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둘이서 왔던 섬은 단지 추억의 장소로만 머물지 않을 인연이었을까?

 

예정된 시간에 맞춰 무대가 설치되고 각종 장비들이 들어왔다. 작은 공연무대였지만 별다른 이벤트도 없었지만 공연장비는 유진의 상상을 초월했다. 애써 담담한 채 무대가 지어지는 것을 보았다. 공연은 저녁 무렵에 시작될 것이다. 곧이어 리허설도 하게 될 것이다.

그와 즉석 공연을 했던 장소보다는 훨씬 더 눈에 잘 띄는 곳이었다. 무대 위에서 섬을 조망하던 유진이 간이 계단을 급하게 내려왔다. 멀리서 드뷔시와 담당 팀장 그리고 팀원들이 모니터를 하기 위해 오고 있었다.

 

패션 회사의 CEO임에도 옷차림에 힘을 주지 않는 듯한 드뷔시의 모습이 오히려 인상적이었다. 심플한 청바지, 푸른색 린넨 자켓과 화이트 셔츠만으로 그의 인상은 강렬했다. 큰 키에 균형 잡힌 몸을 자기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둘은 잠시 담당자와 스텝들에게 무대를 맡기고 유진과 주변을 걸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잘 부탁드릴게요.”

 

“전 잘 부탁드립니다, 따위의 말은 안합니다.”

 

뒷짐을 지고 걷던 드뷔시는 면도가 잘된 턱을 한 번 치켜들더니 유진을 보며 말했다.

 

“우리와 있는 동안 우리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당신이 갖고 싶은 것을 골라서 가져요.

우리를 이용한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행운이라고 생각하지 마요. 다만 당분간은 우리와 당신들이 함께 한 방향을 향해 걸어가는 걸로만 만족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우리대로 당신은 당신대로 가겠지만 이렇게 마주친 이 시간들을 잘 이용해보자고요.“

 

유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드뷔시는 주위를 살짝 둘러보더니 뒷짐 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앙증맞은 미니 사이즈 맥주캔 두 개가 있었다. 둘은 맥주 캔을 따고 건배했다.

 

“당신들의 아름다운 오디오를 위해”

 

“당신들의 아름다운 비디오를 위해”

 

드뷔시의 선창에 유진이 운을 맞춰주었다. 멀리서 드뷔시의 팀원들이 주변을 촬영을 하고 있었다.

 

전반적인 비주얼에 대한 회사의 지원은 비단 옷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헤어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 업 또한 붙여주는 것 당연했다. 어쨌든 비주얼에선 자신들의 역량이 총동원되어야했다. 적당한 메이크업을 한 뒤였지만 혜신이 수를 앉히더니 뭔가를 더 해주려했다.

혜신의 손길이 닿자 수는 눈을 질근 감았다. 막상 혜신의 얼굴을 마주하려니 기분이 묘했다. 고등학교 시절 분장을 해주던 혜신을 대하던 것과 차이가 없었다. 조금도 편안해지지 못했다. 그때의 그 마음과 지금의 마음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그때 혜신은 수의 얼굴에 뭔가를 아주 두껍게 칠했다. 장난기도 가득했다. 뭔가를 덧칠하면 충분히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거라고 혜신도 수도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수의 얼굴에 닿는 느낌은 조금은 더 가벼웠다. 오히려 뭔가를 털어내는 느낌이었다. 그냥 본 모습을 가리고 있던 먼지들을 털어내는 느낌.

 

수는 실눈을 간신히 뜨고 혜신을 보았다. 비록 참새처럼 떠들진 않았지만 햇살을 등진 그녀에겐 여전히 장난기가 살아 있었다. 사람이 옛날의 모습들을 거꾸로 찾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감사한 일이지 수는 혜신을 보며 생각했다. 한 번 무겁게 가라앉은 삶은 그대로 더 깊은 곳으로 떨어질 뿐 다시 떠오를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할 수 있는 거라곤 가라앉는 속도를 최대한 줄이는 것뿐이었다. 그런 혜신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가 잠시 실눈을 뜨자 혜신이 거의 붙을 만큼 얼굴을 들이댔다. 그리곤 재빨리 수의 입에 입을 맞췄다. 그리곤 고개를 홱 돌리더니 사라졌다. 햇살이 반짝이는 수면 위를 한 마리 돌고래가 사뿐히 튀어 올랐다 사라진, 그런 느낌이었다.

 

리허설이 시작될 시간은 오후 늦게나 가능할 것 같았다. 제대로 플랜을 짜놓지 않은 덕에 갖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긴 했다. 아마도 공연이 시작되면 낮이 저녁으로 접어들 것이고 어쩌면 끝이 날 때쯤은 밤이 되어있을 것이다.

