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동장 맞은편 끝에 색칠한 장난감처럼 서 있는 신설 중학교에서 스페인어를 가르쳤다. 매일 아침 나는 초등학교 건물을 거쳐 중학교로 갔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기도를 듣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그냥 그 건물에 들어가보고 싶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는 흡사 그냥 성당에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과 같다. 1700년대에 스페인 선교사들이 세운 이 학교는 사막 같은 환경에서도 오래 버틸 수 있도록 견고하게 지어졌다. 다른 오래된 학교들도 그곳을 거쳐가는 어린이들에게 고요하고 견고한 느낌을 주지만, 이 학교에는 그런 느낌에 더하여 선교의 평화, 성소의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97

그들은 영어와 스페인어, 힙스터 방언을 섞어 말하면서 철조망 울타리에 기대 소리 없이 웃었다. 여학생들은 감청색 교복을 입었다. 그들은 깃털을 다듬은 새처럼 머리를 쫑긋 세운 남학생들과 소리 죽여 노래하는 새처럼 시시덕거렸다. 남학생들은 눈부신 주황색, 노랑색, 청록색 페그레그 팬츠를 입었다. 상의는 맨몸에 단추를 풀어헤친 검은색 셔츠나 브이넥 스웨터였다. 그들의 매끄러운 갈색 가슴에서 빛나는 십자가 목걸이……. 멕시코계 10대 불량소년들의 십자가. 그들의 손등에는 십자가 문신도 있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99

모국어 수준의 내 스페인어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링가’가 자기들 부모만큼, 심지어 그들보다 스페인어를 더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로서는 놀라운 일이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자기들끼리 하는 음란한 말이나 마리화나, 경찰을 은어로 어떻게 부르는지도 아는 것을 보고 감명받았다. 그들은 열심히 공부했다. 스페인어는 그들에게 친밀하고 중요한 과목이었다. 그들은 예의 바르게 행동했지만, 뚱한 복종과 기계적인 반응은 나에게 모욕적이었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100

교실이 조용해졌다. "엘 팀이다!"

* El Tim의 el은 정관사로, 사람 이름 앞에 쓰는 것은 틀린 용법이지만 별명이나 친한 사람 앞에 쓰이기도 한다.

그는 문간에 서 있었다. 복도 쪽에서 비치는 채광을 등지고 있어 로드 수녀님처럼 검은 윤곽으로 보였다. 그는 검은색 옷을 입었고, 셔츠는 단추를 허리까지 풀어놓았다. 바지는 홀쭉한 엉덩이에 낮게 착 달라붙었다. 투박한 체인에 건 금 십자가가 반짝였다. 그는 어중간하게 미소를 지으며 로드 수녀님을 내려다보았다. 속눈썹이 그의 수척한 뺨에 삐죽삐죽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머리는 검고 긴 직모였다. 그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새처럼 빠르게 머리를 쓸어 뒤로 반듯하게 넘겼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104

체호프의 「슬픔」이 일인칭으로 쓰였다고 상상해보자. 한 노인이 방금 자기 아들이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혹스럽고 불편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 단편의 마차 요금 이야기가 그렇듯이 심지어 따분하기까지 할 것이다. 그러나 체호프는 삼인칭의 공평한 목소리로 노인에게 품위를 불어넣는다. 우리는 노인을 향한 작가의 동정심을 흡수한다. 그리고 꼭 아들의 죽음 때문이 아니더라도 노인이 말에게 말하는 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는다.
우리도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 때문에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116

하지만 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매주 토요일, 그녀는 빨래방에 갔다가 장을 본 뒤 일요일판 《크로니클》을 샀다." 그러면 사람들은 삼인칭으로 쓰였다는 이유 하나로 충동적이고 강박적이고 따분한 이 헨리에타라는 여자의 소소한 인생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야기하는 사람이 이 따분한 여자에 대해 들려줄 만한 뭔가가 있다면 그런가 보지 뭐, 그래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계속 읽어보자, 라는 식의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117

헨리에타는 어서 월요일이 왔으면 한다. 신장전문의인 B 선생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많은 간호사와 사무장은 ‘그들의’ 의사 선생님을 사랑한다. 일종의 델라 스트리트 증후군이라고나 할까.

* 미국 드라마 〈페리 메이슨〉의 원작 소설에서 형사법 전문 변호사 페리 메이슨과 로맨틱한 긴장 관계에 있는 그의 비서(사무장) 이름.

-알라딘 eBook <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중에서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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