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 it be

나의 모든 관찰 행위는 아무런 긴장도 없이 그저 일어날 뿐이었다. 보편적인 생명감의 결과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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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일상적인 일들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섬세한 움직임에는 호감이 간다. 이를테면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거리를 둔 채 꺼내는 이별의 몸짓, 단호한 대답을 대신하는 정중하면서도 공감이 묻어나는 얼굴 표정, 종업원이 건네주는 거스름돈을 돌려줄 때의 근사한 제스처. 그런 모습을 볼 때 나는 다른 사람들이 춤출 때 느낄 행복감과 더불어 몸이 날듯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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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언쟁을 벌일 때 결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은 논거가 아니라 서로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일에서의 경합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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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연찮은 화해의 순간도 있었지. 무언가가 길을 막고 서 있어서 서로 가까운 거리에서 스쳐 지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우리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른 채 어느새 서로를 껴안고 있더군. 그녀가 무언가를 치우려고 내게 몸을 숙이는 찰나 갑자기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당긴 적도 있어. 애당초 그럴 마음은 없었는데도 말이야. 그렇게 해서 우리는 한참 동안 서로를 휘감고 있었지. 하지만 점점 커져가는 공허를 느꼈고 결국 화가 나서 서로 떨어졌지. 이런 종류의 화해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아. (182/307p)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점점 자유로워짐을 느꼈고 그녀 역시 그러리라고 믿었지. 나는 우리가 더이상 옛날처럼 서로 허물없는 사이로 엮일 수 없고, 더이상 서로를 조롱할 필요가 없으며, 더이상 부부 간의 비밀스러운 대화, 즉 우리끼리만 이해하는 암시적인 말들로 다른 사람들을 우리의 대화에서 배제하는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 우리는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솔직하고 정직하다고 여겼어. 우리끼리만 있는 경우가 아니라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경우, 이를테면 손님으로 레스토랑에 가거나 여행객으로 공항에 나가거나 영화 구경을 갈 때, 그리고 남을 방문하거나 남들 앞에서 일정한 역할을 연기해 보여야 할 때면 우리는 다시 사이좋은 모습을 보였지. 우리는 맡은 역할을 해내는 데 익숙해 있었으니까. 우리가 그런 역할들을 천연덕스럽게 잘해낸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였어. 물론 그러면서도 서로가 가까워지지 않도록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지. 각자가 자신만의 공간에 머물렀고, 상대방과 접촉하는 일이라고는 지나치는 길에 슬쩍 잡아당겨보는 정도가 고작이었어. (183-184/307p)

증오할 때는 그녀를 사물로 여기다가도, 긴장이 해소되면 존재라고 여기는 그런 적당한 거리감 같은 거. (184/307p)

나는 그녀가 하나의 ‘존재’로 거듭나도록 해주려고 그야말로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어왔다. 이 생물, 이 물건이라는 말처럼 나는 유디트를 이라는 지시대명사를 붙여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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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유디트가 우리가 어떻게 이곳 미국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그동안 나를 추적하면서 많은 해코지는 물론이고 살해까지 하려 했다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금은 마침내 서로가 평화적인 방식으로 헤어지기로 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녀가 우리의 이야기를 다 들려주자 존 포드는 말없이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 보였다. (283/3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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