 

트리니티 팀원들은 의상에 과히 힘을 주진 않았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매치한 캐주얼과 댄디한 복장들, 로맨틱하고 발랄한 의상들이 곡의 분위기에 따라 준비되었다.

모두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첫 무대는 전부 청바지를 입었고 각기 다른 색과 디자인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몽과 수, 혜신이 유진이 마이크를 잡고 있는 앞쪽으로 모여들었다.

 

“어쩌면 우린 음악으로 모였지만 이곳으로 초대받은 건 우리의 음악 때문은 아니지. 그래서 감히 성공하자, 잘하자는 말은 못하겠네. 그리고 성공 같은 그런 말은 어쩐지 우리에게 어울리지가 않지.“

 

유진이 몽을 보며 윙크했다. 한 갈래로 묶은 머리 사이로 한 줄기 머리카락이 이마 앞으로 내려와 유진의 왼쪽 눈을 살짝 가렸다. 유진이 머리를 한 차례 쓸더니 묶은 머리를 활짝 풀고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가 들었다.

 

“우리 실패하자.”

 

‘실패’라는 말이 한 덩어리가 되어 수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마치 대리석 바닥 위로 당구공이 떨어졌을 때 나는 소리가 들렸다. 쓴맛이 나는, 그러나 오랜 시간 잘 건조되어 깊은 맛이 나는 말이었다. 헛된 기대는 모두 빠져나간, 그래서 오히려 뼈맛이 살아있는 말이었다.

 

“클럽 킬리만자로. 그때 생각나?”

 

유진이 몽을 보며 말했고 몽이 유진을 보며 다시 말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어. 하지만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해도 슬퍼 하지 말자. 이건 그냥 우리들의 놀이였을 뿐이니까.“

 

“그래, 대신 멋지게 실패하자.”

 

혜신이 몽을 바라보며 동시에 수와 유진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몽이 사운드 체크를 위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드럼을 울렸다.

몽의 드럼 소리에 유진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팡팡 울려 퍼지는 음악을 할 것이다. 그리고 제대로 미쳐보는 거지. 그렇게 미친년이 되고 말 것이다.

유진은 티셔츠의 가운데를 검지로 한 번 눌러보았다. 심장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뛰고 있었다.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가슴 위로 슬쩍 도드라진 자국을 보았다.

 

벌써 가고 있는 거야.

런던까지는 아직 못 갔지만.

 

문득 유진은 숨겨두었던 그 이름을 크게 불러보고 싶었으나 검지를 더 깊게, 꾹 눌렀다.

 

‘아직 더 가야한다.’

 

유진이 마이크를 들자 날카로운 하울링이 귓가를 스쳤다. 멀리 외인들로 보이는 이들이 무대를 보며 알 수없는 말로 떠들기 시작했다. 유진은 그것이 어느 나라의 언어인지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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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시즌 1을 마칩니다.

시즌 2에서는 새롭고 강력한 캐릭터가 등장할 예정이고 좀 더 사건위주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을 봐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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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의 환풍기 소리가 그날처럼 크게 들렸던 적은 없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몽과 수와 혜신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유진은 낮에 있었던 의류회사의 제안을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의외로 반응이 무거웠다. 늘 명랑하던 몽까지도. 아마도 어떤 조건이나 회사의 의도보다도 이렇게 밴드가 시작되어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 그들을 무겁게 만들었을 것이다.

 

“언니만 좋다면 나는 오케이야”

 

맥주 캔을 내려놓은 혜신이 약간 취한 얼굴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혜신은 본능적으로 알 것이다. 지금 회사가 내놓은 제안이 어떤 것이란 걸. 아마 몽도 수도 각자의 경험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 혼혈 사장이 괜찮은 사람일거란 막연한 기대하나만 갖고 있는 건 유진 밖에 없었다.

 

“라인업도 잘 짜야겠고. 플랜도 좀 생각해야겠지.”

 

수의 말이라고 예상했지만 주인공은 몽이었다.

 

“휴~그럼 일단은 우리, 해보겠다는 거네.”

 

유진이 ‘우리’라는 말을 쓰자 공기 중에 안온한 기운이 돌았다. 다들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 고는 평소대로 연습을 시작했다.

그들이 밴드의 형태로 들려줄 수 있는 곡은 카피곡이 7곡 정도였고 자작곡이 5곡 정도였다. 자작곡 중 몇 곡은 아직 가사와 멜로디라인도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상황이 실력을 만드는 거야.”

