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렌트는 이처럼 ‘평범하다’라는 말이 ‘흔하다’라는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다고 강조한다.(이런 강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진부성’보다 더 나은 번역어라고 말하고 싶다.)
이와 같은 지적과 더불어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악의 평범성 개념의 핵심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데 있다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못하는 것이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악의 참모습이라는 것이다.

(16/297p)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아렌트는 악에는 아무런 깊이도 없다는 생각을 피력하며, 다만 생각이 없는 가운데 엄청난 일을 저지르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비판하고자 한다.

(17/297p)

철학과 정치 사이에는 필수적인 긴장 상태가 존재한다고 늘 언급하고는 해요.
무슨 말이냐면,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사이에는 예컨대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에는 존재하지 않는 긴장이 있어요.
철학자 역시 다른 모든 사람처럼 자연에 관해서는 객관적일 수 있어요. 자연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할 때는 전 인류의 이름을 내걸고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아무리 철학자라도 정치에 관해서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어요. 플라톤 이후로 누구도 그러지 못했어요!

(27/297p)

내 기억에는 1920년에 출판된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Psychologie der Weltanschauungen』이요. 야스퍼스의 『세계관의 심리학』은 1919년에 베를린에서 처음 출판됐다─원주. 열네 살 때였어요.
그러고는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를 읽었는데 그 책이 나하고 너무 잘 맞았어요.

(53/297p)

그때와 동일한 정도로는 이제 아니겠죠.
하지만 만사에 대한 신념을 날조하는 것이 지식인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속한다고는 여전히 생각해요.
처자식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전향한 사람을 비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최악이라면 나치즘을 진정으로 신봉한 사람들이죠!
단기간에, 많은 이들이 대단히 짧은 사이에 그렇게 됐어요.
그 사람들은 히틀러에 대한 신념들을 날조해냈는데 그건 부분적으로는 굉장히 흥미로운 상황이에요! 정말로 환상적이고 흥미롭고 복잡한 현상이에요! 정상적인 수준을 훨씬 웃도는 상황이죠! 나는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했어요.
오늘날 나는 그들이 자신들이 고안해낸 신념의 덫에 빠졌었다고 말하고는 해요. 당시 상황은 그랬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나도 상황을 그리 명확하게 보지 못했어요.

(63/297p)

나는 내 모어母語를 잃는 것을 항상 의식적으로 거부해왔어요.
당시 꽤나 잘 구사하던 프랑스어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를 늘 유지해왔죠. 요즘 쓰는 언어인 영어하고도 마찬가지고요.

모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그 문제를 정말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독일어의 경우 나는 상당히 많은 독일 시를 암송할 수 있어요. 시들은 내 마음속 뒷자리에 늘 자리 잡고 있어요.
나는 그런 식의 암기를 다시는 할 수 없어요.
나는 영어로 하면 스스로 용납되지 않을 일들을 독일어로 해요.
다시 말해, 내가 대담해진 까닭에 때때로 영어로도 그런 일들을 하지만, 대체로 나는 영어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왔어요.
독일어는 나한테 남아 있는 본질적인 요소고, 내가 항상 의식적으로 지켜온 언어예요.

(67-68/297p)

항상 그랬죠.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내가 할 일이 뭘까?
미치광이가 돼버린 것은 독일이지 독일어가 아니었죠.

둘째, 모어를 대신할 언어는 없어요.
사람이 자신의 모어를 망각할 수는 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러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새로 습득한 언어를 나보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나는 여전히 독일어 억양이 심한 영어를 구사하고, 관용적인 어법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잦은데요. 그런 사람들은 내 그른 점들을 모두 올바르게 해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클리셰라 할 표현들이 꼬리를 물고 등장해요.
모어를 망각하면 모어를 써서 달성하던 언어적 생산성을 더 이상은 달성하지 못하니까요.

(68-69/297p)

앞서 말했듯이 이 사람들 모두는 두어 달 동안, 심한 경우 2년 동안 나치즘에 헌신했던 사람들일 뿐이에요.
그들은 살인자도 아니고 밀고자도 아니었어요.
말했다시피 히틀러에 대한 신념을 ‘날조’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독일에 돌아오면 하는 가장 일반적이면서 강렬한 경험이─그리스비극에서 항상 행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중의 인정recognition을 받는 경험을 제외하면─감정을 격해지게 만들었어요.
길거리에서 독일어를 듣는 경험이 그랬죠. 내게 그건 뭐라 형언할 길 없는 기쁨이었어요.

(74/297p)

"나는 평생 그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독일인이건 프랑스인이건 미국인이건 아니면 노동계급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것도 말입니다. 나는 내 친구들만 사랑했고, 내가 잘 알고 또 믿는 유일한 종류의 사랑은 개인을 향한 사랑입니다. 게다가 이 ‘유대인들의 사랑’은, 나 자신이 유대인이기에, 나한테는 상당히 의심쩍은 것으로 보이고는 합니다."
아렌트가 숄렘에게 보낸 1963년 7월 24일 자 편지─원주.

(81/2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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