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 삶, 사랑, 관계에 닿기 위한 자폐인 과학자의 인간 탐구기
카밀라 팡 지음, 김보은 옮김 / 푸른숲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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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살에 자폐스펙트럼장애를 진단받고, 오랜시간 ADHD, 범불안장애, 강박장애, 감각처리장애와 함께 살아온 여성 과학자가 생물화학, 물리학, 통계학 등 과학을 기반으로 한 지식을 통해 인간 심리와 행동에 관해 풀어나가는 흥미로운 책. 무엇보다 이 책은 '행성을 잘못 찾아온 것 같다'고 생각하던 고립된 다섯 살 여자아이가 어엿한 과학자로 자라, 과학을 통해 공감, 이해, 신뢰와 같은 불가사의한 감정에 가닿는 이야기다. 그리고 저자는 '내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다'며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서 타인과 연결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평생 스스로의 삶을 실험실 삼아 실패한 실험들을 쌓아온 감동적인 이야기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과학책. 스티븐 호킹, 빌 브라이슨 등 수십 년간 뛰어난 수상자를 배출한 영국왕립학회에서 2020 최고의 과학책 상을 수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괴상한 칵테일처럼 뒤섞인 내 신경다양성이 축복이기도 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신경다양성은 내 삶의 강력한 무기로, 빠르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완벽하게 분석하는 정신적 도구가 되어 나를 무장시켜주었다.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졌다는 것은 내가 세상을 다르게, 편견 없이 본다는 뜻이었다. 불안과 ADHD는 내가 ‘스카이콩콩’을 타듯 지루함과 강력한 집중 상태를 넘나들면서 빠르게 정보를 처리하며, 내가 처한 각각의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온갖 결과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게 해주었다. 나의 신경다양성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관련된 질문을 수없이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그 질문들에 답할 능력도 주었다.


---「들어가는 말: 내가 이 행성에 온 이유,p.13」중에서



데이터를 분류해서 의사결정나무를 세울 때에야 비로소 당신 앞에 펼쳐진 선택지들을 탐색할 방법을 볼 수 있고, 의미 있는 결과(예를 들면 ‘그것이 나를 행복하고 충만하게 해줄까’)에 근거한 의사 결정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네’ 혹은 ‘아니요’ 같은 이분법적 결정보다 항상 더 복잡하다. 우리는 즉각적인 선택 기준보다 더 깊이 파고들어서 의사 결정을 앞둔 우리의 감정, 야망, 희망, 공포 같은 데이터를 발굴하고, 그것들이 모두 어떻게 연결되며, 어떤 것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특정 선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거나 가져다주지 못할 것을 더 현실적으로 볼 수 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관한 기본 원칙을 근거로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우리 주변에 흩뿌려진 상자에 자신을 끼워 맞추는 일은 줄인다. 이 상자들은 그저 우리의 감정적 응어리와 즉각적인 본능을 나타내며, 이렇게 쌓여있는 상자 속에는 행동하는 법에 관한 사회적 ‘의무’(“젊었을 때 세상을 돌아다녔어야 했는데”, “해외에서 위험한 직업을 갖는 대신 정착했어야 했는데” 등등)가 종종 들어있다. 정신 건강의 변동성은 자연스럽게 이런 상자들을 열어젖히기 때문에 종종 승산 없는 싸움으로 여겨지곤 한다.


---「CHAPTER 1: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법,p.41」중에서



엄마와 방 청소 문제로, 그리고 엉망이라는 상태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으로 언쟁해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어수선한 내 왕국은 게으름보다는 불안의 결과였다. 훈련되지 않은 눈에는 혼돈의 광경으로 보이겠지만 내게는 개인 용도에 맞춰진 상태였고, 모든 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내려놓은 자리에 있었으며,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최적의 장소에 자연스럽게 놓여있었다. 바닥 한가운데에 흩어져 있는 소지품들은 아무렇게나 놓인 게 아니라 어디에서든 내 손에 닿도록 배치한 것이었다.



비록 엄마와의 논쟁에서는 감히 말하지 못했지만 내 방의 수상쩍은 상태는 열역학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열역학은 에너지가 어떻게 움직이고 전달되는지를 설명하는 학문으로 물리학의 한 분야다. 열역학 법칙은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주는 필연적으로 더 무질서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니 질서를 세우려는 우리의 모든 노력은 열역학 제2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다.열역학 제2법칙은 계系(경계나 수학적 제약으로 정의된, 실제 또는 상상적인 우주의 일부분. 주위와의 관계에 따라 닫힌계, 열린계, 고립계로 구분된다?옮긴이)에서 엔트로피(대략 ‘무질서’라고 보면 된다)는 항상 자연스럽게 증가하며,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는 줄어든다고 일러준다. 따라서 어수선한 방은 아마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근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결과다.