 

몽의 지론을 떠올리며 유진이 힘차게 마이크를 잡았다.

 

3

 

자작곡들은 몽이 쓴 곡들이 대부분이었고 몇 개는 수가 만든 것도 있었지만 유진이 만든 것도 있었다. 무대에 설 생각을 하자 수는 유진이 지은 ‘클레멘트’라는 곡에 흥미가 생겼다.

 

런던으로 와, 클레멘트

런던으로 와, 노래를 불러

 

그런 후렴구를 가진 곡이었다. 유진이 언젠가 기타를 치며 막 생각난 멜로디를 흥얼흥얼 하는 것을 수가 들었다. 멜로디가 쉽고 인상적이어서 즉석에서 수가 앞부분을 만들어 완성한 곡이었다. 몽은 곡을 듣고는 비트를 살려서 펑크 스타일로 연주해 보고 싶어 했다.

 

런던이란 대목에서 옛날의 연인을 생각하며 떠올린 노래가 틀림없었다. 혹시 남자는 클레멘트라는 영국인이었을까? 음악적인 느낌만을 가지기 위해 수는 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수는 이곡이 좀 더 가식 없는 담백한 곡이 되었으면 했다.

몇 일 동안 기타를 치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플레잉 하이가 찾아왔는지 머릿속으로 단어가 맴돌았다.

 

가라. 가라. 가라.

 

수는 얼마 후 그 단어가 발생지가 바로 형섭의 기타였음을 알았다. 수는 자취방 침대 밑에서 형섭의 마틴 어쿠스틱을 꺼내들었다. 이제 조심스레 기타를 닦고 줄을 갈아 넣었다. 튜닝을 마친 6현의 소리는 형섭이 연주하던 시절 그대로였다. 수는 자신이 아는 곡을 연주하려다 문득 멈췄다. 수는 오로지 형섭의 곡들로 이 기타의 소리를 기억했다. 이 기타에서 형섭의 소리 이외의 것은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유진이라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형섭의 기타와 유진의 목소리는 유전적인 동질성으로 공명하고 있었다. 그건 기타를 조금 진지하게 다뤄본 사람이라면, 음악이란 걸 조금은 귀 기울여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좋은 기타네.”

 

“친구가 맡겨둔 기타죠.”

 

“음악 하는 친구?”

 

“음악 하던 친구.”

 

“지금은 안하는 거야?”

 

“그럴 거야. 만약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면 이 기타를 찾아갔겠지.”

 

수는 유진 앞에서 처음으로 마틴을 외부에 선보였다. 클레멘트의 도입부를 연주하자 유진이 바로 알아차리고 기타 선율 위로 목소리를 태웠다. 평소보다 조금 빠른 템포로 연주했지만 유진은 무리 없이 노래를 했다. 수가 만든 앞부분까지 모두 숙지하고 있었다.

 

처음 접하는 기타 소리에도 유진은 무리 없이 곡을 소화했다. 충분히 연습이 되어있었다는 뜻이고 이곡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떤 운명과도 같은 울림이 수에게 들려왔다. 몽과 혜신도 옆에 있었다면 좋았을 걸.

 

“우리 무대에 서게 되면 꼭 이곡을 해요.”

 

유진이 처음 보는 기타가 신기한 듯 수의 품에서 기타를 빼왔다. 그리곤 마치 처음 기타를 다루는 사람처럼 조심조심 코드를 잡고 줄을 울렸다.

 

“그래. 이 어쿠스틱 버전이면 좋겠어.”

 

유진의 말에 문득 생각난 듯 수가 다시 기타를 빼앗았다.

 

“이 기타는 클레멘트를 연주할 때만 쓸 겁니다.”

 

장남감을 뺏긴 아이처럼 유진이 입을 씰룩거렸다. 수는 미소를 지으며 마틴을 하드 케이스 속에 집어넣었다.

 

최초의 공연 장소는 밴드 멤버들은 물론이고 이사인 드뷔시까지도 예상하지 못했다. 유진의 강력한 주장이 있었다. 홍대도 강남도 아니었다. 그와 함께 갔던 섬이었다.

유진은 거기서 시작하면 그 다음 공연도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모든 멤버들이 다 그렇지만 특히 보컬의 육체적 심리적 상태는 가장 민감하게 배려되어야 했다.

 

나쁠 것 없어.

어차피 뭘 얻어 보려고 한 건 아니잖아.

그냥 흘러가 보자고.

