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에 잠긴 거대한 도시는 생명력을 잃은 육중한 정육면체 덩어리들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들 사이에서 이제는 사람들이 기억 못 하는 자선가들이나 청동 속에서 영원히 질식사해 버린 듯한 오래전 위인들의 말 없는 조각들만이 돌이나 쇠로 된 가짜 얼굴을 가지고 한때 인간이었던 자의 품위 잃은 모습을 드러내려 애쓸 뿐이었다. (339/667p)
이렇듯 길고 긴 이별의 시간 끝에 그들은 함께 나누었던 그들만의 은밀함도, 언제든 손을 갖다 댈 수 있던 상대가 어떻게 자신들 곁에서 살았었는지도 더 이상 생각해 낼 수 없게 되었다. (357/667p)
기억도 없고 희망도 없이 그들은 현재 안에 자리를 잡아 갔다. 사실을 말하자면 모든 것이 그들에게 현재가 되었다. 그 점을 분명히 말해야 하는데, 사랑의 힘, 심지어 우정의 힘마저도 페스트가 모두에게서 앗아 가버렸던 것이다. 사랑이란 조금이라도 미래를 요구하는 법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는 순간들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359/667p)
그들은 사랑이라는 이기주의를 잃어버림으로써 그 이기심에서 얻을 수 있는 특권마저 상실해 버렸다. (364/667p)
그것은 수천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스러운 이동이자 무거운 하늘에서 흘러나오는 윙윙거리는 재앙의 휘파람 소리에 박자를 맞추는, 그래서 더욱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이었다. 바로 이 발소리가 도시를 서서히 채우고 밤마다 맹목적인 고집에 자신의 가장 변함없고 가장 침울한 소리를 실어 담으며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랑을 밀어내고 있었다. (367/667p)
결국 페스트는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페스트는 고독하지만 고독을 원치 않는 사람과 공범을 이룬다. 왜냐하면 코타르는 겉보기에도 분명 공범자이고, 심지어 기꺼이 즐기는 공범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 즉 미신들, 근거 없는 두려움들, 위험에 처한 영혼들의 예민한 반응들, 예를 들어서 페스트에 대해서 가능한 언급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편집증적 증상이라든지, 전염병이 두통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머리가 조금 아프기만 해도 실성한 듯 정신을 못 차리고 창백해져 버린다든지,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고 한마디로 불안정한, 그래서 깜빡 잊은 것을 두고 무례함으로 뒤바꿔서는 버릇없다며 화를 내거나, 속옷 바지 단추 하나 잃어버린 것을 가지고도 몹시 상심하는 민감한 정서, 이 모든 것과의 공범자다. (386/66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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