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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왕 하커 ㅣ 선스시 동물동화 1
선스시 지음, 이지혜 그림, 신주리 옮김 / 다락원 / 2017년 10월
평점 :
다락원에서 매혹적인 작품이 나왔네요.
'선스시 동물동화' 라는 타이틀로 제 1권은 '사슴왕 하커' 입니다.
초등 고학년 이상 도서라고 알고 있었는데,
300페이지 이상 두께감이 있는 책이라 놀랐다지요? ㅎㅎ
동물소설, 동물동화 .. 라는 타이틀이 있는 이 책은
사실 처음에는 그 내용이 전혀 가늠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
왜 선스시 라는 작가를 중국 최고의 동물 동화작가라 부르는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칠흙같은 어둠, 밤 하늘을 점령한 거대한 늑대 한 마리.
그리고 신비로운 빛깔을 지닌 대지위에
기세등등한 뿔을 가진 숫 사슴이 있습니다.
바로 사슴왕 하커입니다.
늑대가 주는 긴장감과 사슴왕 하커가 내비치는 위용이
묘하게 상반되는 듯 어우러집니다.
단편 '붉은 젖양 시루아'는 숫 늑대 헤이바오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양 무리를 노려보는 헤이바오.
그에게 필요한건 양의 살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수유가 가능한 암컷 양.
암컷 늑대가 새끼를 낳은 피가 멈추지 않아
숨을 거두었기에 헤이바오는 어떻게 해서든
어린 새끼 늑대들을 키워야 했습니다.
"늑대는 가족 관념이 강한 동물이다.
설령 아내의 간정한 유언이 없다고 할지라고
그는 기꺼이 아버지로서 책임을 지고 새끼들을 키웠을 것이다"
이것이 헤이바오가 수유가 가능한 암컷 양을 노리는 이유...
이 책의 곳곳에는 놀라울 만큼 사실적인 동물 묘사가 눈에 띕니다.
동물들의 모습을 바로 눈 앞에서 보고 쓴 것처럼
세밀하게 글로 표현했고,
각 동물들의 습성, 행태 역시 소설 속에 녹아 내었습니다.
"... 그는 튼튼한 네 다리를 쫙 펴고 시커먼 번개가 내리치듯
쏜살같이 양 떼 속으로 파고 들었다.
(중략)..
몸이 유선형을 그리며 잽싸게 허공으로 날아올라 7~8미터를
솟구쳐 뛰고, 또 다시 날쌔게 날아올랐다. "
육식동물이 사냥하는 모습의 경우
그 긴박감이 너무나 생생하여
다큐멘터리와 같은 리얼함에 드라마틱한 요소까지 절묘합니다.
저 역시 아이들을 모유수유로 키웠기에
아이가 젖을 빨때의 그 시원한 느낌과
한없이 뭉클해지는 감정을 잘 아는데
붉은 젖양 시루아 역시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 따끈한 젖이 금세 편안해지고 긴장이 저절로 풀렸다.
가볍고 상쾌한 느낌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따스한 마음이 복받쳐 올랐다.
새끼 늑대를 향한 증오의 마음과 수유의 쾌감이 한데
뒤섞여 모순된 심정이 극에 달했다"

갑자기 찾아온 비극.
사냥꾼과 개가 늑대 사냥을 왔고,
새끼늑대 헤이추는 위험에 처해집니다.
아빠 늑대 헤이바오는 자신보다 몇배나 덩치가 큰
이들에게 맞서기 위해
사냥꾼과 사냑개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결국 사냥꾼에 총을 맞고 죽게 된 헤이바오.
마침내 늑대동굴에서 탈출한 기회가 생겼지만
시루아는 갈등에 빠집니다.
너무 어린 새끼 늑대 헤이추,
그녀가 떠나면 아직 젖을 먹어야 할 헤이추를 돌볼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새끼를 죽인 원수의 자식 헤이추를 두고 떠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
하지만 시루아는 차마 발길을 옮기지 못합니다.
"젖이 있으면 어미이고,
젖을 먹으면 자식이다.
시루아에게 헤이추는 젖을 먹인 첫 아이이고,
첫사랑보다 잊기 힘든 존재였다"

헤이추를 돌보게 된 시루아는
아직 늑대의 야성이 생기지 않은 새끼 늑대 헤이추를
양으로 키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새끼 늑대 헤이추는 시루아를 따라
매애~ 매애~ 라고 울기까지 했으니까요.
늑대의 습성을 버리게 하기 위해
풀을 먹여 보려 했지만 이내 뱉어버리는 헤이추.
모질게 젖을 물리지 않으면서 까지
헤이추가 풀을 먹기를 바라는 시루아의 마음..
잡아먹는 자와 잡아 먹히는 자가
한 가족으로 사는 것이 불가능했듯
늑대 헤이추는 마침내 제 본능에 따라 사냥을 하고,
피를 철철 흘리며 생고기를 즐기고 돌아옵니다.
뭐라 해도 헤이추는 늑대이고, 그녀는 양이다.
양과 늑대는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어느 날밤, 시루아는 헤이추 곁은 떠났습니다.

