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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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한 건지 박탈감을 심어준 건지 끝내 알지 못했다, p128

#기차의꿈
#데니스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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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그레이니어’에게 기차에 대한 기억은
여섯살 무렵의 시절에서 출발한다.
부모님을 잃고 사촌들의 손에 이끌려
가슴에 목적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단 채,
홀로 기차에 올라야 했던 여섯살 아이.
처음 보는 기차의 소리와 석탄을 태우는냄새,
그 압도적인 위용, 수시로 변하는 창밖의 풍경보며
며칠동안 대륙을 가로질러 고모님의 댁에 당도하고,
그가 원했는지, 아닌지도 모를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특별하지 않지만 불행하지도 않았던 날들이었다.
서로를 가득 채워주는 꽃 같은 아내 글래디스와
갓난쟁이 딸 케이트와 함께 소박하지만 충분하게
이 세상에서 잘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집을 떠나 며칠동안 철로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던 길에 거대한 산불이 마을을 덮쳤고,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집의 흔적도, 사람의 흔적도
모두 타버린 채 검게 그을린 집 터만 남아있었다.

가족을 찾기 위해 강가에서 야영을 하며
몇날 며칠을 헤매기도 하고,
이 모든 불행의 씨앗이 무엇일까,
살면서 내가 어떤 잘못을 했던 것인지
그의 삶에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곱씹어 보기도 했다.
애초에 답은 영원히 찾을 수 없을
질문이었지만 그는 계속 물어야만 했다.
찾을 수 없는 질문과 답을 가슴에 새기고
그의 집 터로 돌아간 그레이니어는
작은 오두막을 짓고 또 다시 삶을 살아간다.

-
한 순간에 모두 잃어버린 거대한 상실을 딛고
담담하게 다시 삶을 시작하는 남자.
어떤 기적적인 극복의 서사나,
삶의 위안 같은 것도 없이,
그저 낡고 허름한 오두막과 개 한마리,
말과 수레가 전부인 삶.
그에게 닥쳐오는 삶을 살아가는것이 전부이지만,
그 안에 가득 찬 고독 조차도 숭고하다.
어떤 허세나 꾸밈도 없이
여린 촛불 하나로 간신히
그의 삶 전체를 비추는 것 처럼
소박하지만 그 작고 사소한 빛이 모여
그레이니어의 삶을 이룬다.

이 짧은 소설 안에 담긴
한 남자의 삶은 결코 짧지 않다.
오히려 이 적은 분량에 어떻게
이런 깊은 슬픔이 담겼는지,
담담하게 말하고 담담하게 살아내는
이야기가 품은 비극에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이 삶이 운명이라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단지 살아야 해서 살았을 뿐.
꿈 속에 나타나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보며 같이 눈물 흘리며,
아직 새싹도 되지 못한
여리고 여린 딸을 그리며,
대신 오래도록 기억하겠다 마음먹으며
그렇게 로버트 그래이니어의 삶이 저물어갔다.

+
넷플릭스에 영화가 있더라구요!
저도 책을 먼저 읽고싶어서 영화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몇 컷의 이미지만으로도 글의 쓸쓸함이 그대로 뭍어나는 것 같았어요.

마치 클레어 키건의 남자 버전을 읽은 것 같기도 하고 🥹
길지 않은 분량인데 한 남자의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문장의 깊이는 한없이 깊게 느껴졌습니다.

-
꿈에 기차를 자주 보았다. 특히 자주 나오는 기차가 있었는데, 그는 석탄 연기 냄새를 맡으며 그 기차에 타고 있었다. 세상이 휙휙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그 세상 속에 서 있고, 기차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런 장면이 어렴풋이 친숙한 것을 보고 그는 어린 시절의 기억임을 알아차렸다. 때로 자다가 깨어보면 스포캔 국제철도의 기차가 희미하게 계곡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꿈에서 들은 소리가 그것이었다. 86

글래디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널리 퍼뜨렸다. 그녀는 딸을 찾을 수 없어 슬퍼하고 있었다. 아이가 없으면 예수님의 품에서 잠들 수도 없고, 아브라함의 가슴에서 쉴 수도 없었다. 그녀의 딸은 영혼들의 세계로 넘어오지 못하고 여기 산 사람들의 세상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불타는 숲에 혼자 남은 아이였다. 88

