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로는 혜신이 소속되었던 기획사의 매니저 겸 마켓팅 실장이었다고 했다. 당시 회사에선 신인급을 모아 새로운 컨셉의 걸그룹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그룹의 컨셉과 마켓팅을 이지로가 담당했다. 소속사에 계약된 신인들 중에 이지로의 눈에 든 인물은 모두 네 명이었다. 그중 한명이 혜신이었다. 당시 혜신은 모델로 활동하며 자신의 음악적인 열정을 바탕으로 밴드에 소속되길 바랬다. 이지로는 달랐다. 철저하게 시장중심이었다. 그의 눈에 들어왔던 건 혜신이 가진 그림자가 드리워진 미모였다. 활짝 웃는 모습보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매력을 찾았다. 이지로가 뽑은 넷은 끼가 있어 보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차라리 청순하고 자연스러운 쪽이었다. 아마 이지로는 이미지와 충돌하는 파격적인 노출과 퍼포먼스 같은 걸 생각했던 것 같았다.

 

그는 자주 ‘레이디가가’를 언급하곤 했다고 했다.

 

“레이디가가에게 음악은 무슨 의미 같아? 솔직히 말해, 그녀에게 음악은 퍼포먼스를 위한 배경일 뿐이야. 무엇을 들려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의 문제. 그게 지금의 음악시장이라고.”

 

그녀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그와 함께 일하던 스텝들과 하는 이야기를 혜신은 자주 들었다고 했다. 맨발로 무대 위에 서는 것. 바디슈트를 입는 것. 그런 눈에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졌지만 정작 귀에 들리는 음악에 관해선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혜신은 그녀들을 위한 첫 곡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부터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가 음악에 접근하는 방식은 광고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제품의 강점과 기회요인들, 현재의 트랜드 등을 분석하여 작곡가에 넘기면 작곡가는 그에 맞는 최적의 곡을 뽑아내는 방식이었다. 철저한 계산에 의한 제작이었다. 사실 충격적인 일도 아니었다. 이미 음악시장은 그러한 니즈와 시장분석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일부 인기 작곡가에게 작곡이란 개인적인 감성을 승화하는 작업이라기보다 목적에 부합하는 음원을 개발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았다.

 

혜신이 수에게 털어낸 이지로와의 이야기는 그쯤에서 마무리 되었다. 혜신을 태우러 온 광역버스가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이지로에 대한 혜신의 평가는 객관적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칭찬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악한으로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와 일하는 것을 말리지도 않았다. 다만 과거의 이야기였다. 이지로와의 광고피티 작업은 계속 되었다.

 

“종이 한 장에 아이디어 하나씩을 적어. 그래야 하나의 완결된 아이디어가 되는거야.”

 

큰 피티를 처음 접하고 어떻게 아이디어를 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직원들에게 이지로는 선생님의 역할까지 겸했다. 때론 회사의 직원들과 아이디어 회의를 했고 때론 수와 단 둘이서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 수십 가지, 수백 가지 아이디어가 쏟아졌지만 이지로는 거의 반응이 없었다. 아니 반응하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그냥 듣고 흘려버리기를 반복했다.

 

“참 이상하지. 광고란 딜레마야. 광고를 하기 위해선 수많은 다른 광고들을 보게 되지.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광고의 참신함이 없어져. 어디서 본 거 같거든. 그렇다고 전혀 광고를 모른 채 아이디어를 낼 수도 없고 말이야.”

 

수가 보기에도 그랬다. 자신도 모르게 기존 광고의 흉내를 내고 있었다. 아이디어에 힘을 주면 줄수록 어디선가 본 듯한 아이디어였다.

 

“정말 새로운 걸 찾는다는 게 어렵군요.”

직원 중 한 명이 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잖아?”

 

이지로가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아들였다 뿜었다. 느슨하게 떠다니던 연기가 환풍기 입구에 다다르자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머리가 멍해졌는지 모두들 사장이 뿜어대는 담배연기의 흐름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뭐,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안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일하려면. 오늘은 이만하자.“

이런 패턴이 일주일째 반복되고 있었다. 그날도 시간이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2

 

수는 이지로로부터 당분간 회의는 없을 것 같다는 문자를 받았다. 한 달 남은 피티에서 일주일이 지났을 뿐이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당분간은 내면의 누군가를 불러내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지도 몰랐다. 이제 낮이면 지하실에서 기타를 치고 밤이면 광고 일을 하던 패턴이 예전처럼 하루 종일 지하실에서 보내게 되는 걸로 바뀌었다.

 

수가 일을 잡는 동안 몽도 일을 시작했다. 녹음실에서 보조로 일한다고 했다. 음악 쪽은 아니고 어학관련 교재를 만드는 곳이라 했다. 그곳에서 1년만 있으면 영어는 물론이고 5개 국어는 할 줄 알게 될 거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수가 낮에 연습실을 지키고 밤에 일하는 스타일이라면 몽은 낮엔 일했고 밤엔 연습실에서 작곡을 하거나 놀았다. 가끔 혜신이 찾아왔고 강호나 모히칸 등이 연습실을 찾는 것 외에 큰 변화가 생겼다. 유진의 등장이었다.

