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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부 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에요
에밀리 오스틴 지음, 나연수 옮김 / 클레이하우스 / 2025년 5월
평점 :
“ 모든 순간은 기억되든 아니든 영원히 존재한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시간 속에서 한순간을 영원히 차지하고 있다. 나는 생의 매 순간, 일어난 일들을 잊고 나이 들어가며 성냥처럼 타버릴 것이다. 결국 모든 게 재가 될 때까지. ” | 346
/ Everyone in this room will someday be d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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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20대 여성 길다.
눈에 띄지 않는 외모에 레즈비언, 무신론자.
서점 직원으로 일은 했지만 책도 좋아하지 않는데
누군가에게 책을 권하는게 사기꾼 같아 그만 뒀고
통장 잔고는 0을 향해 수렴 중이다.
우연히 찾은 성당에서 취업의 기회를 얻었지만
자신은 무신론자에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때문에
늘 언제 들킬까 노심초사.
길다의 내면은 늘 불안하고 걱정이 가득하고,
혹여 폐를 끼칠까 매사에 조심스럽다.
그래서 인지 소설의 전반에 깔린 그 불안을
함께 끌고 가는게 읽는 내내 힘들었다(속터짐주의)
아휴, 그만 좀 해, 이게 왜 니 탓이야.
교통 사고가 났는데도 뭐가 괜찮다는건지
부러진 팔에 에어백이 다 터진 차를 스스로 운전해서
꾸역꾸역 병원으로 가고 (가해 차량이 도와주겠다는데도!)
어지러워 죽겠는데도 자리를 양보하고 (앉는 사람 불편하게)
주문한 적 없는 스무디가 나왔는데도
아무말 못하고 기어코 그걸 먹고 알러지가 나고.
어디부터 잘못된 걸까?
그 뿌리 깊은 불안과 우울은 어린 시절 기르던 토끼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로 촉발되어 죽음에 대한 강박이 그녀를 늘 옭아매고 있다.
우연히 일하게 된 성당에서 어떤 살인 사건에 연루(?) 되는데, 이것도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수도 있지만 그녀의 의식이 자꾸만 살인자를 찾아내라고 한다. 근데 추리도 아무나 하나, 길다의 추측은 다 틀리고 오히려 일을 더 키우거나 오해만 살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실패하면서도 또 다시 길다는 세상의 가엾고 연약한 존재들을 향해 마음이 기울고 만다. 지켜줘야 할 중요한 존재들이 가득하여 결코 모른 척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나도, 내가 사랑하는 이들도 언젠가 떠나리라는 것. 소멸의 운명을 안고 계속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야 할까. ”
| 384, 옮긴이의 말
우울을 애착인형처럼 매달고 다니는 길다가
어떻게 우울의 감옥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 수 있을까?
우리 모두 어쩌면 죽음을 향해 매일매일 걸어가는 것 뿐,
어떤 죽음도 피할 수 없다.
언제 어떻게 다가올 지 모르지만 불확실성 속에서도
우리가 매일을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서로의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다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상하게 그녀에게 마음이 기우는 것을 느꼈다.
길다가 거울을 보며 울먹일 때,
거울 속의 자신을 한심하다고 말할 때,
그저 모든 일이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길다가 결국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와
밝은 햇살속으로 걸어들어갈 수 있기를,
내내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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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게 정말 기묘하다. 우주에서 추락하고 있는데 엘리노어가 장미 한 송이를 던져준 기분이다. 너무나 달콤하고, 무의미한 몸짓. 혼자 우주에서 추락하는 게, 내 옆에서 함께 추락하는 누군가를 보는 것보다 덜 괴로울 거다. 누군가 내게 잘해줄 때마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이상하고 슬픈 일인지 또렷하게 실감하게 된다. | 216
내 존재의 무의미함과 무관한 다른 생각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기를, 아니면 가능한 우리 가족에게 방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죽을 수 있기를. | 281
(도서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