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지평선이 장밋빛으로 변하다가 단번에 붉게 물들었다. 해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벌써 하늘로 뚜렷이 솟아올랐다. 해가 들판 전체에 걸쳐 안개를 빨아올리면서 더욱 높이 떠오르는가 했는데 이내 기차의 칸막이 안이 후텁지근해지자 사내들은 스웨터를 하나, 그리고 또 하나 벗었고 마찬가지로 동요하기 시작하는 개들에겐 가만 엎드려 있으라고 꾸짖었다. (187/662p)
이렇게 한계도 없는 영토 위에서 경계도 없는 시간 동안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빛과 하늘의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공간 속에서 정신이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자크는 자신이 세상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부자라고 느꼈다. (192/662p)
사리를 따져서 그를 설득한다든가 그냥 순순히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 불가능하다 보니 그가 그런 식으로 화를 내는 것을 모두들 하나의 자연 현상과도 같은 것으로 여겼다. (196/662p)
그렇게 되니 식당이란 모두에게, 돈만 내면 만사가 쉬워지지만 거기서 맛볼 수 있는 그 비난받아 마땅한 초장의 쾌락은 머지않아 반드시 위장을 통해 비싼 대가를 치르게 마련인 거짓된 매력의 수상쩍은 장소로만 여겨졌던 것이다. (200/662p)
유행의 실질적인 힘을 과소평가하고 논리 따위엔 아랑곳하지 않는 할머니는 오직 〈방종한 생활을 하는〉 여자들이나 그런 우스꽝스런 짓을 할 엄두를 내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터라 그녀에게 새로운 유행이란 우스꽝스러운 동시에 사악한 것으로만 보였다. (210/662p)
그렇다, 그들은 살이 아니라 피를 나눈 남편과 아내로서, 둘 다 불구로 인하여 사는 것이 그토록 힘들어진 가운데 서로 도우면서, 비록 짧은 토막말이나 간간이 던지며 무언의 대화를 이어 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정상적인 부부들보다도 서로의 마음속을 더 잘 읽으면서 한데 뭉쳐서 살아왔다. (223/662p)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가난에 쪼들리지 않았지만 습관이 들어서, 그리고 또 삶의 고통을 견디어 온 사람들 특유의 불신 때문에 여전히 궁핍을 먹고 살았다. 그들은 동물적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삶이란 또한 그 뱃속에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불행을 규칙적으로 낳아 놓곤 한다는 것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231/662p)
즉, 하루 종일토록 순진무구함과 탐욕 속에서 거침없이 뛰어다녔던 그 동네, 그러나 날이 저물어 길거리에 어둠이 깃들기 시작할 때면, 나직한 발소리와 어렴풋한 목소리를 내면서 어떤 이름 모를 그림자가 하나 피에 젖은 영광인 양 약방집 전등의 붉은 불빛에 젖은 채 불쑥 나타날 때면, 그리하여 갑자기 겁이 난 아이가 식구들이 있는 곳을 찾아 가난한 자기 집을 향하여 달려갈 때면, 돌연 신비하고도 불길해지던 동네의 감미롭고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그 이미지를 말이다. (235/662p)
그는 늙어서 머리숱이 적어졌으며 지금은 유리처럼 변한 뺨과 손의 세포 조직 뒤에서 검버섯이 핀 모습으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몸도 전보다 더 굼뜨게 움직이는 형편이라 카나리아가 한 마리 짹짹거리고 있는 시장통으로 면한 창문 곁 등나무 의자에 가서 앉아야 비로소 편안해 하는 눈치였다. (237/662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