그는 대체로 교회에 간 것을 후회하는 편이었다. 교회에서 그는 자주 울었다. 모이산 속에서 살 때는 자잘하게 할 일이 워낙 많아서 다른 데 신경을 쓸 틈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이 슬프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러나 찬송가가 시작되면 기억이 났다. 120

#서평단 #독서기록 #소설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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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감정을 다스리는 삶을 위한 안내서 - 매일을 버텨내고 있는 당신에게 필요한
겐카 도루 지음, 박은주 옮김 / 필름(Feelm)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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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감정에 휘둘리고나면
온몸이 나른해지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질 때가 있다.
이 감정이란 것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것일까.
나는 늘 이 감정에서 벗어나는 일이 풀지 못한 숙제
또는 아무리 연습해도 늘지 않는 실력처럼 느껴졌다.

내가 느끼는 감정과 ‘나’라는 사람의 본질을
서로 떼어놓기 위해 자주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그것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책을 읽는 행위를 통해 알게 되었다.

책을 읽는 행위가 삶의 전반에 끼친
긍정적인 영향데 대해서는입이 아프도록 말하고 있지만, 😉
나의 감정을 다루는 측면에서도 적잖이 영향을 주었다.

흔히 책으로 도망친다는 표현을 한다.
나의 일상을 압도하는 어떤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찾고 페이지 안으로 흠뻑 빠져들고 나면
어느 새 거칠게 불어대던 감정의 바람이
잠잠해지곤 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효과적으로 감정을 다루는 방법임을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알게 되었다.

감정에는 신체적 측면과 사고적 측면이 있는데,
신체적 측면에서 보면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일어나는 신체의 변화로 인해
당시 느끼는 감정이 더 짙어지곤 하는데,
예를 들어 분노를 느낄 때 미간에 주름이 잡히거나
주먹을 꽉 쥐는 등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 분노가 가중되는데,
그 순간 신체적 긴장을 물리적으로 해소하면
분노가 진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을 풀고, 깊게 숨을 쉬고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는 연습을 하는 이유가
이런 신체적 반응으로부터 감정을 떨어트리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또한 나의 사고를 바꿔도 감정이 변화할 수 있다.
분노를 느끼거나 좌절감을 느끼는 어떤 일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태에서는
당연히 다른 일이나 다른 감정이 들어올 틈이 없다.
그렇다면 사고의 방향을 바꿔
초점을 다른 일로 옮긴다면?
즐거웠던 일을 생각하거나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거나, 운동을 하는 것처럼
감정의 사고적 측면이 인식하는 가치의 대상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
감정의 본질에 대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깊이있는 이론과 예시가 언급되어 있어
사실 좀 어렵기도 했지만
저자가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토대로
만들어진 책이라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나 지금 교양 철학 수업 하나 들은거네..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는 연습,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자신만의 유효한 방법을 찾아
나만의 안식처를 찾아내는 일은
곧 삶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는 것이다.
감정이 나를 집어삼키기 전에,
내 삶의 가치가 향하는 곳을 바라보며
어렵지만, 위태롭지만, 불안하지만
한 걸음을 옮기는 것.

삶의 가치는 그 한 걸음에 있을 것이다.

-
#책리뷰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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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슨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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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사람의 삶을 통째로 포개어 펼쳐놓은 장대한 서사가 있다. 사건을 앞세우는 대신, 한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펼쳐지는 이야기들. 우리가 살아오며 경험한 균열과 후회, 기대와 고요가 문장의 곳곳에 스며있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 롤랜드의 삶을 천천히 따라가 본다. 인간의 성장이라는 것이 단편적인 순간들의 모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달으며, 때로는 잘못된 선택이, 때로는 멈춰진 시간이, 또는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이 그의 삶을 뒤틀기도 하고 반짝이게도 한다. 그는 성장의 과정을 영웅적인 변화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의 비틀린 궤적 자체가 삶의 본모습임을 고요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천천히 나이들어 간다.
이 책에서 나이듦은 실패의 총합도, 성취의 결산도 아니다. 오래된 상처가 희미해지기도, 더 깊어지기도 하는 시간의 서로 다른 층위다. 롤랜드가 나이를 먹으며 바라보는 세상은 과거보다 특별해지지 않지만, 그 나이만이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서서히 변한다. 이 느린 변화속에서 우리는 깨닫는다. 나이든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천천히 용서하는 일이라는 듯이.

