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

일명 뭉크의 ‘예술 심장론’입니다. - P17

하나뿐인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은 평생 그를 쫓아다니는 죽음의 망령이 됩니다. 무엇보다 숱하게 병치레를 했던 그에게 ‘나도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의 근원으로 작용하죠. 어린 나이부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게 된 것입니다. - P21

뭉크식 죽음의 레퀴엠. 그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바로 〈병든 아이〉입니다. 열다섯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어가던 창백한 누나에 대한 기억을 고통스럽게 더듬거리며 탄생시킨 첫 번째 작품이죠. - P22

"예술에 더 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개인과 그의 삶이며, 우리는 죽어버린 자연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보여줘야 한다." - P23

어느새 뭉크에게 여성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행복의 존재이면서 정신적으로 치명상을 입히는 파멸의 존재로 정의된 것입니다. 사랑을 하고 싶지만 이후 필연적으로 받게 될 상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뭉크의 모순적인 감정이 ‘뭉크식 마돈나’에 투영된 듯 보입니다. - P31

작품 제목에 적힌 ‘마라’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활동한 프랑스의 혁명가입니다. 안타깝게도 욕조에서 목욕을 하던 중 반혁명파 당원에게 살해당한 인물이죠. 이 사건을 슬퍼한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93년 〈마라의 죽음〉을 그려 애도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뭉크는 마라를 애도하려고 한 건 아닙니다. 5년 전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사건에서 영감만 얻었을 뿐입니다. 〈마라의 죽음〉을 그리며 뭉크는 스스로를 애도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매우 사랑한 남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 P37

또 반 고흐, 로트레크 등도 끊지 못했던 술을 1908년 부로 완벽하게 청산하는 절제력을 보여줍니다. - P39

"나는 옛 이탈리아 화가들처럼 여성들을 천국에 남겨두기로 했어. 장미의 가시는 고통스럽기도 한 것. 나는 꽃을 즐기듯 여성들을 즐기기 시작했네. 꽃향기를 맡고 아름다운 잎을 감상하더라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실망할 일은 없지." - P40

심지어 1918년 클림트와 실레마저 요절하게 만든 스페인 독감에 걸렸을 때에도 끝내 살아남으며 생명연장의 꿈을 보여줍니다. - P42

죽음과 자신을 평생 연결 짓던 그는 늙어가는 자신에게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하게 됩니다. 〈시계와 침대 사이에 있는 자화상〉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부터 홀로 집에서 그린 그림입니다. - P42

이제, 그는 적어도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노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다가올 죽음을 그저 조용히 서서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에서 꽃피기 시작해 죽음으로 막을 내리는 뭉크의 그림.
그의 삶과 예술은 죽음을 먹고 자란 것처럼 보입니다.
그의 작품을 본다는 것은 평소 잊고 지내던 죽음을 한 번 소리 내어 불러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 P45

‘감정을 표출한다.’
표현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회화란 ‘눈으로 본 것을 재현하는 것’이라는 전통적 고정관념을 거부하고, ‘감정과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생각이죠. - P48

이런 표현주의의 선구자가 바로 뭉크입니다. 뭉크의 독창성은 ‘자전적 표현’에 있습니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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