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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시의 초대 - 하루 한 편 고전 시가 ㅣ 날마다 인문학 5
안희진 지음 / 포르체 / 2025년 2월
평점 :
사랑이 어떻더니, 이러하기도 저러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그 깊이가 가없이 깊더이다, p108
오래된시의초대
안희진
포르체출판사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임 오신 날 밤이거든 굽이굽이 펴리라
/ 황진이, <동짓달 기나긴 밤을>
“ 이렇게나 어둡고 기난긴 밤에, 임 없이 이 밤을 홀로 보내야 하는 여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지루하고도 막막했을 것이다. 등잔불을 켜고 책도 읽어 보고, 미뤄 뒀던 바느질도 한 땀 한 땀 해 보지만 시간은 도무지 흐르지 않는다. …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여인은 드디어 독특한 공상에 이른다. 임 없이 지루한 이 밤의 시간을 뚝 잘라 임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에 갖다 붙이자고.
혼자 외로운 시간은 짧게, 임과 더불어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길게 만들기. ” | 25-26
황진이의 시가 이렇게나 애잔하고 달큰한 사랑이 뭍어났던가. ‘고전 문학’이라 하면 고등학교 때 졸린 눈을 비벼가며 교과서를 뒤적이던 장면이 눈에 선하다. 익숙하지 않은 말들에 무슨 내용인지는 커녕 한 단어, 음절을 읽어내는 것도 일 이었다. 고전은 어렵다는 벽을 스스로 세워두고 그저 시험을 위한 공부만 했던 고전이 매력적일리 없었고, 늘 발목을 잡는 과목이기도 했다.
사회에 나와서는 더더욱 고전을 접할 기회가 없으므로 그렇게 우리는 고전과 어색한 안녕을 하고 말았다. 저자 안희진 선생님은 우리 모두의 이 ‘어색한 안녕’이 영 아쉬우셨던 것 같다. 그도 그럴것이, 그 시절의 고전 시가에도 사랑에 빠지고 사랑에 다치고, 이별에 울고 그만큼 성숙해져가는 보통 사람의 일이 고스란히 담겨있지만 우리는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고, 지금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이유로 멀찌감치 미뤄놓기만 한다.
하지만 오히려 지금, 나와 고전 사이엔 어떤 장벽도 없다.
누가 외우라고 시키지도 않고 시험을 보지도 않는다.
고전을 고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이다.
/ 40일 동안 이어지는
/ 하루 한 편 고전 시 산책
시 한 편과 그 해설이 단지 원문의 해석 뿐만 아니라,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상황, 비슷한 류의 시조는
또 어떤 것이 있는지까지 폭 넓은 이야기를 담아,
시 자체에 푹 빠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느꼈다.
부담 없이 하루에 한 편씩만 읽어도 좋고
그때마다 손이 가는 페이지에 담긴 글을 읽어봐도 좋다.
어릴 때 배웠던 정철의 <속미인곡>, 허난설헌의 <규원가>, <처용가>, <가시리>.. 이런 글들이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건, 나도 살아오면서 모든 사랑의 과정을 겪어왔고 인생의 굴곡을 지나왔기에 이 절절한 외침이 그저 시 한 편이기 보다는 누군가의 그 뜨겁기도 하고, 차디차게 식어버리기도 했던 마음의 온도까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 오래된 시의 초대 ”
이젠 너무 친숙한 누군가의 이별, 시기와 질투, 애절한 사랑이 가득 담긴 옛 사람들의 메아리같은 울림이 때로는 작은 위로가 되어줄 것이고, 따뜻한 격려가, 애잔한 사랑 노래가 되어 한동안 귓가에 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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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찬찬 얽동혀 뒤 걸머지고
태산준령으로 허위허위 넘어갈 제
그 모르는 벗님네는 그만하야 버리고 가라 하건마는
가다가 자질려 죽더라도 나는 아니 버리리라
/ 작자 미상, <사랑을 찬찬 얽동혀>,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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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더니 둥글더냐 모났더냐
길더냐 짧더냐 발일넌냐 자힐너냐
각별히 긴 줄은 모르되 끝 간 데를 몰라라
/ 이명한, <사랑이 어떻더니>,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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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월로*께 호소를 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 밖에서 내가 죽고 그대는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 김정희, <도망>, p179
(*월로-월하노인. 부부의 연을 맺어 준다는 전설 속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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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거듭 손잡고
회포를 말하며 다시금 술을 따르라 하네.
일생 동안 자주 모였다가 흩어지니
만사를 천지에다 맡겨 버려야지.
/ 정철, <증별>, p200
(도서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