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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22년 10월
평점 :
누군가에게는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쉽게 잊히는 일이 되기도 하니까요. 잊을 수 없는 사람은 피가 마르는데 잊은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p7
고양이들은 소리 나지 않게, 보이지도 않게 골목 이곳저곳을 바쁘게 오간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움직임. 그것이 학습된 것이라면 고양이들은 틀림없이 잊을 수 없는 끔찍하고 오싹한 경험들을 지나왔을 것이다.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선과 악. 그런 인간적인 가치와는 부관하게 습득해야 하는 생존의 법칙들.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다만 받아들여야 하는 규칙들.p56-57
그녀는 선을 긋고 편을 가르고 어느 한쪽에 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분명하게 입장을 정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어떤 면에선 쉽고 수월하다. 그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 주는 신속한 방식이고 그러므로 매혹적이다. 자신과 무관하기만 하다면 어떤 사안에 대해서든 빠르게 판단을 내리고 그보다 더 빠르게 그 판단을 철회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망각 속으로 던져 버리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다.p102
이 길이 모두의 것이라면 거기엔 고양이와 비둘기 같은, 인간 아닌 다른 생명이 가진 권리가 있을 것이다. 생명을 지ㅣ고 태어난 것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 내야 할 숙명이 있다.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p10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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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상담사였던 임해수는 어느 순간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어 모두의 지탄을 받고, 모든 것을 잃은 채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간다.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담아, 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사건과 관련 있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편지글을 쓰지만, 하상 끝맺음을 하지 못하고, 보내지 못한다.
사람들과 마주칠까 두려워 한산한 시간을 골라 골목을 다니다 우연찮게 세이라는 아이와 길고양이 순무와 만나게 되며 조금씩 갇혀 있던 세계에서 밖으로 한걸음씩 내딛기 시작한다.
아픈 고양이 순무와 따돌림을 당하던 세이는 누구도 보살펴 주지 않고, 마음 쓰는 이 하나 없지만,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려 노력하고, 그 모습들을 통해 임해수는 해보지도 않은 고양이 구조를 시도하고, 따돌림을 당하던 세이를 조심스럽게 관찰하며 가만가만 위로하려 한다.
그렇게 조금씩 밖으로, 밖으로 나오며 그녀 스스로도 치유받기 시작한다.
주인공 임해수가 잔인한 가해자인지, 혹은 가혹한 누명을 쓴 피해자인지에 대한 결론은 책 속에 나오지 않는다. 사회적 판결은 유보한채, 그저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숨는 주인공의 이야기만이 담겨 있을 뿐이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들이 모두 그러하듯, 언제나 소외되고 외면 당하는 이들의 이야기가 묵직하게 담겨 있다. 고통과 상처에 얼룩져 힘들어하는 주인공의 삶에 새롭게 등장한 고양이 순무와 세이와 마음을 나누는 모습들이 뭉근한 감동을 자아낸다 .괴로움을 이겨내고,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안타깝지만 따뜻함이 담겨 있는 김혜진 작가의 시선과 그녀가 하는 이야기들이 참 좋다.
역시 이번에도 엄지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