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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을 기다리며 ㅣ 필립 K. 딕 걸작선 9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2년 7월
평점 :
시간여행과 관련된 이야기는 항상 매력적이다. 유명한 BBC 영국드라마 <닥터후>,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영화로는 <백투더퓨처>, 최근작으로 <시간 여행자의 아내>까지. 이 소설도 시간여행을 소재로 하였는데, 위에 나온 작품들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이었다.
2055년의 지구. 우주에 다른 종족과도 교류를 하고, Robant(Robot+Servant)라는 로봇하인이 인간처럼 행동하고 있고, 장기이식을 하며 수명을 늘릴수 있는 세상이다. 주인공 에릭 스위트센트는 TF&D(티화나 모피염료사)의 회장 버질 애커먼의 장기이식 전문의로 일하고 있는데, 지구의 UN 사무총장인 지노 몰리나리의 건강이 위독해져서 몰리나리의 의사단에 들어가게 된다.
릴리스타족과 리그족이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몰리나리는 릴리스타족에 동맹을 맺었다. 그런데 지금 리그족이 이기고 있는 상황. 기술력이 지구보다 더 뛰어난 릴리스타족은 지구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려고 하고, 몰리나리는 그런 릴리스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노력중이다. 몰리나리는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지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매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는 특이하게도 다른 사람의 병을 같이 겪는 능력도 있는데, 회의중에 갑자기 죽음의 지경까지 가서 회의를 멈추고 수술을 해야되는 상황까지 이르기도 한다. 이런식으로 회의를 미뤄서 다행히 지구인 150만명을 릴리스타 행성의 공장으로 보내는 결정을 미룰수는 있었다.
이 소설에서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는 JJ-180이라는 환각물질이다. 시공간을 왜곡시키는 물질인데, 전쟁도구로 사용하려고 만들었다가 릴리스타인들이 지구인들에게 쓰는 바람에 문제가 벌어지게 된다. 에릭 스위트센트의 부인 캐시가 바로 이 약에 중독이 되고, 캐시는 해독제를 구하기 위해 남편 에릭마저 몰래 중독시켜버린다. 보통의 경우 이 약에 중독이 되면 과거로 가는데 에릭은 미래로 갈수가 있었고, 그로 인해 미래에 개발된 해독제의 화학식을 외워오고, 앞으로 전쟁상황이 어떻게 되는지도 미래에서 보고온다.
이 정도 이야기면 그동안 나왔던 여러 이야기와 다를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좀 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된다. 바로 몰리나리가 그 주인공. 몰리나리는 왜 회의 중에 그렇게 갑자기 병이 악화가 되는것일까? 검사를 해보면 증상이 제대로 나오지 않고 언제나 심인성 병으로 진단이 되버리고 마는데 에릭 스위트센트는 그에 대한 의문이 들고, 파고 들어가다가 몰리나리도 JJ-180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서부터 정말 재밌는 부분이었다. 몰리나리는 시간여행을 통해서 과거와 미래뿐만이 아니라 평행세계에 존재하는 자기 분신을 지금의 세계로 데리고 와서 자신의 대역으로 쓴 것이다.
p321
"무수히 많은 평행세계로부터 건강한 자기 분신들을 닥치는대로 뽑아오고 있어.
이용할 수 있는 분신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고 있는거지."
p349
"몰리나리가 창건한 것은 자기 자신만으로 이어져 내려가는 왕조였다."
p352
"모든 시간선에 존재하는 모든 몰리나리들은 같은 속도로 노화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최대 30년이나 40년밖에는 계속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한 시간이 있으면 지구는 전쟁을 견뎌내고, 전쟁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몰리나리가 원했던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불멸자가, 신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릴리스타 종족이 전쟁에 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간을 벌기위해 시간여행을 이용해 자신의 분신을 활용한다는 기발한 이야기가 아주 재밌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불화를 겪고 있는 스위트센트 부부의 이야기이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둘은 캐시의 중독 후에도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은데, 해독제를 먹고 나서도 캐시의 뇌는 많은 부분 파괴되어서 병원치료가 필요한 상태이다. 과연 치료가 될지 안될지.. 미래로 시간여행을 한 에릭은 미래의 자신을 만나고 미래의 나로부터 제발 캐시와 이혼하라는 말을 듣게 된다. 완치될 가망이 없는 캐시.. 사랑하지도 않는 사이이지만 차마 인간으로서 에릭은 그런 그녀를 져버릴 수 없었다.
SF 소설다운 면이 있으면서도 일반 문학의 느낌도 나는 독특한 소설이었다. 평행우주, 시간여행을 소재로 해서 스릴 넘치는 상황이 많아서 재미가 있었다. 어색한 부분 없이 매끄러웠고, 일반 문학적인 면도 볼 수 있는 독특한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