---「CHAPTER 3: 완벽함에 집착하지 않는 법,p.81~82」중에서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사람에게는 모든 생각과 공포가 눈부신 빛처럼 달려드는 순간이 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경험하지만, 다양한 감정과 불안, 충동, 자극을 분리할 선천적인 능력은 없다.내게 또 하나의 거대한 공포의 대상인 화재경보기가 울릴 때면 끔찍한 소음이 내 몸 전체를 관통해 떠나갈 듯 울리며 내 감각을 새빨갛게 달군다. 오직 몸으로만 두려움을 느낀다고 상상해보라.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이 군인처럼 단정하게 줄지어 설 때, 나는 항상 가능한 한 멀리, 더 빠르게 소음에서 달아났다. 이럴 때는 블라인드를 내린 채 어두컴컴한 방에서, 소음을 막아주는 헤드폰을 끼고 내 책상 아래 안전한 천막 속에 앉아 지냈다. 이것이 내 생존법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CHAPTER 4: 두려움 다루는 법,p.111」중에서



공포를 대할 때 그것을 축소하려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다. 사람들은 공포를 가능한 한 가장 작은 상자에 압축해서 우리의 마음에서 가장 먼 후미진 구석에 넣고 잠가버릴 수 있다면, 공포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포를 이런 식으로 통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어느 날 태양이 떠오르지 않으리라고 가정하는 것과 같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일으킨다면 왜 불안감이 드는지, 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할 때까지, 그것은 계속 불안감을 촉발할 것이다. 부정은 최초의 본능적인 의지이긴 하지만 선택 사항은 아니다.


---「CHAPTER 4: 두려움 다루는 법,p.119」중에서



나는 차 한잔을 마시려는 순수한 의도로 부엌에 갔다가, 차를 우리는 동안 재미있는 책을 집어 들 수도 있다. 차를 우리던 것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메모지를 발견하고는 급히 메모를 휘갈기다가 갑자기 식료품 가게에 물건을 사러 갈 수도 있다. 가게에 가서 내 불안 증상을 가라앉혀 줄 껌 한 통만 사서 돌아오다가, 차를 우려놓은 것을 잊어버려서 머그잔이 찻물로 물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머그잔을 씻으려 고무장갑을 껴놓고는 고무장갑을 낀 내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느라 설거지는 잊어버릴 수도 있다. 절대로 마시지 못할 차 한잔에 들어가는 노력이 이토록 크다.


---「CHAPTER 6: 조화를 이루는 법,p.145~146」중에서



공감을 경험하기 시작한 후, 공감은 내게 거의 마약과도 같았다. 너무나 오래 경험해보지 못했던 것이어서, 마치 수년 동안 빛을 못 보거나 음식을 먹지 못했던 사람처럼 기회가 닿을 때마다 달려들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들과의 연대감을 동경해왔다. 누군가는 미쳤거나 비정상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실제로 상대방을 예단하지 않으며, 이런 면에서 당신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래서 나는 공감을 고통스러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지옥처럼 괴롭지만 다른 감정이나 경험이 따라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CHAPTER 6: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법,p.172」중에서



20년 넘게 집단을 연구한 결과는 모두 명확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맞서 싸우기보다는 수용해야 할 이중성이다. 나와 우리 사이에서 균형을 창조하려는 난투에서 궁극적인 승리자는 존재 하지 않는다. 개인과 집단 모두 우리 삶에서 맡은 본질적인 역할이 있으므로 둘 다 존중되어야 한다. 개인도 집단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제공한다. 한술 더 떠서, 둘 중 어느 쪽도 사라지지 않는다. 개인의 성격과 특징은 아무리 바꾸려 해도 항상 그 안에 존재할 것이다. 동시에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 속으로 후퇴하더라도 세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자신만의 섬에서 살려고 노력해도 완벽하게 독립적인 삶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집단을 통해서만 충족할 수 있는 감정적이며 실질적인 욕구가 있다. 어느 시점에는 고독을 수용한 사람조차도 자신의 해변을 떠나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우리의 고독한 노력과 비교할 대상이 없을 것이다.


---「CHAPTER 6: 대중에 휩쓸리지 않는 법,p.173~174」중에서



사실 내가 공감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공감이라는 주제는 아스퍼거증후군이 있는 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지겨울 정도로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 봐”라는 말이다. 자폐증이 있는 사람이 공감하고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면 가능한 모든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알아낸 사실을 하나 말하자면, 공감을 자주 언급하는 사람일수록 막상 공감 능력을 보여주는 데는 서투르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특정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이유를 내가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상대방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알아내려 노력한다는 점은 믿어도 좋다. 선천적인 공감 능력이 결핍되었다는 말은 타인의 의도와 기대를 예측하려면 더 힘들게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 눈을 통해서, 관계는 상대방이 기대하는 요구에 내 행동을 맞추어야 하는 복잡한 방정식이 된다. 관찰과 계산, 실험으로 얻는 공감이다.


---「CHAPTER 8: 공감하는 법,p.211」중에서



다른 사람처럼 나도 항상 무리와 어울리고 싶었다. 엉뚱한 행성에 착륙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현지인들 사이에서 외계인처럼 살겠다는 말은 아니다. 웨일스에서 자라고, 코츠월드에서 학교에 다니고, 브리스틀에서 대학을 나와 런던에서 직장을 얻기까지, 나는 주류에서 유영하려 부지런히 움직였다.


---「CHAPTER 10: 실수에서 배우는 법,p.275」중에서



한 사람으로서 성장하는 일은 믿기 힘들 정도로 좌절감을 준다. 이 모든 일을 해내도 당분간은,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낙담하고 포기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 보상은 어느 날 변화가 당신에게 살금살금 다가올 때까지 인내하고 불확실성과 자기 회의감을 극복하는 데 있다. 이 일이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우리는 계획할 수 없다. 그저 일에 착수하고 과정을 신뢰할 뿐이다. 그러니 실현되지 않은 계획에, 이루지 못한 목표에, 실패한 관계에 절망하지 말 것. 대신 거기에서 배우라. 그리고 다음에는 조금 다른 것을 시도해 보자. 나만의 방식으로 일하는 법도 실험해 보자. 삶이 나아지는 과정은 느리고 점진적이라는 인간의 필연성을 받아들이자.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의 다름을 악마 취급하지 마라. 내가 그랬듯이, 당신이 타고난 초능력으로 차이를 수용하라. 무슨 일이든 잘 풀리기 전에 한 번은 잘못될 것이다. 상황이 좋아지기 전에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괜찮다. 사실 그 과정이 필요하다. 실패하는 실험을 즐기라. 혼자서 해내는 과정을 누리라. 그리고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사과하지 말 것. 나는 절대로 그런 적이 없고, 지금도 그럴 생각은 없다.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연결되는가?”


관찰과 계산, 실험을 통해 기어코 이해한 삶, 사랑, 그리고 관계



지구에서의 삶이 시작된 지 5년쯤 지났을 무렵, 카밀라는 생각했다. ‘엉뚱한 행성에 착륙한 게 틀림없어.’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인데도 마치 궤도 밖에 있는 것처럼 평생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곳. 가족의 말조차 외계어로 들리던 곳. “엄마, 인간 사용 설명서는 없나요?” 상대방의 표정을 읽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지만, 다섯 살의 카밀라는 순간 엄마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을 보았다.



소외감에 빠져 지내며 삶의 생기와 점점 멀어져가던 그의 손을 잡아당긴 것이 바로 과학이었다. 일곱 살 때 삼촌의 서재에서 발견한 새로운 세계. 카밀라는 생애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만났다. 매주 일요일마다 그는 서재에 틀어박혀 온갖 과학책에 파묻혔다. 과학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도, 의도를 숨기지도, 뒷말을 하지도 않았다. 세상이 보여주기를 거부했던 확실성을 찾아 끝없이 헤매온 그에게 과학은 가장 충실한 조력자이자 가장 진실한, 최초의 친구였다.



그렇게 카밀라는 과학의 언어를 통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삶의 모든 무대가 실험실이었고, 만나는 모든 사람이 연구 대상이었다. 공감, 사랑, 신뢰와 같은 감정을 불가사의한 존재로 느끼던 그는 과학이라는 다리를 건너 기어코 닿을 수 없던 곳에 가닿을 수 있었다. 관찰과 계산, 실험으로 얻은 연결감이다. 저자는 말한다. 누구나 자기 자신으로서 타인과 연결될 권리가 있다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결코 사과하지 말라고.



“나에게 과학은 단순히 연구 분야가 아니다.


과학은 감수성 없이 태어난 내가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다.”



과학은 성공만큼이나 실패에서 배우는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도 그렇다고. 삶이 나아지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느리고 점진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일은 그래서 느릴 수밖에 없다. 변수를 바꿔가며 수없이 실험을 거듭하듯, 삶을 통해 실험하고, 실패하는 실험을 즐기며, 혼자서 해내는 과정을 누리라는 것이 결국 카밀라 팡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다.