 

수에게 유진은 신기한 존재였다. 그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수가 혼자 남은 이 곳에 처연하게 들어와서는 혼자 노래를 불렀다. 좋게 말하면 몰입도가 대단했으며 나쁘게 말하면 어딘가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한동안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나면 수에게 다가가서는 이것저것 맛있는 걸 먹자며 치근거리기도 했다. 마치 누나가 동생 대하듯. 난장판이었던 연습실도 유진의 등장이후 정리되기 시작했다. 각종 식기와 팬들은 윤이 나도록 닦아놓았고 밑반찬들도 떨어지지 않았다.

 

유진, 몽, 수의 공통점은 먹고 사는데 필요한 행위와 음악적인 행위를 함께 병행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원칙이긴 했지만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다. 모두 스스로 움직였다. 찾아오는 사람들은 줄어갔고 술판이 벌어지는 일도 이젠 거의 없었다. 초반에 들떴던 분위기는 상당히 가라앉고 일정한 패턴이 지하의 하루를 관통해 갔다.

 

진지함이란 관념적인 태도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진지함은 매일 살아가는 태도에서 길러지고 묻어나왔다.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움직이고 당장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였다.

 

유진의 등장이후로 셋은 좀 더 삶에 진지하게 다가서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그들이 노래를 부르고 곡을 짓고 기타를 치는 건 놀이였다.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던 유진은 악기를 연주해주는 세션이라는 무기를 얻었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수의 기타와 몽의 드럼이 힘을 보탰다. 외롭던 음악이 입체적으로 풍성해지는 느낌. 그것만으로도 유진은 세상을 얻은 것처럼 행복했다.

 

때론 몽이 작곡한 곡을 연주해보기도 했다. 유진이 즉석으로 가사를 붙여서 부르곤 했다. 연주를 거듭하면서 서로의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쯤이었다. 전체적인 음악의 톤을 이끄는 수의 기타는 예전과 비교해 많이 노련해졌음을 몽이 감지했다. 몽의 작곡에 가끔 재미있는 패턴과 멜로디가 있다는 건 유진이 알아냈다. 유진의 음색이 지금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느낀 건 수와 몽이었다.

 

유진이 없을 때 둘은 곧잘 그녀에 관한 이야기했다. 마치 매니저나 된 것처럼.

 

“목이 좀 상한 것 같지 않아?”

 

“그런 것도 있지만 목소리의 톤이 달라져야 할 것 같아.”

 

“조금 힘을 빼고 불러보면 어떨까?“

 

몽이 가볍게 한마디 하자 수가 조금 진지하게 따라붙었다.

 

“부르는 곡의 스타일을 바꿔 보는 건?”

 

“지금처럼 내지르는 창법보다 어쩌면 중저음을 많이 쓰면서 속삭이듯 말하는 스타일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몰라. 좀 더 러블리한 목소리가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

 

러블리라는 말에 수는 몽을 쏘아봤다. 언제부터인가 몽이 유진을 바라보는 시선은 심상치가 않았다. 그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이 눈에 보였다. 평소 때나 연주를 할 때나.

 

“사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가만히 들어보면 마치 세상과 싸워보겠다는 목소리야. 내말은 싸우는 것도 좋지만 사랑받는 느낌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도 있잖아?”

 

“혹시 오디션에 도전할 생각은 안 해 봤을까?”

 

“안 해 봤다면 거짓말이겠지. 기획사에 픽업되면 그렇게 되기만 하면, 그래서 열심히 하기

만 하면 그쪽에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이런 생각 많이 했겠지.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서 멘토를 만나면 좀 더 수월하게 나설 수도 있겠지. 그런데 아마 그럴 거야. 앞에서 고개 숙이면서 평가 기다리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니까.”

 

“그럼, 도대체 최종 목표는 뭐야?”

 

몽이 잠깐 생각에 잠긴 듯 하다 입을 열었다.

 

“런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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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넷 그리고 하나

 

 

 

 

Cardigans, Losing A Friend

Alain Delon & Celine Dion, Parole

 

 

 

 

 

1

 

같이 일 좀 해볼까? 연락 줘.


 

이지로였다.

이제 남겨놓은 그 자리에 앉게 되는 건가?

정식 직원으로 쓰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건 이지로다운 방식이다.

 

어쨌든 수에겐 돈이 들어온 것 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직 활용한 가치가 있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거니까. 시계는 오후 9시였지만 상관없었다. 웬만해선 10시가 넘어서도 퇴근하지 않는다. 수는 한걸음에 강남으로 달려갔다.