그가 삶 속에서 고요히 물들어가는 동안 그를 붙잡았던 한 가지는 바로 ‘쓰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거창한 창작의 행위라기 보다는 단지 기억하기 위해 애쓰는 방식이며, 잊어버린 마음의 결을 더듬는 과정이다. 롤랜드가 음악과 글을 붙잡는 이유는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아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이었다. 그래서 <레슨>의 문장들은 삶을 기록하려는 작가의 숨결처럼 느껴진다. 결국, 글쓰기는 삶을 보존하는 방식이자, 스스로에게 건네는 마지막 레슨이다.

책을 덮고 나면, 특별한 사건이 떠오르기보다 묵직한 여운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내 삶에서도 아직 해석하지 못한 기억들이 조용히 불려 나오는 기분.
성장해서 어른이 된고 어느 새 나이 들어 노년을 맞는다는 것은 한 순간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다시 배우고 또 다시 잊혀지는 과정임을 깨닫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겪는 모든 것이
결국 우리만의 레슨이라고.
그리고 그 레슨을 기록하려는 작은 시도 하나가, 어쩌면 삶을 이해하는 가장 솔직한 방식일지도 모른다고.

월요일이 다가오는 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지 난주에 생긴 멍은 희미해져가는데, 피아노 선생님의 향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향기를 기억한다는 것, 그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 향을 맡는 것과는 달랐다. 그보다는 어떤 무채색의 그림, 혹은 어느 장소, 혹은 장소에 대한 느낌, 혹은 그 사이의 무언가 였다. 두려움 너머에는 다른 요소, 흥분이 있었고, 그는 그것 역시 밀어내야 했다. 19

칠 개월 된 아기의 마음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늘진 공허, 잿빛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인상들 -청각, 시각, 촉각에 따른 -이 원색의 호와 원뿔 모양의 불꽃처럼 터지고, 순식간에 잊히고, 즉시 대체되고 다시 잊힌다. 혹은 깊은 웅 덩이. 그곳으로 모든 것이 빠져 사라지지만 그럼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불가역적으로 존재해서, 깊은 물속의 어두운 형체들이 심지어 팔십 년 후 임종 자리에서, 마지막 고해성사에서, 잃어 버린 사랑을 향한 마지막 절규에서 중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32

세월이 육중한 뚜껑처럼 과거의 죽음을 슬그머니 덮었다. 우리는 삶에서 자신에게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잊는다. 그러니 일기를 써야 한다. 이제부터 일기를 쓰자. 과거는 빈칸으로 남고, 현재는, 이 감촉과 향기, 이 순간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곧 소멸할 것이다 458

하지만 사랑이 과거로 사라질 때 모두가 잊어버리는 본질이 있었다. 함께했던 순간, 시간, 나날 속에서 느끼고 맛보았던 것. 당연시되었던 모든 것이 버려지고, 그것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덮이고, 그후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불완전한 기억에 의해 다시 덮이기 전의 그 모든 것. 천국이든 지옥이든, 많은 기억이 남진 않는다. 오래전에 끝난 연애와 결혼은 과거에서 온 엽서와도 같다. 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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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봄이 다시 오려나 보다
나태주 지음, 박현정(포노멀)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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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소중한 건 오늘 여기 이 순간 나에게 집중하면 살기. 그것은 아주 오래된 충고이기도 하고 날마다 새로운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 p78, 오래된 충고

#아무래도봄이다시오려나보다
#나태주
#알에이치코리아
@rhkorea_book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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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읽는다는건 늘 도전이고 마음 한 켠의 위시리스트같다. 내가 어떤 문학적 경지(?)에 오른다면 이 난해함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헛된 희망들. 제목만 보고 끌린 시집을 몇 장 읽지 못한 채 덮어두는건 너무 흔한 일이고, 아예 시집을 잘 사지도 읽지도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시의 자유로움을 좋아한다.
손에 쥘듯 하면, 새처럼 날아오르고, 멀리 떠나갔구나 그리워하면,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온기를 전해주는 그 ‘의외의’ 마음이 좋다.

