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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오면 떨어질 말들 - 행복도 불행도 아닌 다행이 이긴다 ㅣ 사계절 시리즈
민용준 지음 / 북스톤 / 2024년 10월
평점 :
“ 나에게는 비로소 찾아온 첫 번째 가을이었다. 떨어질 때가 와서 떨어뜨릴 수 있는 언어들을 받아줄 단일한 기회. 나는 그리 여겼다. 그렇게 생하는 마음과 동하는 생각으로 맺히는 말들을 똑똑 떨어뜨렸고, 한 달여 동안 떨어뜨린 마음과 생각이 한 권의 책으로 고였다. 그것이 이 책의 전말이다. ”
| p11
ㅇ
‘말’이 ‘떨어진다’는 것이 생경했지만
그의 글을 읽을수록,
뚜렷해지는 그 만의 계절이 있었다.
한 사람의 내면에서 터질듯이 무르익어
아래로 떨어지고 마는 고유한 삶의 이야기들.
이 글은 가을에 대한 감상이 아니다.
인생의 계절을 사계로 나눈다면,
가을이라는 계절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삶의 이야기이다.
나의 가을은 곧 치열했던 여름을 뒤로하고
다가오는 충만함과 풍요의 계절이다.
“ 저는 계속 쓰고 싶어요.
비록 그것이 영광의 시대로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쓸 수 있는 나라면, 가급적 그것이 나의 한계를 마주하는 괴로움이라 해도 투명하고 솔직하게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라면 그렇게 살고 싶다. 그렇다면 늘 ‘지금’일 수 있지 않을까?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난 지금입니다!”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
| p134
책을 읽을수록 저자는 도대체
몇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글의 주제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고 해야할까?
반려묘 ‘구니니’를 이야기할 때는
유쾌하고 다정한 면모를 애써 숨기며
풋풋한 글을 쓰시더니,
영화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본업에서 나오는 예리함과 깊이 있는 분석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절절한 사부곡에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그는 애써 그 사랑을 숨기고 아니라고 했지만,
내가 읽기로는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사무친 사랑이 고스란히 보였다.
이 한 권의 책 안에 수 많은 얼굴이 담겨있다.
그 모습에 때로는 웃기도, 가슴을 치기도 하고,
거듭 내가 가진 기억속을 파고들게 했다.
가을이라는 계절이
이토록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 아쉽지만
이 가을에 떨어진 말들로 내 삶을 향유한다.
찰나를 놓치지 않고 충만하게 채워두고
다가올 겨울에 푹 재워둔 땅에서
봄의 초록이 돋아날 때까지
나는 그렇게 새로운 계절을 기다릴 것 같다.
이것이 끝이 아니기에.
오늘을 딛고 다시 시작할 나날들을 기다린다.
+
수양이 덜 된 마음이 간혹 그리로 넘어지려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과정이라 생각하면 마음이 다소나마 편해진다. 심각하게 망가지거나 돌이킬 수 없게 어리석지는 말자고, 적어도 비겁하거나 치졸하지는 말자고 다짐한다. 살아가는 데까지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살아가고 있는 데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충실하게 느껴보려는 노력이 요즘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시절도 있었으나 요즘은 기우는 마음을 따라 솔직하게 넘어질 수 있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게 더더욱. | 62-63
결국 행복도, 불행도 가끔씩 오는 일이다. 중요한 건 다행이다. 늘 범상하게 살아갈 수 있는 나날이 있다는 것, 그러한 다행의 나날을 유지하고 지켜내는 것. 그런 다행을 견지하고 견인하며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가끔씩 행복을 맞으며 기뻐할 수도 있고, 불행을 견디며 안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 63-64
당연한 말이지만 이 모든 견해는 나의 개인적인 삶에 관한 것이므로 특별한 공감이나 이해를 바라진 않는다. 각자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면 될 일이니까. 타인의 불행이 나의 것이 아니듯, 나의 불행은 오로지 나의 것이다. 나는 그렇게 나의 불행이 고유하길 바란다. 타인의 불행에 견주어 나의 불행을 안도하고 싶지 않으므로, 타인의 삶에 견주어 그 척도를 가늠할 필요 없이, 행복도 불행도 온전히 나의 것이길 바랄 뿐이다. | 211
가까스로 닿아보는 것과 우두커니 남겨지는 것은 결코 같은 처지가 아니다. 물론 그때는 맞고 지금은 아니다. 지금이야 과거 어디 쯤 맺힌 기억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때여야 했다. 그런 일들이 있다. 피워야 할 것은 그때 피워야 했고, 떨어져야 할 것은 그때 떨어져야 했다. 마음이든, 말이든, 그랬다. 그래야 한다. | 243
(도서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