 

수의 기분과는 달리 사무실은 침통한 분위기였다. 이지로를 포함하여 4명의 직원들이 회의실에 있었다. 모두 제때 퇴근을 하지 못한 억울함과 만성적인 피로가 공기 중에 섞여있었다. 공기는 지하실의 것보다 정갈했지만 밀도가 조밀했고 압력이 더 느껴졌다.

 

이지로는 수를 소개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참여할 카피라이터라고. 언뜻 보기에도 한참 어려보이는 수를, 직원들은 못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규모 회사에서 시작해서 지금껏 경력을 이어오고 있는 이들에게 큰 광고 대행사 출신, 거기에 사장의 조수였던 수가 살갑게 느껴질 리 없었다.

 

이지로가 나눠 준 브리핑 용 페이퍼엔 많이 들어본 브랜드가 보였다. 대부업계의 대표 회사였다. 케이블 TV채널에서 엄청나게 많이 보였던 광고가 생각났다. 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뭔가 가담해서는 안 될 일에 걸려든 청소년이 된 심정이었다. 이지로는 묵묵히 페이퍼를 넘기며 자신이 광고주로부터 들은 설명을 간결하게 전달했다.

 

이번 건은 ‘경쟁피티’라고 했다.

광고주의 초대에 응한 광고회사들이 한날한시에 광고주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해서 직원과 임원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쪽이 광고대행사로 낙찰된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현재 시장의 판도와 문제점들을 설명하던 이지로는 광고주 요구부분에 이르자 목에 힘을 줬다.

 

“광고의 소구점은 한달 동안 무이자로 대출해준다는 거야. 내용은 뭐 그렇다 쳐도 결론적으로 광고가 재밌고 중독성이 있어야한다는 거지.”

 

그건 모든 광고주들이 목을 매는 포인트였다. 브리핑을 마치자 이지로는 나머지 직원들을 돌려보내고 수와 둘만 남았다.

 

“어때? 이런 브랜드를 하게 된 소감이.”

 

예전 회사에 다닐 때도 이런 브랜드는 모두 기피했었다. 회사차원에선 이득을 되겠지만 개인적으론 썩 내키지 않는 브랜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수 입장에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돈이 엄청나. 이런 브랜드는 대행수수료도 현금 지급이거든.”

 

담배를 물고 수를 보는 눈빛에서 탐욕이라고 말할만한 것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현실이 보였다. 그러한 현실이지만 잘만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겠다는 위안. 그런 것들이 이지로의 눈에 있었다.

“한 달 동안 우린 이런 걸 생각해 보자고. 사람들을 홀리는 방법.”

 

정식직원이 아니란 점에서 이번 건이 수에겐 마지막 광고일지도 몰랐다. 뒤를 보지 않고 현실에 집중하는 건 지금으로선 가볍고 상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렵고 추상적인 과제였기에 부담스럽긴 했다.

 

수는 달뜬 기분으로 회사를 걸어 나왔다. 회사가 위치한 강남의 대로를 걸었다. 빌딩 옥상에는 최고의 브랜드들이 번쩍이는 광고판들이 즐비했고 수입차들이 도로변에 가득했다. 사람들을 홀린다? 수는 이지로의 말을 곱씹으며 걸었다. 강남의 인도는 넓게 잘 정비되어있었지만 막상 걸어 다니기엔 어색한 곳이었다. 수입차 혹은 고급차, 아니면 버스나 택시. 다들 어떤 식으로든 탈 것을 이용했다.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곳에서 걷기는 운동으로 어울리지 생활수단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높은 고개가 보였다. 신사동 고개였다. 걷는 동안 이지로가 넘겨준 프로젝트가 머리에 맴돌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이번엔 단순한 카피가 아닌 어떤 생각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고갯길의 내리막에 이르자 수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휘날리는 스카프자락에 선글라스, 그리고 길게 내려와 나풀거리는 치마. 한 손에는 커피 두 잔을 담은 캐리어까지. 혜신이었다. 가로수길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혜신이 무슨 이유인지 수를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올 줄 알았어.”

 

혜신이 수에게 커피를 건넸다. 둘에겐 확실히 앉아있는 것 보다 걷는 게 편했다.

 

 

강남대로의 중앙차로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은 인적이 드물었다.

어느새 시계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의 광고판 불빛에 비춰 혜신이 수가 받아가지고 온 프로젝트 브리프를 읽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혜신은 별로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두 번째 페이지쯤을 넘기다 뭔가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참여 스텝들이 적혀진 부분이었다.

 

“네가 한다는 광고일. 이 사람하고 하는 거였어?”

 

혜신이 실망스럽다는 듯 브리프를 수 쪽으로 던졌다. 영문을 몰랐다. 이지로를 보고 말 한 것이다.

 

“너, 혹시 이사람 알아?”

