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번의 일
김혜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10월
평점 :
아침에 일어나면 하루가 까마득하게 길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시 잠이 들 무렵이면 하루가 또 이처럼 순식간에 지나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16
ㅡㅡㅡ
왜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닥치고 나서야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알게 되는 걸까. 그러나 그런 것들을 미리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20
ㅡㅡㅡ
서운함과 불편함은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졌다. 그는 믿을 만한 동료들과 일했고 동료들은 그를 믿었다. 믿음은 하루가 가고, 계절이 쌓이고, 서로의 표정과 목소리에 익숙해지고, 버릇과 습관 같은 것들에 길들여지고. 그런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다음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는 그토록 어렵게 생겨난 것들이 이처럼 쉽게 망가질 수 있다는게 놀라웠다. 34-35
ㅡㅡㅡ
어느 때고 조롱과 야유는 쉬운 것이었다. 무엇인가 믿고 기다리고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과 수고가 따르기 마련이었다. 86
ㅡㅡㅡ
만족스러운 삶. 행복한 일상. 완벽한 하루. 그런 것들을 욕심내어본 적은 없었다. 만족과 행복, 완벽함과 충만함 같은 것들은 언제나 눈을 깜빡이는 것처럼 짧은 순간 속에만 머무는 것이었고, 지나고 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어떤 것에 불과했다. 삶의 대부분은 만족과 행복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흘러가고 그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쌓여 비로소 삶이라고 할 만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그는 믿었다. 113-114
ㅡㅡㅡ
그러니까 가까운 사람들 틈에서 너무나 쉽게 갈등을 만들고, 무엇이 미움과 불만을 부풀리는지 아는 영악하고 지능적인 회사의 실체를 비로소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159
ㅡㅡㅡ
작은 불안의 조짐이 감지되면 그것은 곧장 공포감으로 몸집을 키웠고 거기에 휩쓸려버리는 거였다. 그가 맞서고 있는 것도 실은 실체도 없이 수시로 자신을 휘젓고 다니는 그런 감정들일지도 몰랐다. 168-169
.
.
26년간 통신회사의 수리와 설치 업무를 하던 주인공 "그"는 퇴직을 권유당하지만, 그는 제안을 거저라고, 타지역 센터로 좌천되어 인터넷 상품 영업을 한다. 회사는 그가 스스로 회사를 떠나주길 바라지만, 그는 좌천이 되고, 무시 당하고,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며 갖은 모욕을 겪지만 직장을 잃을 수 없기에, 새로운 일을 생각해본적이 없기에, 먹고 살아야하기에, 가족을 부양해야하기에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낸다.
그런 불합리함에 맞설 용기도 배짱도 없었던 그는, 온갖 수모를 겪다 노조에 가입하게 되고 몇달간의 투쟁 끝에 그는 본사 소속이 아닌 하청업체 소속으로 시골지역인 78구역 1조로 복직하게 되고, 이름이 아닌 9번이라는 숫자를 부여받고 일을 시작한다. 통신탑을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과의 대치가 이어지고,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삶과 노동에 대해 생각한다.
가장으로써의 무거운 어깨, 아내에게도,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의 무게와 그가 겪는 온갖 수모들.
속내 한번 비치지 않고 묵묵히 견뎌내는 그 모습들이 어쩌면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지금도 어디선가 회사의 횡포를 견뎌내며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많은 노동자들의 모습들이 겹쳐 보인다.
좀 더 여유로운 삶과 나와 가족의 행복을 위해 노동을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다치는 마음들과 망가지는 삶, 회복이 어려워지는 관계들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사람이 아닌 이익창출에만 혈안이 되어 사람을 그저 도구로만 사용하다 버리는 그 잔인함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무서웠다.
개인적으로 김혜진 작가의 중앙역, 딸에 대하여, 그리고 단편들에서 느껴지는 진솔함이 참 좋다.
사회의 이면과 소수자,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에 대해 글을 쓰는 김혜진작가만의 시선들이 이번에도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여담이지만, 누군가의 농성과 파업은 그들이 살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것임을 다시한번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