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중세와 근대의 실질적인 전환이 18세기에 이루어지고 근대라는 시대가 계몽주의, 진보의 이념 그리고 산업화와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생각을 가볍게 일축해버리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경계는 아마 중세의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 즉 화폐경제가 다시 활기를 띠고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나며 근대 시민계급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2세기 말경으로 잡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15세기는 물로 많은 것이 그 완성에 도달하는 시기이지만 새로운 것의 시작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결코 결정적인 경계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13-14p)

예컨대 부르크하르트(J. Burckhardt, 19세기 스위스의 미술사가, 문화사가)가 방랑문인들의 노래(Vagantenlieder)에서 이미 르네쌍스의 전형을 보고 월터 페이터(Walter Pater,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소설가)가 철저히 중세적 정신의산물이었던 노래 이야기 (chante-fable) 『오까쌩과 니꼴레뜨』 (Aucassin erNicolette) 등에서 르네쌍스의 표현을 읽고 있지만, 이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연속성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사태를 단순히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고있는 데 불과하다. (14p)

고딕의 자연주의와 비교해보면 르네쌍스가 시작되면서일어나는 변화란 형이상학적 상징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 예술가의목적이 점차 더 단호하게 그리고 더 의식적으로 감각세계의 묘사로 좁혀지고 있다는 사실에 불과하다. 사회와 경제가 교리의 속박에서 벗어나는정도에 비례해서 예술 또한 점차로 아무런 스스럼 없이 직접적인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게 된다. 그렇지만 자연주의는 이윤경제와 마찬가지로 결코 르네쌍스의 소산만은 아니다. (15p)

르네쌍스에 의한 자연의 발견이란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지어낸 것이다. 자유주의가 자연적이며 자연을 사랑하는 르네쌍스상(像)을 중세와 대비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낭만주의에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부르크하르트가 ‘인간과 세계의 발견‘을 르네쌍스의 업적이라고 말할 때, 그의 이 테제는 동시에 19세기의 낭만적 반동과 이러한 낭만적 반동이 중세를 빌미로 해서 떠벌렸던 프로파간다적인 방어자세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 이다. 르네쌍스에 와서 자연주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이론은 권위와 위계질서의 정신에 대한 투쟁,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이념, 그리고 개인의 해방과 민주주의 원칙이 15세기의 소산이라는 주의 주장과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서술에서는 어디서나 근대의 밝음이 중세의 어두움과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15p)

에른스트발저(Ernst Walser)
꾸아뜨로첸또(Ouattrocento, 이딸리아어로 400이라는 뜻이며 서기 1400년대, 즉 15세기의 이딸리아 르네쌍스를 말한다. 따라서 뜨레첸또Trecento는 14세기를, 친꾸에첸또Cinquecento는 16세기를 뜻하며, 시대개념에 양식 개념을 덧붙인 의미로도 쓰인다. (16p)

부르크하르트는 또한 르네쌍스의 개인주의를 관능주의(Sensualismus)와관련시키고 있는데, 그에게는 르네쌍스의 인격자율의 이념이 중세적인 금욕주의에 대한 반발을 뜻하는 것이었고 르네쌍스의 자연예찬은 생의 기쁨과 ‘육욕의 해방‘을 알리는 복음과 같은 것이었다. (18p)

지금까지 보아온 개인주의적 · 자유주의적·심미주의적 관능주의적인 르네쌍스 개념의 특징들 중 어떤 것은 전혀 르네쌍스에 적용되지 않는 것이며, 어떤 것은 르네쌍스와 중세 말기에 똑같이 해당하는 것들이다. 중세 말기와 르네쌍스는 순전히 역사적 경계선에 의해서보다도 오히려 지리적·국민적 경계선에 의하여 갈라지는 듯하다. 예를 들면, 삐자넬로와 반 에이크 형제(Hurbert and Jan van Eyck)같이 중세 말기와 르네쌍스 중 어느쪽에속하는지가 문제 되는 경우에는 대체로 남쪽 이딸리아에서 일어난 현상은르네쌍스에, 유럽 북쪽지역에서 일어난 현상은 중세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19-20p)

고딕 예술의 기본 형식은 연속과 누적의 형식이다(이 책 1권 314~16면 참조옮긴이). 하나의 고딕 예술작품이 비교적 독자성을 지닌 여러 개의 부분으로 형성되었든 아니면 여러 부분으로 다시 분해될 수 있는 것이든, 표현이 회화적이든 조각적이든 또는 서사적이든 희곡적이든간에 이 예술을 지배하는 원리는 항상 집중의 원리가 아니라 확산의 원리이며, 종속의 원리라기보다는 병렬의 원리요, 폐쇄적인 기하학적 원리가 아니라 개방적인 직선의 원리인 것이다. (22p)

이딸리아가 경제적 합리주의로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서두를 장식했던것처럼 예술에서도 이딸리아 예술은 통일성의 원리에 의해서 유럽 르네쌍스와 고전주의 발전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르네쌍스 전성기나 매너리즘이 전유럽적 운동이었던 것과 달리, 초기 르네쌍스는 본질적으로이딸리아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24p)

이딸리아가 경제적 합리주의로 유럽 자본주의 발전의 서두를 장식했던 것처럼 예술에서도 이딸리아 예술은 통일성의 원리에 의해서 유럽 르네상스와 고전주의 발전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르네쌍스 전성기나 매너리즘이 전유럽적 운동이었던 것과 달리, 초기 르네쌍스는 본질적으로 이딸리아의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예술문화가 이딸리아에서 처음출현하게 된 것은 이 나라가 경제적·사회적으로 서구의 여러 나라보다 한 발짝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즉 경제의 부흥이 여기서 시작되었고 재정과운수(運輸) 기술상의 이점 때문에 십자군 원정도 여기서 조직되었으며, 중세 길드조직의 이상에 맞서서 새로운 자유경쟁 경제가 발달되고, 유럽 최초로 은행제도가 생긴 곳도 이딸리아였다. (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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