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의 공화주의 혁명의 전통은 이제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자코뱅파와 바뵈프의 혁명적 전통은 결국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프랑스의 패배로 끝나자 파리 코뮌을 일으키게 한다. 그것은 마치 1848년 혁명이 6월폭동을 일으켰던 것과 흡사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22
여기서 1871년 9월의 혁명은 1792년과 1848년을 연상케 하였다. 특히 독일과 치른 전쟁은 1792년을 방불케 했는데, 임시 국방정부의 다음과 같은 첫 선언은 1792년을 그대로 연상케 하였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22
1870년 9월에 구성된 임시 국방정부는 1792년의 공화국처럼 과격하지도 않았고 1848년의 공화국처럼 분열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새 정부는 출발부터 대체로 온건한 공화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24
20구 공화주의 중앙위원회는 자치 조직으로서 정부와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를 넘어서서 정치적 힘을 발휘하였다. 이 기이한 조직체는 그 역사적 정당성을 프랑스 혁명 시대의 파리 코뮌에 뿌리박고, 국가란 코뮌의 연합체에 불과하다는 이론에 뒷받침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조국을 방위하려는 민중의 애국심이 국토 방위에 불성실한 정부를 넘어서서 자치권을 요구하는 민중 의지의 표현으로 표출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887
이러한 권력 구조였기 때문에 결국 코뮌 집행위원회는 1793년의 국민공회가 반란 코뮌의 간섭을 받았던 것처럼 방위대 중앙위원회의 간섭을 받게 된다. 1793년의 반란 코뮌의 기능을 1871년에는 ‘방위대 중앙위원회’가 맡게 된 것이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00
근년에 와서는 루즈리Jacques Rougerie가 제기한 바와 같이 파리 코뮌을 상퀼로트적 성격을 띤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의 종장終場으로 보느냐, 아니면 파리 코뮌 직후 이래 마르크스에 의해 주장되어 온 20세기 사회혁명의 모델로 보느냐 하는 논쟁이 일고 있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7
톰슨David Thomson도 파리 코뮌을 장차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운동의 모범이라고 추켜올린 마르크스를 비판하면서, 역사적으로 볼 때 파리 코뮌은 장차 이루어질 행동의 희망 섞인 모델로서 간주될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낡은 전통이 갖고 있던 일종의 절망적인 클라이맥스로 간주될 때에만 의의가 있고, 따라서 그것은 하나의 시발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종말이었다고 확언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8
그는 1871년의 파리 코뮌과 그해 봄 거의 동시에 지방 대도시에서 일어난 코뮌들은 1789년 이래로 이어져 온 프랑스의 혁명적 전통이 양산한 착잡한 분규들을 뒤돌아볼 때 이들을 매듭짓는 과정 중 최대의 것으로서, 그 후부터 프랑스는 혁명적 전통을 돌아볼 때면 코뮌의 쓰라린 경험을 통하여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폭력에 대한 호소를 불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9
이렇게 톰슨은 파리 코뮌을 19세기 프랑스의 역사를 특정지었던 공화적·혁명적 전통에 종지부를 찍게 한 사건으로 이해하고, 파리 코뮌의 처절한 경험이 사람들로 하여금 폭력에 의한 혁명의 기도를 포기하게 하여 평화적 타결과 화해의 길을 열게 했다고 해석한다.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3985128 - P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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