무리로 돌아온 시루아는 심적 갈등을 겪습니다.
늑대가 나타나자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남편 양의 모습과
자신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 당당히 맞서던 헤이바오가
자꾸 오버랩되었고,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던 새끼늑대 헤이추가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시 임신을 하고 낳은 새끼, 룬자를
늑대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양으로 키우고자 합니다.
아기양 룬자에게 항상 바위에 뿔을 갈게 하고,
아침 이슬을 맞으며, 밤안개 속에서,
비바람 속에서도 담금질을 하게 했습니다.
이제 룬자의 뿔은 곰을 만나다 하더라도
일격에 구멍 두 개를 뚫을 수 있을 만큼 예리해졌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두 마리의 늑대에게 공격을 받고 있던 절체절명의 순간.
룬자는 자신이 먼저 살기 위해
어미 시루아를 세게 밀치고 앞으로 달려나갔습니다.
말 그래도 꽁무니가 빠지게 빨리 도망치기 위해
어미 시루아조차 룬자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아니야, 이건 꿈이야"
시루아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룬자는 살기 위해 제 어미를 밀치고 좁은 출구를 지나
저 멀리 선양봉까지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새끼가 어미를 모질게 버리고 도망치고,
이제 시루아는 한 쌍의 늑대에게 꼼짝없이 잡아먹힐 신세.. .
그런데 갑자기 수컷 늑대가 시루아를 향해 천천히 기어오더니,
시루아 주변을 이쪽 저쪽으로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매애~~~"
수컷 늑대에게서 양을 흉내낸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
"매애~~"
그것은 헤이추.
자신이 처음으로 젖을 물렸던 짐승,
자신의 품 안을 부비고 자랐던 새끼 늑대, 헤이추였습니다.
누렇고 뾰족한 이 사이에서
비릿한 양의 젖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오랫동안 먹이를 먹지 못해 등가죽이 달라붙은
한쌍의 늑대...
헤이추는 느릿느릿 몸을 돌려 늑대 꼬리로 시루아의 목을 훍었습니다.
허기가 진 암컷 늑대가 어서 공격하라며 헤이추를 이빨로 물어도
헤이추는 꿈쩍 하지 않았습니다.
검은 수컷 늑대 헤이추는 시루아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계곡 밖으로 뒷걸음쳐 사라져 버렸습니다.

빨려들어가는 흡입력!!
책을 펼치자, 거친 산등성이와 메마른 풀 사이를
재빠르게 뛰어넘는 늑대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붉은 젖양 시루아.
모유수유의 감정과 의미는
인간의 느끼는 것과 어미 양의 느끼는 것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첫 젖을 물린다는 것은 내 모든것을 내어준다는 것과 같다는 것...
"젖이 있으면 어미이고,
젖을 물으면 자식이다"
이 구절이 자꾸 가슴에 맴돕니다.
자신이 낳은 자식조차 제 살길을 찾기 위해
어미를 밀치고 꽁무니를 빼었건만
고작 6개월 젖을 물린 새끼 늑대는
"매애~" 하고 기괴한 울음을 터트리며 시루아를
어미라고 여기는 모습에
가슴이 자꾸만 찌르르르 저려왔습니다.
"매에~~"
새끼 늑대가 어미 양 시루아에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가
하얀 설원 가득 메아리치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종을 뛰어 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모성은 자연의 섭리와 본능을 뛰어넘는
위대한 힘을 갖고 있슴을 보여줍니다.
시루아의 모성을 다루는 한편,
시루아의 성장소설이기도 합니다.
'양은 늑대의 먹잇감' 이라는 평범한 상식을 벗어나
늑대에게 당당히 맞서는 강인한 양을 만들려고 합니다.
자신에게 규정지어진 한계를 넘어선
일종의 자기혁신이 보입니다.
새하얀 설원 위에 눈에 확 뜨이고 작은 붉은 점 하나,
시루아...
붉은 양젖 시루아가 너울거리는 불꽃같은 모습으로
펄쩍 도약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선스시 동물동화 1, 사슴왕 하커...
'붉은 젖양 시루아'는
엄마들에게 먼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