 

‘알다 뿐이겠어?“

 

혜신의 표정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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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든 사내였다.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반반이었고 길게 늘어뜨리기도 했지만 대부분 단정하게 묶고 다녔다. 차림새는 허름했다.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다만 그가 보유한 기타만큼은 엄청난 관리를 받은 듯 보였다. 일반 기타보다 통이 크고 붉고 갈색 빛이 도는, 유려한 곡선을 가진 기타였다.

 

기타에서 따뜻하고도 몽롱한 소리가 났다. 저것이 재즈기타구나. 유진은 자신의 곡을 부르다 남자의 연주를 듣곤 했다. 남자는 그저 기타를 칠 뿐 목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가 쏟아내는 선율은 빠르고 흥겨웠다. 복잡하게 손가락을 벌려서 연주하는 재즈의 코드는 즐겁지도 슬프지도 않은 묘한 감정들로 채워져 있었다.

 

둘의 공통점이 있다면 앰프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둘은 주변의 반응보다 자신의 소리에 더 집중하는 듯 보였다. 둘은 목요일 저녁이면 거의 같은 시간에 나타나 같이 연주를 시작했다. 한 달쯤 지나자 둘은 각자 연주를 하면서 서로의 음악을 감상했다. 그리고 자연스레 상대편에게 박수를 보내는 일도 잦아졌다.

 

그날도 연주가 끝나고 돌아가려는 참이었다. 유진이 먼저 자리를 뜨는 경우가 많았다. 항상 기타케이스를 접고 간단한 눈인사를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날따라 남자는 소주 한병을 꺼내 유진에게 내밀었다. 유난히 사람들이 없던 월요일 저녁이었다. 유진이 편의점으로 달려가 간단한 안주거리를 사왔다. 둘은 서로가 차지한 공간의 정확히 절반이 되는 지점, 나무 아래에 주저앉아 소주를 나눴다.

그날따라 무슨 일인지 정말 사람이 없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노래 부른지 꽤 된 거 같던데.”

 

“기타소리가 정말 예뻐요.“

 

음악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장황한 수다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남자는 젊은 여자와 술을 마신다는 것이 즐거운 듯 작은 눈은 반달을 그리고 있었다.

 

“요즘 오디션 프로도 많던데. 그런 거 준비하는 안해?”

 

홍대에 버스킹 밴드들이 대부분 오디션 프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었다.

유진은 소주를 한잔 털어넣고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건 아직.”

 

“왜?”

 

‘다들 훌륭하더군요. 개성도 강하고 대한민국에 저렇게 음악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나 겁도 났죠. 근데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심사위원 앞에서 마치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영 아니었어요. 왜 즐겁게 부르고 나서 다른 사람 앞에서 떨고 있어야하는지.“

 

남자는 묵묵히 유진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연거푸 소주를 들이켰다.

“내가 듣기에 기본은 된 거 같더라.”

“기본이요?”

 

“시끄러운 거리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 말이야.”

남자는 어느새 말을 편하게 놓았다.

 

“어떤 환경 어떤 사람 앞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하는 것.

그 노래를 자신이 듣는 것.

그런 자신만의 아우라가 없으면 늘 바깥 세상에 끌려 다니게 되지.”

 

그러고 보니 남자가 앰프를 쓰지 않는 이유를 유진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의 소리를 조금 듣게 될 줄 알게 되면 세상 쪽으로 좀 더 나가봐.”

 

“오디션 프로요?“

 

“하하. 그건 자신이 판단할 문제고. 자신의 소리를 남에게도 들려주고 남의 소리도 듣고 그러면서 발전하는 거지. 난 충분히 그러질 못했어. 젊을 땐 내 자신의 재능만 믿고 나만 잘하면 된다고 믿었지. 그럼 세상이 날 찾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바보 같은 생각이었어. 지금이야 거창한 꿈 따윈 접었지만 말이야.”

 

“남의 소리를 들어라?”

 

“그래 세상의 다양한 소리와 만나봐.

꼭 잘하는 사람 것만이 최고가 아니지.

오디션이든 밴드든, 음악은 가슴 언저리에 맴돌고 있을 때 보다

팡팡 밖으로 울려 퍼져야 좋은 거야.”

 

남자가 어느새 잔뜩 취한 얼굴로 유진을 보며 소주잔을 들었다. ‘팡팡’이란 단어가 듣기 좋았다. 자신을 알아주는 누군가와 함께 세상에 팡팡 울려 퍼지는 음악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사람들과 만나. 내가 듣기엔 보이스컬러도 지금의 것은 아니야.”

 

“좀 더 노력해야 된다는 건가요?”

 

“노력의 문제는 개인적인 거고. 지금의 그런 강한 음색 보다 어쩌면, 다른 감성이 자기의 감성일 수도 있다는 거지. 나야 노래는 문외한이니까. 그걸 한 번 찾아봐.”

 

“힌트를 좀 주세요.

 

노인은 너털 웃으며 입 주변을 쓱 닦았다.

