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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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누군가를 끔찍하게 미워해본 일이 있었고 눈물 나게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한 적도 많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것들은 다 어떻게 되었더라. 내 속에서 싫다, 싫다 하며 몇 번이고 되뇌어지다가 결국, 사라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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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던 일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쁜 감정은 틀림없이 사라졌고 그땐 그런 더럽고 괴로운 일이 있었어, 하고 떠올릴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건 분명히 내 몸 어딘가에 있는 무슨 기관이 작동한 결과임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선명하던 것들이 이렇게 감쪽같이 무뎌질 수가 있을까. 이런 것들을 오래 품고 있으면 올바르게 살아갈 수가 없으니까, 나를 다시 안온한 상태로 되돌리는 역할을 맡은 어떤 기관이 열심히 일한 것이 분명했다.-브로콜리 펀치 中-

그냥 그랬어요.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고 잊으면 안 된다고도 생각했는데 잊었어요.
잊었군요.
한 번에 다 잊은 건 아니고 조금씩, 그러니까 예를 들면 용준 씨가 찻잔이었다고 치면요. 깨지고 나서 반짝이는 부스러기까지 모두 손끝으로 찍어 모아서 갖고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근데 그걸 점점 잃어버리게 되더라고요. 나중에는 큰 조각들밖에 안 남았어요. 그 조각들도 원래는 꺼낼 때마다 손이 베일 만큼 날카로웠는데, 갈수록 각을 잃고 뭉툭해져가고.-손톱 그림자 中-

듣고 싶지 않았다. 미안했다는 말, 용서해달라는 말, 나도 힘들었다는 말, 뭐 그런 종류의 무의미하고 지긋지긋한 얘기를. 아무것도 돌려놓을 수 없는 주제에 꼭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말, 곱씹을수록 공허하고 텁텁하기만 한 그런 말을 만약 내게 한다면, 하고야 만다면 나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평평한 세계 中-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계속하고 싶은 걸까, 그만두고 싶은 걸까. 계속하면 어떻게 되고 그만두면 어떻게 되나. 안으로 깊어지지도, 바깥으로 넓어지지도 못한 채 고이고 고여 단단해지는 그런 생각들을 알처럼 품다가 잠들곤 했다. 마음은 마음대로 괴로웠으나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구아나와 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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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열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유골을 화분에 심으니 아버지가 나무로 되살아난 이야기
-브로콜리 펀치: 복싱선수의 오른 손이 브로콜리가 된 이야기
-둥둥: 아이돌을 향한 조건없는 덕질과 사랑이 외계인의 연구대상이 된 이야기
-손톱그림자: 5년전 죽은 남자친구가 손톱으로 빙의해 신혼집에 찾아온 이야기
-왜가리클럽: 왜가리를 지켜보다 친해져 마음을 나누고 연대하는 이야기
-치즈달과 비스코티: 정신과 치료실에서 만난 돌과 대화하는 사람과 보름달 뜨는 날에는 달로 날아갈 수 있다고 말하는 남자 이야기
-평평한 세계: 학대받고 외롭게 지내던 아이와 새 어머니의 몸이 투명해진 이야기
-이구아나: 멕시코에 가게 수영를 가르쳐달라는 이구아나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수영강사 이야기.

8개의 단편들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일상에서 불가능한 판타지적 요소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조금의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여 환상인지 현실인지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억눌리고 소외된, 차별받고 사랑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다정함과 따뜻함을 덧입혀 사랑스러운 이야기들로 탄생시켰다.
어둠을 밝게 그려낸 작가의 유쾌한 상상력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독특하고 기발한, 달콤하고 상큼한, 사랑스럽고 귀여운 무해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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