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라는 문제는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 예술 작품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나 중심 사상처럼 기능합니다. 재판 기록에서 그걸 읽을 수 있는데, 그 문제는 영원토록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완벽히 허깨비 같은 존재의 라이트모티프와 정말로 비슷합니다.

(126-127/297p)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냥 남들에게 동조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들은 만사에 동조할 준비가 돼 있었어요.
누군가 그들에게 "우리와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당신은 고작 우리 중 한 사람일 뿐이야" 하고 말하면 그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죠. "절대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당신은 우리 중 한 사람일 뿐이야" 하고 말해도 그들로선 역시 좋은 일이고요.
그게 내가 그 상황을 보는 방식이에요.

(133-134/297p)

우리가 볼 수 있듯, 동조했던 사람들은 늘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들의 행위를 옹호했어요.
그들은 늘 말했죠. "우리는 상황이 더는 악화되지 않도록 계속 그 상태에 머물렀을 뿐입니다."
맞죠? 하지만 이런 옹호는 철저히 거부돼야 마땅해요. 상황이 그보다 더 악화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137/297p)

방조자가 되는 것과 관련해서 야스퍼스가 중요한 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것은 죄"라고 말했어요.카를 야스퍼스, 『독일 국민의 죄의 문제Questions of German Guilt』 2판, 포드햄대학교 출판부, 2000, 66쪽─원주.
맞죠? "우리는 입을 굳게 다물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알듯, 목숨을 부지할 줄 아는 것과 그 실행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어요. 알고서도 외면하고 떠난 사람과 실행에 옮긴 사람 사이에는요. ……따라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이, 구경만 하고 자리를 뜬 사람이 "우리는 모두 유죄" 하고 말한다면 그건 실제로 철저히 실행한 사람들을 감싸는 게 돼요. 바로 이게 독일에서 일어났던 일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죄책감을 일반화해서는 안 돼요. 그건 진짜 죄인들을 감싸는 짓일 뿐이니까요.

(137/297p)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내놓은 또 다른 명제가 있어요. 내가 보기에 다음 명제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제공하죠. "자기 자신과 불일치disunity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 낫다. 나는 통일체unity니까." 내가 나 자신과 통일돼 있지 않다면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요. 이를테면 그건 도덕 영역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인데,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보아도 여전히 타당한 얘기예요. 이 생각의 전제라면 실제 현실에서 내가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나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나는 이러저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 짓을 저지른 누군가와 같이 살길 원치 않으니까요. 내가 이러저러한 짓을 저질렀다면 나한테 남은 유일한 길은 자살이 될 거예요. 아니면 시간이 흘러 기독교적 방식으로 생각하면서 내 행동 양식들을 바꾸고 회개를 해야겠죠.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거예요.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유를 말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런 생각의 뒤편에 있는 추정은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세계와 굉장히 심하게 분열해서 나 자신과─어쩌면 친구와, 그리고 다른 자아와─대화하는 데 의지하는 것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들이 있을 수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근사하게 말한 "자기 안의 타인autos allos"처럼 말이에요. 내가 보기에 이것은 무력한 상황이 실제로 어떠할지 보여줘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냥 뚜벅뚜벅 갈 길을 간 사람들은 자신이 무력하지만 이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무력한 누군가도 여전히 사유는 할 수 있다는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죠.

(143-144/297p)

이게 이른바 살인자들 사이에서 나타난다는 내면적 이민internal emigration. 나치즘에 반대했으면서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독일에 남기를 선택한 독일 작가들을 일컫는 논쟁적인 용어이에요─이것은 내면적 이민이나 내적인 저항inner resistance이라는 개념 전체가 소멸했다는 뜻이죠.
내 말은, 그런 건 없다는 거예요. 세상에는 외면적 저항만 있을 뿐이에요. 인간의 내면에는 기껏해야 심리 유보Reservatio mentalis. 노골적인 거짓말은 아니지만 역시 사람들을 기만하는 행위의 한 형태만 있어요. 맞죠? 그것들은 허깨비들이 하는 거짓말이에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대단히 역겨운 거짓말이요.
관료제는 대량 학살을 행정적으로 자행했고, 그런 상황은 여느 관료제가 그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익명성의 느낌을 창출해냈어요. 개별적인 인간은 사라졌어요.
관련된 개인이 판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그는 다시금 인간이 돼요. 이게 실제로 사법 시스템의 대단히 인상적인 측면이에요. 그렇지 않나요? 진짜 변신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 사람이 "하지만 저는 그저 관료일 뿐이었습니다" 하고 말하면 판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잘 들어요.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는 그게 아니오. 당신이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당신이 인간이고 당신이 어떤 짓들을 저질렀기 때문이오." 이런 변신은 뭔가 대단히 인상적이죠.

관료제가 본질적으로 익명성을 갖는다는 사실 말고도, 무자비한 행위는 무엇이건 책임이 증발되는 것을 허용해요.
"멈춰서 생각해보라Stop and think"라는 영어 관용구가 있어요. 어느 누구도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생각에 잠길 수 없어요.
당신이 누군가에게 무자비한 짓을 강요하거나 또는 그들 스스로 그런 짓에 빠져들도록 방치할 경우 늘 똑같은 이야기로 귀결돼요. 그렇잖아요?
당신은 책임에 대한 인식이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번번이 알게 될 거예요. 그런 인식은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숙고하는 순간에만 발전할 수 있어요.

(146-147/297p)

"실제로 피해자를 살해한 사람과…… 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었는지는 책임 범위에 조금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의 정도는 자신의 두 손으로 치명적인 살해 도구를 사용한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증가한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바이킹 펭귄, 1963) 247쪽을 보라─원주.

(150/297p)

……정의는 두 가지 결과를 낳아요.
먼저, 정의는 훼손됐던 질서를 회복해야 해요.
이건 질서를 훼손한 당사자들이, 우리가 지금 논의하는 사람들이 유죄판결을 받아야지만 성공하는 치유 과정이죠.
둘째는 내가 보기에 우리 유대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판사 중 한 명이 인용했지만 애석하게도 사람들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흐로티위스Hugo Grotius, 1583~1645. 국제법의 기초를 닦은 네덜란드 법학자를 인용해야겠군요.
그는 가해자가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가 피해를 당하거나 상처를 입은 사람의 명예 및 품위와 관련된다고 말했어요.
이건 피해자가 감내한 고통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무엇인가 올바로 세우는 것하고도 전혀 관계가 없고요.
이건 정말로 명예와 품위의 문제예요.
봐요, 우리가 독일에 있었을 때 그 문제는 우리 유대인에게 중대했어요. 독일인들이 그들 가운데 살인자를 두고서도 추호도 동요하지 않으면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유대인의 명예와 품위에 반하는 생각이에요.

(151-152/297p)

이 현상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면─이건 별개의 현상이에요─나탈리 사로트Nathalie Sarraute, 1900~1999.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프랑스 여성 소설가가 쓴 『황금열매』를 읽어봐야 해요.
그녀는 그런 현상을 코미디로 묘사했어요. 그건 실제로 코미디였어요. 지식인 사회를 다룬 코미디요.
그렇지 않나요? 의견들이 이쪽저쪽으로 그네를 타는 것, 그 과정에서 영향을 받는 것 말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요.
그렇죠? 이런 현상은 지능하고는 아무 관련이 없어요. 사람은 지능이 대단히 높아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어요.

(154-155/2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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