 

“잘은 모르지만 음악으로 보내온 시간들에 답이 있겠지.”

 

남자는 막잔을 털어 넣고는 자리를 떴다. 유진은 솔직히 2차라도 가서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남자는 묵묵히 사라졌다. 그 후로 그는 다시 거리에 나타나질 않았다.

 

변화 없는 나날들 이어졌다.

 

더 크고 화려한 곳으로 왔지만 오히려 더 고요하고 무료했다. 변화 없는 하루는 빈 노트에 쓰는 한 문장과 같았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똑같은 문장을 칸칸이 그어진 노트에 한 줄씩 채워 넣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들이 한 페이지를 모두 채울 때면 매번 어떤 사건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유진은 어렴풋이 느꼈다.

 

계속 버티고 움직이는 자에게 주어질 일종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선물은 6개월이란 시간 뒤에 주어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직도 군대에 있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떡 하니 노래하고 있는 유진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직 완전히 군대시절의 때를 벗진 못했지만 나름 머리도 길어 있었고 패션도 훨씬 요즘에 가까워졌다. 녀석의 축 쳐진 눈빛은 한적한 공원에서나 북적이는 이곳에서나, 술에 취한 새벽이나 밤으로 접어드는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호기심과 천진함, 감추지 못한 음흉함까지.

 

노래가 끝나자 유진은 평소보다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안도의 한 숨 같은 것이었다.

 

 

 

6

이런 곳이 밴드 연습실이구나.

 

유진은 비로소 음악을 위한 공간 앞에 서있는 것이었다. 유진과 몽은 지하실 철문 앞에 서있었다. 비록 매끈하게 지어진 스튜디오가 아니라 녹이 슨 철문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가슴을 뛰게 했다. 아마도 누구의 간섭도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공간일 것이다. 몽이 앞장서 철문을 열려는 순간 잠시 동작을 멈췄다.

 

“지미 헨드릭스네가 왔네. 한 번 들어볼래?”

 

철문을 너머로 밴드가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비트의 드럼소리와 그 위로 입혀지는 기타소리. 보컬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기타 소리가 거의 압도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몽이 뭔가 대단한 것을 듣는 듯 귀를 철문 쪽으로 붙이고 있었다. 유진도 귀를 기울였다. 유진의 귀에 기타는 국악기 같았다. 국악에 관해 자세히는 몰랐지만 어깨를 들썩이게 할 만큼 신이 나있었다. 예쁘게 치려는 의도도 없어 보였다. 그저 거칠고 강하게 몰아쳐댔다. 그렇다고 늘 강한 것만 아니었다. 종종 유연하게 리듬을 타며 흘러가다가 다시 거칠어졌다. 한동안 긴 기타솔로를 치기도 했고 기타로 낼 수 있는 갖가지 기이한 소리를 내기도 했다. 오토바이 타는 소리 같기도 했고 혹은 토하기 직전 울렁거리는 위장을 흉내 낸 것도 같았다.

 

몽과 유진은 철문을 열고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왔다. 앰프의 출력이 워낙 컷던 탓인지 둘이 온 것도 모른 채 기타리스트는 기타를 맨 채 연주에 몰입해있었다. 몽과 유진이 한참동안 서서 그를 쳐다보자 기타리스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들을 확인했다.

 

기타리스트는 순간적으로 치고 있던 기타 줄을 움켜잡았다. 연주가 멈췄지만 어디에선가 전기적인 잡음과 여운이 연습실 안에 가득 남아있었다. 삐쩍 마르고 훤칠하게 큰 키. 다소 내성적인 분위기. 다가가기 쉽지 않은 인상이었다.

 

몽이 서로를 소개하자 둘은 무덤덤하게 인사를 마쳤다. 먹다만 음식과 옷가지와 악기들. 유진이 그토록 자신의 일에 매몰되었듯이 이 남자도 그녀와 비슷한 그 어떤 것에 흠뻑 빠져들었던 것이 분명했다.

 

셋은 어색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몽이 집에서 가져온 음식들 이었다. 유진이 솜씨 있게 음식들을 담아냈다. 수의 눈에 부엌생활에 익숙한 손동작이 들어왔다. 그녀는 먹고사는 것에 음악만큼이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성적인 긴장감이 가득하면서도 어쩐지 생활인의 건강함과 터프함이 살아있었다.

 

“3일 밤낮을 찾아 모시고 왔지.”

 

확실히 수나 몽보다 나이는 들어보였다. 몽은 밥을 먹으며 그동안 유진과 겪은 일들을 털어놓았다. 처음 만나게 된 날. 어쩌다 그녀의 자취방에서 보내게 된 하루와 1년이 지난 뒤 홍대 앞에서 혼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다시 만난 것과 그녀의 손을 이끌고 이곳으로 온 것까지. 서로 전화번호도 주고받지도 않고 1년 뒤에, 그것도 단 몇일을 본 인연으로 다시 만난다는 것이라며 신기해했다.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수년을 지니고 살아도 얼굴 한 번 보기도 힘든 이들이 많다.