 

몽이 눈웃음을 치며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누구도 반대할 이유는 없었지만 다들 이유가 궁금하긴 했다. 그 자리에서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각자 어떤 계기로 유진에게서 그 이유를 듣게 될 것이다. 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공연일정과 형식 등이 구체적으로 잡혔다. 광고 에이전시에는 통보되지 않은 채 진행되었다. 오로지 드뷔시의 책임 아래 그의 직속 팀이 행사를 관할했다. 관할이라 해보았자 무대에 입을 의상과 간단한 비주얼 컨셉과 아이디어였다. 연습은 한 달 뒤를 향해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어쩌면 한 달 뒤의 섬은 단 한번 밖에 없을 지도 모를 놀이터가 될지 몰랐다.

“밴드 이름이 뭔데?”

 

수로부터 앞으로의 대략적인 계획을 들은 이지로는 회의실의 환풍기 스위치를 올리고 담배를 한 대 물었다. 그리곤 곧바로 돌직구를 날렸다. 그러고 보니 밴드 이름은 정해지지 않았다. 드뷔시의 추천으로 강력한 후보명이 있었지만 유진의 반대로 기각되어 있는 상태였다. 수가 한 방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자 이지로가 원투 스레이트를 날리기 시작했다.

 

“뭔, 밴드 시작이 그러냐. 뭐 하나 똑 부러지는 것도 없고 그나저나 뭐 독특한 컨셉 같은 건 있냐? 그래도 명색이 광고쟁이가 하나 끼었으면 뭔가 관객과 통할 포인트 정도는 생각했을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 그런 컨셉도 포인트도 전략도 없었다. 머릿속엔 유진을 비롯한 넷의 이미지가 선명했지만 모 광고에서 나오는 카피처럼, 말로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지로가 비어있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찍으며 마지막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저 자리, 앞으로 한 달 안에 채울 작정이야.”

 

수는 그저 빙그레 웃었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쉬움도 없었다. 지금 자신의 내부에서 불편한 감정이 조금도 올라오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이지로가 다시 새 담배를 물었다.

 

“그거 마치고 돌아오면 저 자리는 없을지 몰라. 그래도 만약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면 일단 여기로 와봐. 그때 저 자리에 누군가가 앉아서 일하고 있다면 나도 어쩔 수는 없지만.”

이지로는 반쯤 태우다 만 담배를 비벼 끄고는 수를 데리고 거리로 나왔다. 오랜만에 낮술이 먹고 싶다고는 어느 막걸리 집으로 갔다. 와인잔이 나오는 그런 퓨전식 업소는 아니었다. 강남 한복판에서도 약간의 그늘만 있으면 편안하고 기분 좋은 술집들이 버섯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이지로는 잘 나가는 곳도 잘 알았지만 그렇게 잘나가지 않는 곳처럼 보이는, 사실은 더 잘나가는 곳까지 알고 있었다. 미워할 수 없는 인간이었다.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터를 잡고 장사했음직한 할머니가 막걸리 두 병을 내 왔다. 그리곤 창가의 가스불 앞에서 부지런히 부치던 전을 마저 부쳐냈다. 막걸리 한 되를 마시고도 둘은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오래된 브라운관 TV에서 나오는 케이블 방송사의 뉴스를 보며 술을 마시고 담배피고 다시 마시고 담배피기만 반복했다. 막걸리가 모두 떨어지자 이지로는 대리 운전을 불렀다.

 

“하긴 그래. 그 나이에 밴드를 시작하는 것도 그렇지만 무슨 밴드가 만화에서처럼 짜잔하고 등장하는 건 더 우스운 거야. 그러니까 니들은 지금 음악으로 픽업된 게 아니라 비주얼로 픽업된 거잖아. 순수한 이상으로 뭉쳐진 밴드라면 분명 이랬겠지. 우린 음악을 승부하겠어. 하지만 어차피 현실은 이런 거야.”

 

이지로는 마치 모든 걸 다 안다는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담배를 피우고 빈 담배 갑을 구겼다. 그리곤 일어섰다.

 

“거기서부터 들어가라. 어떤 회사의 브랜드 홍보로 이용되든, 비주얼로 오디션을 봤든,

그냥 거기서부터 들어가면 되는 거야. 진짜 중요한 건, 알잖아. 할리데이비슨을 생각하라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리운전 기사가 왔다. 벌건 대낮에 이지로는 자신의 BMW 키를 대리운전기사에 맡기고 사라졌다. 수는 거리를 걸었다. 길을 걸으며 이발을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 창 너머에 세워진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쳐다보는 인쇄 광고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지로와 함께 무릎을 치며 좋아했던 할리데이비슨 광고의 카피를 떠올리며 빙그레 웃었다.

   

 

I'll do it someday.

Monday, