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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사
백가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9월
평점 :
백가흠 작가의 소설집 '사십사'를 읽었다.
이 소설책은 오프라인 서점에서 뭐 읽을 것 없나 둘러보던 중, 순전히 책표지에 이끌려 집어들게 된 책이다. 가끔
나는 록 음반을 고를 때, 밴드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이 없는데도 순전히 앨범 커버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홀리듯 이끌려 앨범을
주문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번 책을 고른 동기 역시 그와 마찬가지이다.
백가흠이라는 작가는 처음 들어본 줄 알았는데, 수록작품을 읽어보니 예전에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읽어본 경험이
있는 작가였다. 내가 읽어보았던 단편은 '한 박자 쉬고'. 이번 단편집의 제일 처음에 실린 작품으로서 처음 읽었을때나 지금 다시 읽어보았을 때나
역시 마찬가지의 파격과 충격이 동일하게 전달되었다.
'한 박자 쉬고'는 중년의 나이가 된 주인공이 우연히 동네 까페에서 만나게 된 고등학교 동창과의 일화를 통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며 느끼는 감정을 토로한다. 고등학교 시절 주인공 '나'는 소위 일진 혹은 짱으로 여겨지는
'그'로부터 학교폭력을 경험함으로서 내면에 트라우마가 생기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더러운' 기억인데, 독자인 나 역시
읽어가며 정체모를 과거의 '일진'들에게 분노하며 부들부들거렸더랬다. 누구에게나 학창 시절 두려워했던 반 친구 한두명 쯤이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중2병 걸린 남학생 천지의 반 내에서 소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던 녀석을 떠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는 한참
과거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의 기억은 지금 내가 그 녀석을 대면한다면 과연 어떻게 할까 의구심이 들며 읽었던 문제작이었다. 뭐 이렇게
적기는 했지만 나는 전혀 괴롭힘을 당하거나 따를 당한 것은 아닌 주변인이었는데도 이러한 감정이 드는데, 하물며 학교 폭력의
피해자들이라면...지금 성인이 된 피해자들은 오죽 더할까.
대체로 이러한 단편집 류는 순서대로 처음 실린 작품들이 제일 좋고 뒤로 밀릴수록 퀄리티가 떨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십사' 역시 마찬가지이기는 하나 그래도 제법 수록작품 간 편차가 큰 편은 아니다. 그만큼 골고루 만족을 주었다는 얘기.
두 번째 실린 단편 '더 송The Song'의 주인공의 성격은 참으로 괴팍하다. 그는 흙수저임에도 불구하고 운이
따라 교수직에 오른 자이나, 애초에 그릇이 작은 남자이고 모든 것이 '거짓'에 불과한 꼰대 아재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과거 스무살
대학생 초반에 겪었던, 여자친구와 여자친구의 친구, 그리고 그녀의 개를 둘러싼 대립과 파경으로 인해 남모를 분노를 꾸준히 적립해왔던 자이다.
그를 동정할 생각은 전혀 없으나, 왜 그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에 대한 이해 정도는 갈 만한 단서를 제공해주며 독자로 하여금 그에 대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려 시도하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는 못하다.
세 번째 단편 '흰 개와 함께하는 아침'에도 개가 나온다. 그리고 역시
교수이자 주인공인 '그'가 나오며, 20년이나 어린 애인 '그녀'가 나온다. 설정 자체는 야릇하지만 어린 애인이 마냥 부러운 것은 아니었다.
굉장히 짜증나게 하는 상황묘사로 도덕성에 의구심을 가지게 하는 '그'를 옹호하게 되는 사태마저 이르게 된다. 얼핏 보면 그는 일이나 여자 모두
성공한 남자로 보이나, 쉰이 되어서야 겨우 정규 교수로 임용되어 안절부절하지 못한 채 후배의 눈치나 보고 스무살이나 어린 애인에 질려 도망치고
싶은 절망을 백가흠 작가는 묘사해낸다. 일종의 개미지옥인 셈이다.
네 번째 단편 '아내의 시는 차차차'는 제일 재미나게 읽은 단편이다. 치킨집을 하다 망해버려 백수가 된
주인공은 아내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용돈이나 타며 하루를 일소하는데, 우연히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시 강좌를 듣게 됨으로서 겪게 되는
일상의 작은 변화를 냉소적이지만 유머러스하게 묘사했다.
가장 끔찍하게 읽은 네 번째 작품 '흉몽'. 이건 진짜...주인공의 성격은 쓰레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파탄자이다. 그런 그가 '입술'을 잘려 모든 것을 잃게 되며 정말로 인간쓰레기가 되어버렸다. 그는 더이상 사회에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된
것이다. 입술을 잃게 된다는 설정이 굉장히 파격적이었으며 주인공이 결코 불쌍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그 외 수록작품들 역시 상당히 인상깊게 읽었다. 그리고 소설집 전체를
아우르는 어떠한 설정이나 분위기랄 게 느껴지는데, 그것은 작품들이 모두 굉장히 우울하고 비관적이라는 점이다. 백가흠 작가는
철저히 작은 지옥만을 묘사할 뿐, 어떠한 구원이나 희망의 단서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이 참으로 소름끼치는 대목이다.
이 책에는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다. 악몽같은 지옥, 지옥같은 악몽만을 선사한다.
앞으로 백가흠 작가를 좀더 주목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