 

둘은 지하실에 남겨두고 수는 오랜만에 바람을 맞으러 밖으로 나왔다. 둘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내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하지만 곧 발걸음이 리드미컬해졌다. 지미 헨드릭스의 느낌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최근 들어 모든 것이 다 가벼워지고 있었다. 가벼워질수록 작은 감정 하나, 사소한 소리 하나까지 섬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온몸의 감각을 거의 100퍼센트에 가깝게 쓰고 있었다.

 

수는 아직도 일을 하고 있는 시장 사람들을 보며 문득 꺼두었던 스마트폰을 켰다.

낮에 온 메시지들이 화면 밖으로 튀어 나올 듯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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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도 그 공원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봤어. 내 친구 중에 한 명에 거기서 기타치며 노래를 불렀거든. 그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지. 뭐, 그땐 내가 정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사람들에게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곤 그 후로도 음악을 하면서도 가끔 그 공원을 찾았어. 신도시 인구가 수십만인데 나나 내 친구 같은 생각을 가진 그런 애들이 또 있을 것 같아서. 혹시 진짜 천재가 나타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지는 않을까 해서.

 

그런데 한 명도 없더군. 수십만이 사는 신도시인데 말이야. 천재는 고사하고, 자신의 음악을 보여주고 싶은 아이들이 어떻게 한 명도 없을 수 있지? 그러다 군대에서 휴가를 받아오니 다시 옛날 생각이 나더라고. 혹시 나처럼 철없는 부류의 인간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런데 그쪽을 발견하고 놀랐지. 나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던 거지. 난 음악은 즐거움이라고 생각했어. 즐겁고 싶을 땐 마음껏 즐겨라. 그런데 그쪽을 보니 뭔가 힘겹게 버텨나가는 것도 음악이라는 거라는 게 느껴져.

존나게 버텨봐.

앞으로 1년만.”

 

“그럼 뭐가 달라지나.”

 

“1년 뒤에 제대니까 그땐 꼭 찾아올게.”

 

“그땐 어디서 뭘 할 건 지 어떻게 알고 찾아와?”

 

“그렇게 버텨서 뭐가 되고 싶은 거야? 유명해 지고 싶은 거야?”

 

말을 하려던 유진이 남은 술을 남김없이 목구멍으로 부었다.

 

“지금처럼 술에 안취하고도 그냥 음악만으로 미치는 거. 내 별명이 미친년이거든. 근데 그땐 늘 술에 취해 있었지. 미치고 싶어도 그냥 미치기는 두렵고. 이젠 미쳐도 사람들이 손가락질안하고 그냥 노래하는 모습만 바라만 봐줄 정도면 좋겠어. 그런 정도면 딱 좋겠어.”

 

그렇게 술잔이 몇 잔 더 돌자 녀석은 많이 취한 듯 팔짱을 낀 채 머리를 테이블 위에 박고 있었다. 기분이 상당히 오르기 시작하자 유진이 소주를 시켜 맥주에 말아먹기 시작했고 그걸 녀석이 그대로 따라 마셨다. 자신보다 어려서일까. 아니면 이런 부류의 인간들에 목이 말랐던 것일까.

 

어째 이 녀석,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어느새 술집엔 유진과 녀석뿐이었다. 시간은 새벽 1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녀석은 기어이 유진이 사는 곳까지 따라왔다.


“애인은 있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대로 뻗어서 자는 줄 알았던 녀석이 뉘어던 몸을 반대쪽으로 돌린 채 나직이 물었다.

 

“있지.”

 

“어딨는데?“

 

잠깐 머뭇하던 유진이 입을 열었다.

 

“런던.”

 

“음악하는 사람이야? 유학 간 거야?”

 

유진은 말을 잇지 않았다. 한동안 유진의 침묵에 녀석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흘렸다. 유진은 아무것도 붙어있지 않는 벽에 기대어 다리를 뻗었다. 방엔 불을 껐고 대신에 책상 위의 조그만 스탠드 불만 켰다.

 

낮엔 일을 했고 저녁엔 노래를 불렀고 밤엔 술을 마셨다. 마치 촛불 아래에 있는 것처럼 마음이 평온해졌고 온몸이 기분 좋은 피로감에 젖어들었다. 얼마나 더 벌어서 먹고 살 수 있을지도 막막했고 이렇게 노래를 부르며 버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잠시 두려운 기분이 스며들었지만 어쨌든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버텨나가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쩌면 아주 가느다란 틈으로 빛 한줄기가 스며들지도 몰랐다. 매일 매일 뻔한 일상을 켜켜이 쌓아올리다 보면 어느 날 뻔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 오늘 저 녀석을 만나 자취방으로 데리고 오게 된 것처럼.

