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은희경 작가의 소설집이다.
'새의 선물'을 읽은 후 은희경 작가의 글이라면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치게 된다.
각 글들의 스토리들을 따라가다보면 순간 멈칫 하면서 눈길을 멈추게 되는 문장들이 있다.
그리고 글의 마지막을 읽고 다른 글로 넘어갈 때면 잠시 책을 덮고 장면들을 떠올려보게 된다.
장면들에서 나타난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되돌아보게 된다.
은희경 작가 글이 매력적인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하나의 문장이 남기는 여운,
하나의 글이 끝난 이후 바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게 사람의 마음은 흔들어 놓는 힘.
아마도 인물과 장면에 대한 묘사,
그리고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바라보는 따뜻하고 깊이 있는 시선에서 나올 수 있는 것 같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중에서..
(p. 21) "나는 무엇을 간절히 원하기 이전에 내가 그것을 원해도 되는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조건에서 살아왔을 뿐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 소극적이지 않았다"
(p. 47-48) "B는 자신의 태어남에 대해 농담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너하고 난 달라. 네 아버지는 너를 얻기 위해 잠시 커튼 뒤로 들어갔지만 우리 아버지는 나를 원한 적이 없어"
어려서부터 뚱뚱한 체중을 가지고 살아온 '나'
불필요한 출생이었음을, 부모로부터도 어쩔 수 없이 태어난 존재라고 가슴 깊이 박아놓고 살아온 '나'
내가 무엇을 원하기 전에 원해도 되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조건에서 살아온 '나'
사람이 태어나 처음 마주하는 사람이 부모이고, 처음 만나는 공동체가 가족이다.
기본적인 애정, 인정 등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고 결핍으로부터 시작된 삶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성장하게 될까?
참 슬프고 비극적이다.
누구에게나 자라온 환경, 조건들이 다르다.
누군가는 말한다. '환경이 그러할지라도 본인이 똑바로 하면 되지'
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무례하고 비인간적인 말인가 싶다.
어린시절의 결핍은 성장하는 과정에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것 같다.
다만, 결핍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한 '나'는 결국 다이어트에 성공하지만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가서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다
과연 정말 배고 고파서 그렇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을까?
내 안의 결핍, 구멍난 부분을 무엇으로라도 채우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을까?
내가 만나고 있는 주민들, 청년들은 구멍이 참 많다.
과거부터 깊숙하게 자리하고 있는 구멍이 채워지지 못하고 살고 있다.
누군가는 무기력으로, 다른 누군가는 분노와 우울로, 또 다른 누군가는 약물이나 알콜에 의지해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결핍의 책임을 개인들에게 지우기에는 너무 잔인한 것이 아닐까?
<지도 중독> 중에서..
(p. 144) "인간들은 다르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와 다른 인간을 배척하게 돼 있어. 하지만 야생에서는 달라야만 서로 존중을 받지. 거기에서는 다르다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야. 사는 곳도 다르고 먹이도 다르고 천적도 다르고, 서로 다른 존재들만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거야"
(p. 145) "올바른 길이란 건 없어. 인간은 그저 찾아다녀야 할 뿐이야"
아무 의미도,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던 지도라는 물건을 새삼스레 생각헤보게 된다.
방향감각이 무딘 나로써는 지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하지만 산행을 하는 과정에 지도를 붙들고 집착하는 선배의 모습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도를 인생의 지표라고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찾을 때 우리는 지도를 찾는다.
어떻게 가면 더 쉬운 길로, 빠른 길로 갈 수 있는지 따져본다.
인생도 이런 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인생의 길은 답이 없다.
이 길로 가다가도 저 길로 이어지기도 하고, 저 길로 가다가도 문득 아니다 싶으면 뒤돌아가기도 하고...
그렇게 찾아다녀야 할 뿐인 것을...
그렇기에 누구의 인생이 옳고, 부럽고, 또 누구의 인생은 비난받고 책망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지금도 길을 찾아다니고 있는 것이기에.
<유리 가가린의 푸른별> 중에서..
(p. 202) "세상 사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어쩌면 틀을 갖는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일종의 삶의 매뉴얼 말이다. 아무리 복잡한 일도 틀에 집어 넣으면 단순해져버린다. ... 그것을 경륜이라고 좋게 보든 보수화되었다고 비난하든 상관없다. 분명한 것은 세상일이 놀랍지 않게 생각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무기력해진다는 사실이다....두려움도 없지만 설렘 또한 없다. 행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행복한 것도 아니다"
(p. 209) "나는 젊은이들을 그리 부러워하지 않는다..... 젊음으로 되돌아가서 그 힘든 과정을 되풀이해 다시 이곳으로 오는 것보다는 이 지점에서 내가 가진 것을 충분히 누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p. 215) "한번쯤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봐야 하는 거 아냐? 아직 그 정도 시간은 남아 있겠지?"
<지도중독>은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유리 가가린의 푸른별>은 시간이 지남에따라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삶의 모습에 대해서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어느 과정을 내가 지나고 있든지 그 안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인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는 하나의 과정에서 내가 만족하고 감사한다면,
나의 결핍을 직시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힘이 있다면,
무뎌진 삶이라고 해도 행복과 설렘의 작은 순간들을 만들고 느낄 수 있다면
그래도 괜찮은 인생이 아닐까 싶다.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독한 모습이 너무나 섬세하게 그려져서 아프지만
마지막 장면마다 남겨준 여운은....
그래도 살아가고 있는 우리.
그래서 어떠한 모습으로든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는 삶이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