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백가는 중국사상사를 통틀어서, 더 나아가 전 세계 사상사적으로도 가장 창조적이고 풍부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시대이다. 류쩌화의 <중국 정치사상사> 제1권의 90%가 제작백가 각 학파의 주장을 논술하고 있다.
반고의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제자백가의 작품은 거의 100여 종에 이른다. 제자백가를 오늘날처럼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사마담과 반고이다. 사마담은 음양, 유가, 묵가, 법가, 명가, 도덕가 등 육가로 제자백가를 나누고, 반고는 종횡, 잡, 농, 소설사가들 더 나우었다. 학파 간 구분 뿐 아니라 학파 내에서도 다양한 파벌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순자는 유가를 '대유' '소유' '아유' '속유' '산유' '천유' '구무유' 등으로 구분했다.
이처럼 학설상의 다양성은 각 사상가들로 하여금 사유의 대상을 각개 영역으로 뻗치게 했고, 이 때문에 제자백가의 저술은 대부분 역사, 교육, 경제, 정치, 철학 등 제 주제를 논하는 백과전서의 성질을 띠고 있다. <순자>를 보면, 철학(천론, 정명, 성악, 비상 등), 정치학(왕제, 왕패, 군도, 신도, 강국, 예론, 악론 등), 경제(부국). 교육(권학, 수신, 불구), 군사(의병), 도덕, 자연과학, 역사학 등 여러 주제를 노급하고 있다. <묵자> 역시 철학, 정치를 비롯하여 군사와 인식론, 논리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백가와 백과가 격량함으로써 문제 하나하나마다 적게는 수 종, 많게는 수십 종의 다양한 견해가 제기될 수 있었다. 이 사상의 보고야말로 중화민족의 문화적 축적이며 지혜의 결정으로 기초가 잘 다져진 위대한 창조다." (260p)
왜 이 시기에 이렇게 많은 사상가가 출현하고, 인식의 지평이 확대되었을까? 류쩌화는 이 시기가 "중국 역사상 대변동의 시기"였음을 지적한다.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는 역사의 도정에서 제자백가는 사람들의 인식 지평 위에 그려진 것이다. 급격한 사회적 변화가 제자백가 출현의 한 원인이다.
제자백가가 출현한 또 하나의 배경은 춘추전국시대 정치변혁과 상호경쟁이었다. 당시 제후국들은 내정과 외교의 과제가 주요 현안이었고, 시의적절한 전략과 정책이 필요했다. 이는 정치가 이론적 지침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지식, 지적 역량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할 수도 있었다. 통치자들은 경쟁적으로 지식인들을 포섭하고자 했다. "어떤 군주는 현자를 구한다는 훈령을 하달하기도 했으며, 어떤 군주는 많은 재물을 사기도 했다." 이 정도로 지식인 층이 정치 공간에서 우대받고 활약했던 것은, 서양에서는 길게 잡아도 5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제후국 간의 상호경쟁은, 백가쟁명의 세 번째 요소, 지식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이 비교적 컸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정치공간의 확대. 지적 경쟁에의 적응은 자연스럽게 정치공간에서 士 계층이 정치권력에 대해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갖도록 해주었으며, 사들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자주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류쩌화는 이를 강조한다. 곧 "사상의 자유가 있었기에 백가가 쟁명할 수 있었으며, 백가의 쟁명이 있었기에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한마디로, 제자백가는 "모든 것을 인식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 확대된 인식의 지평에는 군주와 권력도 포함된다. 이는 "권과 리의 상대적 이원화"로 표현된다. 제자백가는 현실 권력과이치를 이원화해서 이해했다. 류쩌화의 글에서 그 예시를 일부 추릴 수 있다. 유가는 도(이상 정치)와 왕(현실 정치)를 구분하여 도가 군주보다 높고, 왕이 아니라 도에 따른다(從道不從君)라 주장했다. 도가는 제왕을 자연의 도 아래에 위치시켰다.법가 역시 법가적 원칙에 근거해 군주를 품평했다. 장자가 군주를 도적이라고 비판했던 것도, 맹자가 당대의 군주들을 비판했을 때도 이런 전제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국 시대에 권력과 인식의 이원화라는 조건과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백가쟁명을 발전시키고 깊이 있게 만드는 데 아주 훌륭한 환경을 마련해주었다."
따라서 반드시 따라야 할 권위도 없었으며, 이론에 비추어 비판하지 못할 권위도 없었다. 이는 제자백가 상호 간에도 마찬가지로, 그들은 서로 격렬한 쟁명을 벌였는데, 이런 이론상의 상호 공박은 쟁명의 깊이를 더욱 깊게 해주었다.
정치사상적으로 제자백가는 정치이성의 발전을 촉진했다.제자백가는 정치에서 신비주의를 배격하고 정치를 온전히 인간 행위 속의 일로 간주했다. 그들에게 정치란 사람의 능동성을 드러내는 행위이다. 정치철학, 정치에 영향을 주는 요소, 구체적 정치노선과 정책, 통치자의 자기조절 문제를 폭넓게 토론했다. 여기에는 '혁명'의 문제도 있다. 이상은 정치이성의 발전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제자백가가 다룬 문제는 훨씬 많다. 전국시대 이후 사상은 모두 제자백가에게서 그 원형을 찾을 수있다.
지금까지 논했듯이, 제자백가가 쟁명하고 흥기할 수 있었던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있었다. 사상의 자유, 상대적 독립성, 제후국간 전쟁은앞의 두 가지 조건이 가능했던 배경이다. 이러한 조건들에 변화가 일어나면 자연히 제자백가의 상대적 독립성과 상대적 자유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진, 한 이후 봉건통치자들은 모두 특정한 학설을 독존적 지위로 확정하려고 모색했다. 그 결과 사상을 질곡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선택능력과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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