방바닥에 누워 있던 녀석이 갑자기 일어났다. 혹 늑대 짓을 하려는 건 아닌지 유진이 살짝 긴장했지만 녀석은 유진의 기타 케이스를 열어 기타를 꺼내들었다. 녀석은 기타 줄을 몇 번 건드려보더니 몇 가지 코드를 짚으며 기타 줄을 쓸었다.

 

“사실은 말이야. 아까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데 뭔가 멜로디가 생각나는 거야.”

 

기타를 치면서 녀석이 영어인지 뭔지 모를 말로 웅얼거렸다. 멜로디는 생각났지만 가사는 아직 떠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축 쳐진 두 눈이 술을 먹어서 인지 더 쳐져 보였지만 녀석은 뭔가 발견했다는 듯 히죽 웃으며 늦은 밤, 낯선 방에서 편안히도 기타를 쳐댔다.

유진은 지금 이 시간에 뭐 하는 짓이야, 라고 말할 뻔하다 간신히 참았다. 떠오른 멜로디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그 모습은 그와는 다른 모습이었지만 묘하게 비슷하기도 했다.


“다음엔 말이야. 좀 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불러보면 어때? 대학로나 홍대 같은 곳 말이야. 거긴 우리 같은 부류의 인간이 수십 배는 많을 테니까. 1년 뒤야. 그땐 대학로나 홍대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라고. 그럼 내가 알아서 찾아갈게.“

 

녀석이 일방적으로 지껄이더니 다가오는 버스에 먼저 몸을 실었다. 버스에 탄 녀석은 유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5

 

신도시의 공원과 비교해 확실히 홍대 앞의 공기는 달랐다.

뭔가를 보여주려는 열정으로 이곳의 공기는 늘 덥혀져있었다. 그 녀석과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유진은 신도시를 떠나 이 먼 곳까지 오게 된 자신이 의아했지만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은 온통 버스킹의 열풍이었다. 홍대역에서 얼마 되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광장은 제법 고정 팬들을 확보한 버스킹 밴드들이 공연을 하고 있었다. 다만 크고 작은 밴드들이 각자 앰프의 볼륨을 높이는 바람에 거리는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소음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유진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았다. 사람들의 눈에 띄는 곳은 기대 하지 않았다. 그저 기타를 울리고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면 충분했다. 사람이 많이 지나는 거리 가운데 가로수 한그루가 심어진 곳. 유진은 그곳에 주저 없이 기타 케이스를 열고 기타를 맸다. 망설임 없이 준비한 곡을 불렀다. 오랜 훈련의 결과였다.

 

늘 첫 곡은 ‘땡큐(Thank you)’ 였고 마무리 곡은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Across the universe)‘였다. 그리고 중간에 채워 넣은 곡들은 그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졌다.

똑같은 노래들을 불렀지만 그날의 공기에 따라 노래는 달라졌다. 길을 가던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했고 가끔 한둘이 서서 노래를 들은 뒤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즉각적인 반응이 오는 건 반가웠지만 이곳은 의례 그런 곳이라는 듯 귀담아 듣지 않은 이도 많았다. 특히 지나가는 남자들, 술 취한 남자들 중엔 유진의 몸을 훑어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몇일 그렇게 어색한 공기에 휩싸여 노래를 불렀다.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의 단 이틀이었지만 힘은 이전보다 배로 들어갔다. 공원과 달리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몇 주가 지나자 유진의 옆에 자리를 잡은 한 뮤지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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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날 역시, 유진은 아무도 없는 공원 모퉁이에서 기타를 맨 채 노래를 불렀다. 그동안 꾸역꾸역 자신을 거리로 내몰자 그것은 그것대로 경험으로 쌓였다.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한 예전의 기운이 살아나고 있었다. 이제 전혀 외부 사람들에게 신경 쓰지 않게 된 유진은 가끔 기분이 좋으면 곡이 끝나고 스스로 공연 멘트를 중얼거려가며 공연을 이어갔다.

유진은 공연 중간쯤부터 인기척을 느꼈다. 자신의 등 뒤로 한 남자가 유진을 보고 있었다.

 

왜 하필 등 뒤지.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거슬림을 느끼며 유진은 그날치의 공연을 끝냈다.

 

그날 이후 그 남자는 유진의 주위를 맴돌았다. 등 뒤에서 혹은 옆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남자는 몇일이 지나자 자신의 눈앞에 섰다. 나이든 백수에 정신이 약간 오락가락하는 아저씨를 상상했던 유진은 의외로 젊고 상태가 괜찮은 남자임에 안도했다.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남자는 유진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만원 지폐를 기타 케이스 안에 넣었다.

꾸벅 인사하던 유진이 남자를 바라봤다. 짧게 자른 머리와 검게 그을린 피부는 분명 군대와 관련 있는 사람이 분명했다. 두 눈은 축 쳐져 있었고 자신을 보는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세상과 동떨어진 인상을 주었다.

 

“목소리가 멋지던데요.”

