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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스타샤 마르탱은 러시아 캄차카 반도의 에벤인을 연구하던 중, 숲에서 곰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순간, 인간과 자연의 경계는 사라진다. 곰은 그녀의 얼굴을 물어뜯었고, 그녀는 얼음도끼를 휘둘러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지만 육체적 상처보다 더 깊이 남은 것은 그 경계를 경험한 자의 의식이었다. 그녀는 곰의 습격을 ‘사고’나 ‘비극’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곰과 마주할 운명이었으며, 그 만남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이야기한다. 에벤인들은 그녀를 ‘미에드카’(반은 인간, 반은 곰)라고 부른다. 그녀는 이제 인간도, 곰도 아닌 경계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 p.39
‘그가 말한다. 나스티아, 곰을 용서했어? 다시 침묵. 곰을 용서해야 해.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내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처음으로 나는 운명에, 연결고리들에, 우리가 향하는 이 모든 불가피한 것들에 저항하고 싶다. 곰을 죽이고 싶었다고, 내 체계 밖으로 곰을 쫓아내고 싶었다고, 내 얼굴을 이렇게 망가뜨려 놓은 것을 무척이나 원망한다고 그에게 소리 지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소리 지르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숨을 모아쉰다. 그래, 곰을 용서했어.
(...)
곰은 너에게 표식을 남기고 했어, 너는 이제 미에드카야. 서로 다른 세상의 경계에서 사는 자.
책을 읽는내내 ’나였으면‘을 대입해서 생각하게 된다. 나를 죽이려고 한 존재를 용서할 수 있을까? 솔직히… 나는 용서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두려움이 아닌 변화의 순간으로 받아들인다. 이 점이 정말 경이롭고 놀라웠다. 나였다면 결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곰과 싸우고 살아 돌아왔지만, 현실에서도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연구 대상으로, 동정의 대상으로, 때로는 광기 어린 존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로 기록한다. 그녀의 글은 시간의 흐름대로 배열되지 않는다. 사고 당일, 의료 분쟁, 곰과의 조우, 에벤인과의 생활이 자유롭게 교차하며 펼쳐진다. 이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녀가 경험한 충격과 사유의 흐름을 그대로 반영했다.
ᨒ ོ ☼
작가는 이후 어떻게 살아갈까? 그녀는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내린다. 곰에게 습격당하고도, 그녀는 다시 자연 속으로 나아간다. 많은 사람이 이 결정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선택이야말로 그녀가 인류학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자연과 인간이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지를 직접 체험한 후, 그 경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곰과의 만남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스스로 정의하는 것이다. 곰에게서 받은 표식은 그녀가 감당해야 할 삶의 일부가 되었고, 그녀는 그것을 회피하지 않는다.
곰과 마주한 순간, 그녀는 인간과 곰의 세계가 겹치는 그 지점에 존재하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가 이 책을 단순한 생존기를 넘어, 하나의 철학적 선언으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작가는 곰을 ‘짐승’으로,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곰은 적이 아니었고, 그저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가던 존재 자체였다. 그녀는 곰과의 만남을 통해 인간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깨닫는다.
책을 완독한 이후에도 숲으로 떠난 그녀의 모습이 그려져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숲은 그녀가 있어야 할 ‘집’ 그 자체다. 곰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그녀는 곰을 미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만남이 자신을 변화시켰다고 이야기한다. 옮긴이의 말처럼 이 책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나스타샤 마르탱은 미지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존엄한 인간이다.
*비채 3기 서포터즈로서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읽고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