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넷 그리고 하나

 

 

 

 

Cardigans, Losing A Friend

Alain Delon & Celine Dion, Parole

 

 

 

 

 

1

 

같이 일 좀 해볼까? 연락 줘.


 

이지로였다.

이제 남겨놓은 그 자리에 앉게 되는 건가?

정식 직원으로 쓰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건 이지로다운 방식이다.

 

어쨌든 수에겐 돈이 들어온 것 보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아직 활용한 가치가 있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거니까. 시계는 오후 9시였지만 상관없었다. 웬만해선 10시가 넘어서도 퇴근하지 않는다. 수는 한걸음에 강남으로 달려갔다.

 

수의 기분과는 달리 사무실은 침통한 분위기였다. 이지로를 포함하여 4명의 직원들이 회의실에 있었다. 모두 제때 퇴근을 하지 못한 억울함과 만성적인 피로가 공기 중에 섞여있었다. 공기는 지하실의 것보다 정갈했지만 밀도가 조밀했고 압력이 더 느껴졌다.

 

이지로는 수를 소개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참여할 카피라이터라고. 언뜻 보기에도 한참 어려보이는 수를, 직원들은 못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소규모 회사에서 시작해서 지금껏 경력을 이어오고 있는 이들에게 큰 광고 대행사 출신, 거기에 사장의 조수였던 수가 살갑게 느껴질 리 없었다.

 

이지로가 나눠 준 브리핑 용 페이퍼엔 많이 들어본 브랜드가 보였다. 대부업계의 대표 회사였다. 케이블 TV채널에서 엄청나게 많이 보였던 광고가 생각났다. 수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뭔가 가담해서는 안 될 일에 걸려든 청소년이 된 심정이었다. 이지로는 묵묵히 페이퍼를 넘기며 자신이 광고주로부터 들은 설명을 간결하게 전달했다.

 

이번 건은 ‘경쟁피티’라고 했다.

광고주의 초대에 응한 광고회사들이 한날한시에 광고주 앞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해서 직원과 임원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쪽이 광고대행사로 낙찰된다. 주어진 시간은 한 달. 많지도 적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현재 시장의 판도와 문제점들을 설명하던 이지로는 광고주 요구부분에 이르자 목에 힘을 줬다.

 

“광고의 소구점은 한달 동안 무이자로 대출해준다는 거야. 내용은 뭐 그렇다 쳐도 결론적으로 광고가 재밌고 중독성이 있어야한다는 거지.”

 

그건 모든 광고주들이 목을 매는 포인트였다. 브리핑을 마치자 이지로는 나머지 직원들을 돌려보내고 수와 둘만 남았다.

 

“어때? 이런 브랜드를 하게 된 소감이.”

 

예전 회사에 다닐 때도 이런 브랜드는 모두 기피했었다. 회사차원에선 이득을 되겠지만 개인적으론 썩 내키지 않는 브랜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수 입장에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돈이 엄청나. 이런 브랜드는 대행수수료도 현금 지급이거든.”

 

담배를 물고 수를 보는 눈빛에서 탐욕이라고 말할만한 것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현실이 보였다. 그러한 현실이지만 잘만 된다면 그보다 좋을 수 없겠다는 위안. 그런 것들이 이지로의 눈에 있었다.

“한 달 동안 우린 이런 걸 생각해 보자고. 사람들을 홀리는 방법.”

 

정식직원이 아니란 점에서 이번 건이 수에겐 마지막 광고일지도 몰랐다. 뒤를 보지 않고 현실에 집중하는 건 지금으로선 가볍고 상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렵고 추상적인 과제였기에 부담스럽긴 했다.

 

수는 달뜬 기분으로 회사를 걸어 나왔다. 회사가 위치한 강남의 대로를 걸었다. 빌딩 옥상에는 최고의 브랜드들이 번쩍이는 광고판들이 즐비했고 수입차들이 도로변에 가득했다. 사람들을 홀린다? 수는 이지로의 말을 곱씹으며 걸었다. 강남의 인도는 넓게 잘 정비되어있었지만 막상 걸어 다니기엔 어색한 곳이었다. 수입차 혹은 고급차, 아니면 버스나 택시. 다들 어떤 식으로든 탈 것을 이용했다. 걷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곳에서 걷기는 운동으로 어울리지 생활수단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높은 고개가 보였다. 신사동 고개였다. 걷는 동안 이지로가 넘겨준 프로젝트가 머리에 맴돌았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이번엔 단순한 카피가 아닌 어떤 생각이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더욱더 그랬다. 고갯길의 내리막에 이르자 수의 눈에 낯익은 모습이 보였다. 휘날리는 스카프자락에 선글라스, 그리고 길게 내려와 나풀거리는 치마. 한 손에는 커피 두 잔을 담은 캐리어까지. 혜신이었다. 가로수길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혜신이 무슨 이유인지 수를 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올 줄 알았어.”

 

혜신이 수에게 커피를 건넸다. 둘에겐 확실히 앉아있는 것 보다 걷는 게 편했다.

 

 

강남대로의 중앙차로에 위치한 버스정류장은 인적이 드물었다.

어느새 시계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버스정류장의 광고판 불빛에 비춰 혜신이 수가 받아가지고 온 프로젝트 브리프를 읽고 있었다. 종이를 넘기는 혜신은 별로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두 번째 페이지쯤을 넘기다 뭔가를 발견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참여 스텝들이 적혀진 부분이었다.

 

“네가 한다는 광고일. 이 사람하고 하는 거였어?”

 

혜신이 실망스럽다는 듯 브리프를 수 쪽으로 던졌다. 영문을 몰랐다. 이지로를 보고 말 한 것이다.

 

“너, 혹시 이사람 알아?”

 

‘알다 뿐이겠어?“

 

혜신의 표정이 어두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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