 

“고맙습니다.”

 

유진이 다소 무뚝뚝하게 대꾸하곤 서둘러 짐을 꾸렸다.

 

“뒷태도 멋졌어요.”

 

기타를 챙기느라 엉덩이를 뒤로 뺀 유진은 그 자세를 그대로 남자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뭘 입고 나왔지?’

 

스키니 진을 입은 건 결코 도발을 목적으로 하진 않았다. 남자들의 생각이란.

 

“그건 초면에 할 만한 말은 아닌 것 같네요.”

 

휙 돌아서 걸어가는 유진의 뒤를 남자가 따라붙었다.

 

“제가 좀 솔직하죠.”

 

남자는 천연덕스러웠다. 자신과 또래이거나 한두 살 아래의 느낌. 그래, 멀쩡한 척 하고 있다가 틈만 생기면 몸을 더듬는 놈들 보단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밝은 대낮에 자신의 느낌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 그것도 건강한 남자라는 증거였다.

유진은 기분이 나빠졌다기보다 오히려 그와 농담을 주고받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주변을 서성이다 어느 날 종적을 감춰버리면 괜히 우울해질 것 같았다. 어쩐지 자신과 비슷한 과의 인간이라는 점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단지 비슷한 인간이라는 점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지금껏 외롭게 살아왔나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유진은 서글퍼졌다.

 

차가운 맥주가 가슴 한가운데에 강줄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꽉 차있던 뭔가가 씻겨 내려갔다.

 

“음악적으로 보면, 뭔가 하나를 넘어섰어.”

 

맥주잔을 놓는 유진에게 녀석은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뭘 좀 알면서 말하는 거야?”

 

피식 웃으며 맥주잔을 내려놓은 유진이 팔장을 낀 채 녀석을 쳐다보았다. 녀석은 즐거운 듯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자신이 누나뻘임을 확신한 유진이 슬쩍 반말을 던졌다. 녀석도 친누나 대하듯 반말로 받아냈다.

 

“노래라면 나도 좀 불러봤으니까. 그렇다고 세련된 수준은 아니야. 단지 초보 수준에서, 한 단계 넘어섰다는 거지. 혼자 연습한 거야?”

 

“그런 셈이지.”

 

“기타 치는 것도 인상적이던데. 뭐, 아주 잘 친다고는 볼 순 없지만. 여자가 치는 기타치곤 꽤 힘이 있어. 아메리칸 그립으로 코드 잡는 거. 6번 줄 베이스음을 자연스럽게 엄지로 짚는 건 꽤나 자연스러워 보이던데.”

 

스페니쉬 그립이라 하여 줄을 짚는 손가락은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을 쓰지만 록이나 혹은 포크 기타에서 아메리칸 그립이라 하여 손목을 비틀어 가장 윗줄은 엄지로 잡기도 했다. 그건 예전 남자가 연주하던 걸 유진이 유심히 보고 배운 것이었다.

 

“디테일하네. 여자 몸매만 관찰하는 줄만 알았는데.”

 

유진이 맥주잔을 내밀며 건배를 청했다. 둘은 좋아하는 음악을 비롯해 지금까지 겪어온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진이 말을 아끼는 반면 녀석은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군대에서 처음으로 노래를 불렀던 일부터 짬밥도 안되는 이등병이 부대 행사에 자청하고 나갔던 일과 부대 막사 내 보일러실에서 보일러 틀어놓고 몰래 노래를 불렀던 것까지.

 

“앞으로 어떤 계획 있어? 오디션이라도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닌가?”

 

“선생님 앞에서 뭐 잘못한 학생처럼 머리 숙이고 반성하고 자책하고 야단맞고 그러면서 스타가 된다던데. 그런 건 체질적으로 못하겠고.”

 

“그럼, 밴드라도 만들던가.”

 

“누가 나랑 밴드를 하겠어? 아직은 아는 사람도 없고. 매일매일 유치원에 다니는 애들처럼 스스로에게 도장찍어주고 도장 받고. 그런 수준인 거야.”

 

“존버 정신이군.”

 

“그거 락커냐?”

 

“존나게 버티기. 인터넷도 안보시나 봐.”

 

“맞아. 지금은 버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지. 그런데 얼마를 갈 수 있을지.

 

솔직히, 언젠가부터 말이지 유명 가수나 밴드의 음악을 들으면 그 멤버들의 출생연도와 데뷔 년도 같을 걸 나도 모르게 찾아보고 있더라고. 이 사람들은 언제 태어나서 언제 데뷔했는지. 나는 너무 늦은 건 아닌지. 그런 걱정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 거야.

 

“버틴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거야. 불확실한 미래를 받아들이는 게 요즘 세상에 어디 쉬워? 다들 가능성이 높은 쪽으로, 확실한 쪽으로만 움직이잖아.”

 

유진이 못들은 척, 벌컥벌컥 맥주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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