이 책의 시작도 사실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지도교수는 훌륭한 글이지만 논문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밀라는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인간 사용 설명서’를 탄생시켰다. 이 책에서 저자는 머신러닝을 통해 가장 좋은 선택지를 고르는 법을, 단백질 결합과 파동이론을 통해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법을, 열역학을 통해 완벽주의를 극복하는 법을, 양자물리학을 통해 목표를 이루는 법을, 딥러닝을 통해 실수에서 배우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말 그대로 관찰과 계산, 실험을 통해 삶과 관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제1장에서는 기계가 창의성이나 융통성, 감정적 인식이 부족하다는 면에서 인간의 뇌를 대체하기에 부족하지만, 사고와 의사 결정을 더 효율적으로 하는 법에 관해서라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정보와 선택지에 압도당할 때 말이다. 여기서 저자는 알고리즘을 프로그래밍하는 두 방식인 ‘지도 학습’과 ‘비지도 학습’을 ‘상자 속에서 생각하기’와 ‘나무처럼 생각하기’ 방식으로 대조해 설명한다. 의미 있는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 하는 ‘네’ 혹은 ‘아니요’ 같은 이분법의 상자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각적인 선택의 기준보다 항상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 의사 결정을 앞둔 우리의 감정, 야망, 희망, 공포 같은 데이터를 발굴하고, 그것들이 모두 어떻게 연결되는지 이해해야 비로소 진짜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과학의 가르침이다.



제3장에서는 방 청소 문제로 엄마와 갈등을 빚은 에피소드를 꺼내며, 방 정리가 힘든 것은 우주의 이치라는 재치 있는 위로를 우리에게 건넨다. 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언제나 증가한다. 즉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주는, 그러니까 우리의 방은 필연적으로 더 무질서해진다는 것이다. 집을 깔끔하게 정돈하는 일이 어려운 것은 자연히 무질서로 향하는 환경에서 엔트로피를 낮추려 애쓰기 때문이며, 따라서 방을 정리하라는 엄마의 요구는 그저 게으름을 극복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열역학의 근본 원리에 대항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라는 아주 과학적인 핑계거리까지도 제공한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건 동료 인간을 이해하는 일.”


다양성과 전형성의 스펙트럼 위에서 춤추는 카밀라의 삶



자폐스펙트럼장애, 아스퍼거증후군, ADHD, 범불안장애 등 신경다양성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카밀라의 삶은 조종기 없이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팬 없이 요리하거나, 악보 없이 악기를 연주하는 일과 비슷하다. 스스로 ‘정상’이라고, ‘평범’하다고 느낀 적이 단 한순간도 없던 그는 마치 고립된 섬에 사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는 아웃사이더였고, 아이들에게 아웃사이더를 괴롭히는 일만큼 흔한 일이 없었다. 괴롭힘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것조차 시간이 걸렸다.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저자에게 포옹이나 가벼운 키스 같은 일상적인 스킨십마저 이상하게 느껴지지만 오히려 그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더 노력한다. 공감은 다양한 형태와 언어로 표현되지만, 무엇보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과 연결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공감의 제스처 그 자체다. 저자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하면 그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지 다른 사람보다 오래 고민하고 이해하기 위해 과학의 힘을 빌려 자신만의 언어로 해석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시간 자체가 공감의 한 형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이 시작된 이후 내 삶을 지배해왔던 질문이 하나 있다. 원래 그렇게 프로그램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연결되는가? 나는 사랑, 공감, 신뢰 같은 감정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절실하게 알고 싶다. 그래서 나는 말과 행동, 사고방식을 시험해보면서 내 삶에서 직접 과학 실험을 했다. 완전한 인간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내 동족 사이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 되고 싶었다.”(15쪽)



중국인 아버지와 스페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웨일스에서 자란 환경 또한 저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두 문화권을 다 경험하면서 자랐기 때문에 문화권마다 다른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규칙은 상황에 맞게 구부러지고 유연해질 수 있기 때문에 멋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카밀라의 어머니는 예술가이고 아버지는 과학자 겸 엔지니어인데, 그는 스스로 예술가가 되기에는 너무 논리적이고 데이터 과학자가 되기에는 너무 감성적인, 그 중간 어딘가에 끼어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며 자랐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서 통상 ‘정상’이라 불리는 신경전형성의 반대편에 있는 신경다양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가끔은 내가 자폐증이 더 심했으면 좋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자신이 가진 여러 신경다양성 특징을 ‘비정상’ 혹은 ‘장애’가 아닌 ‘차이’ ‘다름’ ‘초능력’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당신이 저자와 얼마나 비슷하다고 느끼든 혹은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든, 이 책은 당신에게 삶과 관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안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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