‘풀꽃시인‘ 나태주의 신작 시집
<아무래도 다시 봄이 오려나 보다>
약 4년의 시간에 걸쳐 그가 남긴
소박하고 아름다운 단상들

“ 나는 오늘도 남은 나의 길을 생각한다. 10년이 아니라도 좋다. 설사 5년이 허락되지 않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내가 열심히 나의 길을 가느냐, 가지 않느냐에 있다.
다시 한 발 한 발 발걸음을 앞으로 내밀 때, 나의 아침은 여전히 눈부시고 나의 저녁은 여전히 눈물겹도록 아름답지 않은가! ” 6

지치고 외로운 길에 조용한 동반자가 되어줄 그의 소망들을 보았다. 소중한 이들을 향한 애정과 그리움,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한 다짐들, 삶의 지혜들. 이 차가운 계절에 찾아온 봄의 노래는 어쩌면 우리 함께 견뎌보자는 그의 위로와 응원일 것이다. 나도 그처럼 다가올 봄을 마음 다해 기다려본다.

-

잠깐이어요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슬픔도
가을이나 봄날의 저녁 무렵
창문에 어리는 햇빛
결코 오래 가지 않아요
까무룩 사라지고 말지요

잠깐이어서 아름답고 서럽고
사라지기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게
우리들 사랑이고 인생이지요.

p193,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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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시집추천 #나태주시인 #시추천 #한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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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X 이옥토 리커버 특별판)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개정판)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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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예감, #그많던싱아는누가다먹었을까

이제 막 대학생이 된 완서는 성인이 된 후 처음 맞는 찬란한 봄을 느낄 겨를도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 해 6월, 싱그러운 꽃이 만발하고 수려하게 드리워진 나뭇잎 사이로 드는 햇살을 오롯이 느껴본 날이 몇 날이나 되었을까요. 피난통에 설상가상으로 다리까지 다친 오빠를 수레에 싣고 유난히 높은 무악재 고개를 넘어가며 이 모질고 고된 운명이 이끄는 자리가 과연 어디일지 완서의 가족 그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다시 돌아온 현저동 자락에서, 아무도 없이 텅 비어버린 서울 시내를 바라보며 완서는 한 가지 깊은 다짐을 합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 것, 지금 이 시간, 이 곳에 오롯이 나 홀로 서 있다는 것. 내가 바로 이 시대의 목격자라는 것은 이 모든 것을 쓰지 않고는 차마 견뎌낼 수 없었던 완서의 뜨거운 욕망이었습니다.

박적골에서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멀리 내다보았던 풍경과는 참담하리만치 달랐던 그 날의 모습을. 글을 쓰리라는 꿈을 품은 완서에게 그 모습은 단지 어두운 현실만이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희망의 깃발이 펄럭이는, 그 어떤 시간보다 찬란할 미래를 향한 작은 시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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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적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부터 서울 현저동으로 이어지는 완서의 유년기에 이르는 그녀의 기억을 고스란히 읽고 있으면, 긴박한 사건이나 어떤 눈에 띄는 소설적 장치가 없이도 한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 기나긴 시간을 푹 빠져들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절에 대한 묘사는 마치 그 때의 냄새까지 내게 전해주는 듯 생생했고, 그녀의 기억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진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쓸쓸하면서도 따뜻하게 번져오는듯 했습니다.

살아간다는게 무엇일까.
삶을 살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누린다는 것이,
때로는 아무렇지 않게 펑펑 써버려도 다시금 솟아나는 것이 시간인지라 아무런 의미없이 사라져 버려도 그만이다 싶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어요.
매일 똑같이 돌아오는 시간이 종국에는 내 기억 언저리에 남을 작고 연약한, 소중한 순간들이 전부일 것임을. 그 순간을 우리는 고이 간직하게 될 것이고, 흩어져 사라질 시간임을 알기에 우리는 이내 그리워하고 말것임을요.

찬란한 기억을 벗삼아 우리는 또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서로를 붙들고 이끌고 끈질기게 나아갑니다.
누군가에게서 전해진 기억을 안고 흐르는 시간을 벗삼아,
오늘을 살고, 내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
이 큰 도시에 우리만 남아 있다.
이 거대한 공허를 보는 것도 나 혼자뿐이고 앞으로 닥칠 미지의 사태를 보는 것도 우리뿐이라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차라리 우리도 감쪽같이 소멸할 방법이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획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
그 예감이 공포를 몰아냈다. 조금밖에 없는 식량도 걱정이 안 됐다. 다닥다닥 붙은 빈집들이 식량으로 보였다. 집집마다 설마 밀가루 몇 줌, 보리쌀 한두 됫박쯤 없을라구. 나는 벌써 빈집을 털 계획까지 세워 놓고 있었기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도 겁나지 않았다.

p309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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