어 자명종 시계가 울리고 창문으로 희부윰한 빛이 스며들 때면 자흔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식은땀을 흘리며 누워 있었다. 내가 출근 준비를 하려고 불을 켜고 세면장을 들락거리기 시작하면 자흔은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흩어져내려 절반쯤 가려진 자흔의 얼굴은 핏기가 없는 데다가 입가와 뺨에 온통 하얗게 버짐이 피어 흡사 분가루를 뒤집어쓴 광대 인형 같았다.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27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위와 눈병과 콜레라보다도 나를 괴롭혔던 것은 자흔에게서 풍겨오기 시작한 여수의 냄새였다. 방금 목욕을 하고 들어온 자흔의 젖은 머리털에서 나는 여수 앞바다의 짠물 냄새를 맡았다. 그녀의 손에서도 입에서도 여수 선착장에 버려진 상한 생선들의 냄새가 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자흔의 잠든 얼굴에 그곳 부두의 검붉은 노을이 어리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손을 뻗는 곳에서마다 꿈틀거리는 선창가의 노랫소리, 구슬피 흐느껴 우는 소리, 밤새워 가슴을 앓는 소리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조그만 체구의 내 어머니가 숨을 거두며 마지막으로 토해냈던 무시무시한 기침 소리가 자취방의 벽면을 타고 음습한 메아리를 울렸다.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37
날은 갔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초가을의 햇살은 건조하고 따갑게 도시 위로 내리꽂혔다. 자흔의 몸 곳곳에 맺혔던 피멍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어느덧 풀려가고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속의 멍울은 더욱 옹골차게 맺혀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작적인 결벽증은 여름과 함께 수그러들었지만 폭음 끝의 숙취 같은 황폐함이 내 몸과 마음을 귀퉁이에서부터 서서히 무너뜨려오고 있었다. 온갖 욕망과 고통과 좌절이 뒤범벅되어 있던 시궁창이 오랫동안 햇빛 아래 방치되어 말라붙은 자리처럼, 악취를 풍기는 흙바람이 쉴새없이 내 메마른 얼굴을 뒤덮으며 불어대고 있었다.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41
……바로 거기가 내 고향이었던 거예요. 그때까지 나한테는 모든 곳이 낯선 곳이었는데, 그 순간 갑자기 가깝고 먼 모든 산과 바다가 내 고향하고 살을 맞대고 있는 거예요. 난 너무 기뻐서 바닷물에 몸을 던지고 싶을 지경있어요.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하고 싶었어요……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45
더러운 손이었다.
손을 씻고 싶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여태껏 삼켜온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 싶었다. 벌겋게 열이 오를 때까지 나는 두 손바닥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동생 미선의 따스한 손바닥, 내가 뿌리쳐버린 손바닥의 온기가 내 불붙는 듯한 머릿속을 헤집었다.
언니, 같이 가, 아, 아부지……!
잘 뛰지 못하는 미선의 손을 냅다 뿌리치고 달아나던 나는 그 아이의 혀 짧은 외침이 부두 아래 바닷속으로 곤두박질치는 소리를 들었다. 뒤돌아보았을 때 미선의 조막손과 조그만 머리통은 거품을 뿜으며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있는 힘껏 달렸으나 얼마 못 가 붙잡혔다. 술에 젖은 아버지의 가슴을 밀어내기 위해 나는 안간힘을 썼다. 아버지의 역한 숨결이 내 이마에, 눈에 뜨겁게 끼얹어졌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졌다. 부두 시멘트 바닥이 급경사로 기울었다. 미선이를 집어던진 아버지는 이번에는 반항하는 나를 목에 감아 안은 것이다. 짙푸른 물살 속으로 머리부터 곤두박질쳤다. 눈과 입과 코로 정신없이 들이닥치는 짠물, 짠물.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47
그래요, 가지 않을게요.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어린 어머니의 아련한 품속처럼, 수천 수만의 물고기 비늘들이 떠올라 빛나는 것 같던 봄날의 여수 앞바다처럼 자흔의 가슴은 다사롭고 푸근하였다.
그리고 새벽녘이 되어 내가 깊이 잠든 사이에 자흔은 떠났다. 밑창이 떨어진 단벌 구두를 꿰어신고, 두 개의 볼썽사나운 여행 가방과 옷 보퉁이를 싸들고 갔다.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50
여수, 마침내 그곳의 승강장에 내려서자 바람은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내 어깨를 혹독하게 후려쳤다. 무겁게 가라앉은 잿빛 하늘은 눈부신 얼음 조각 같은 빗발들을 내 악문 입술을 향해 내리꽂았다. 키득키득, 한옥식 역사의 검푸른 기와 지붕 위로 자흔의 아련한 웃음 소리가 폭우와 함께 넘쳐 흐르고 있었다. - <여수의 사랑>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906920 - P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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