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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5월
평점 :
인생에서 최악의 사건은 죽음이 아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지쳤고, 피곤했다. 삶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이렇게 떠돌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도 사라졌다. 어둠의 바닥에 잠든 채, 살았으나 존재하지 않았던 내 삶을 끝내도 좋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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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 멈처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나도 잘 안다. 일단 시작하면 돌이키지 못하리라는 것도 안다. 비루하나마 사회적 궤도 안을 맴돌던 내 삶이 완전히 전복되리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머릿속에서 끈질기게 울리는 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동어반복적이고, 자기증폭적인 소리였다.
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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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월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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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작가의 기존 작품과는 많이 다른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소설이다.
사육사 진이의 정신이 어떤 사건으로 인해 보노보 유인원 몸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설정이다.
어찌보면 유치할것도 같은 설정이지만, 지니의 몸속으로 들어간 진이는 동물들에게 가혹하고 잔인한 인간의 현실들을 들여다 보고, 죽음을 마주하면서 심리갈등과 죄책감 등의 여러 감정선들을 보여준다.
구조가 필요한 보노보를 뒤로 하고 도망친 진이는 그 후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한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게 되었고, 고통받는 보노보들의 감정을 환경을 체험하며 알게 되고, 그녀를 성장시킨다.
공감능력이 전혀 없는 사이코패스라든지, 살인이라든지,인간의 악한 마음 그 밑바닥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공감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도울 수 있는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느끼는 공통된 감정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어떤 삶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으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죽음앞에서 지난 삶이 부끄럽지 않기를 잠시 바라기도 했다.
사실 식상하고, 유치할거란 생각도 있었고, 유인원 육체에 빙의한다는 이야기를 어찌 풀어갈까 나름 걱정도 있었는데, 그 점은 우려했던것과는 다르게 또다른 재미와 생각할거리를 던진다.
인간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 당하고 있는 세계의 모든 동물들이 안타깝고 마음 아프기도 했고.
보노보노는 알아도 인간과 가장 유사한 유인원 보노보는 몰랐던 무지한 내게, 어떤 특성을 지니고 사는 어떤 동물인지를 알려준 책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