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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부글거리던 연애만 국자로 걷어내도 인생은 참 단출해진다. 거품만 걷어냈을 뿐인데 내용물이 반 이상 사라져버린 냄비를 들여다보면 한심하고 처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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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그래. 아마도 이 말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가 주문처럼 되뇌어 온 말일 것이다. 열심히 하면 잘 되겠지. 언젠가는 잘 되겠지. 다 괜찮아질 거애. 수많은 변형과 파생을 낳으며 사람들을 위로해 온 말. 때로는 인사치레고 한숨이고 주문이나 다름 없지만 우리는 알 수 없는 일 앞에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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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어떤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중요하지 않거나 심지어 쓸모없는 것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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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간절히 바라는 것은 가능성을 살짝살짝 비켜가면서 몸과 마음을 달아오르게 만들까? 그 좌절된 열망과 탄식의 에너지로 다시 돌진하라고? 아마도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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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봤자 하루치 감기약밖에 안된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하기는 약 한번 먹고 뚝 떨어질 거 같으면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 조금만 추워도, 몸이 피곤해도, 계절이 바뀌어도 어느새 또 걸려버리니 세상에는 그렇게 많은 감기약이 있고 사람들은 평생 감기에 걸렸다 나았다를, 반복하며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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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라는 자각이 좀 부족하면 어때. 쉰살쯤 되면 아무리 거부하려 해도 어차피 어른이 될 텐데. 그러니 정신 조금만 차리고 약간만 변신하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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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간사할 거 하나도 없다. 인간이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존재 아닌가. 배고프면 배고파죽겠고 배부르면 배불러죽겠고. 그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참고 견뎌야 할 때와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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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때는 지금 공부 열심히 해야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취직하고 난 뒤에는 벌 때 부지런히 모아라, 모을 때 모아야지 안 그러면 못 모은다, 는 말을 자주 들었다. 들을 때는 잔소리 같았는데 지나고 나니까 그 말이 뼈에 사무친다. 언제나 처해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결단도 돈이 있어야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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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작가는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작가다.
단편집 파인다이닝에서 에트로를 읽고 오~ 좋다~ 했었고, 그 뒤 우연찮게 읽은 홀딩턴에 푹 빠져 그녀의 팬이 되었다.
이책은 제1회 창비장편소설 수상작으로 10년도 더 전인 2008년 작품이다. 오랜만에 맞춤법이나 띄워쓰기가 지금과는 다른 (혹은 틀린) 누런종이 책을 읽었다.
사랑한다면 열심히 쓰자를 실천하며 소설 속 인물들의 새로운 사연들에 마음이 풍성해졌다고 하던 저자의 말처럼 내 마음 또한 풍성해짐을 느낀다.
서른세살의 성장통을 그대로 담아낸 이 책은, 그 당시에는 조금 이색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이야 성인이 된 후의 성장통이나 삼십대의 방황, 사랑들에 대해 쓴 책들이 워낙 많지만, 그 당시엔 좀 드물지 않았을까 싶다.
나 또한 30대는 뭔가 다를 줄 알았었다. 좀 더 성숙하고, 여유 있어지고, 너그럽게 살것만 같았는데, 20대보다 뭔가 더 조급하고,치열하게 사는것만 같다.
연령대와 상관없이 모두가 비슷하게 살아가는 모습들, 복잡한 심경과 녹록잖은 현실, 인간관계 등이 꾸밈없이 담겨있다. 모두가 경험하는 사랑과 이별, 가정사, 퇴직과 이직, 우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설같지 않은 현실이 담겨 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 성장해가는 평범한 이야기.
서유미 작가의 최근작부터 읽어 그런지, 2008년의 그녀의 작품에서는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진다.
지금은 좀더 차분하고 농염해졌달까.
특별하지 않은 평범함을 섬세하고 담담한 문체로 담아 내고, 절제된 감정 표현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늘 압권이다.
여담이지만,
소설 속 대사 "저녁때 베란다 창밖으로 노을이 지는 걸 보면 가슴이 막 미어져."라는 책속 대사에서 82년생 김지영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