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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가지이 모토지로 단편선 ㅣ 북노마드 일본단편선
가지이 모토지로 지음, 안민희 옮김 / 북노마드 / 2019년 3월
평점 :
우울한 일상을 떠도는 주인공이 우연히 구입한 레몬 하나가 어떻게 내면의 균열을 만들어내는지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서점의 책 더미 위에 올려진 레몬이 폭탄처럼 터지기를 상상하는 장면은, 현실을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잠시 탈출할 수 있는 순간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레몬의 노란 색채와 신선한 향기,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무게까지, 모든 감각이 생존의 언어로 변환되는 놀라운 문학적 표현을 경험합니다.
피로와 무기력 속에서도 삶의 사소한 일들을 우스워하는 '태평한' 태도 뒤에는 죽음에 대한 체념과 동시에 살아있음에 대한 마지막 유희가 숨어있습니다. 죽음에 가까운 자의 눈으로 본 이 세계는 역설적으로 너무나도 '살아있는' 느낌을 전달합니다.
병약한 청춘이 일상에서 느끼는 권태와 우울,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아름다움을 섬세하게 묘사한 이 작품들은 단순히 어둡거나 절망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과 정신의 고양감을 함께 보여주며, 어두움과 빛,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는 복합적인 정서를 선사합니다.
짧지만 진하고, 고요하지만 거센 울림이 있는 이 책은 감각이 무뎌진 현대에 작은 레몬 하나를 독자의 마음에 얹어놓고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명한 감각의 기억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삶이 무너질 때, 당신을 구하는 건 철학이 아니라, 손에 쥔 작고 선명한 감각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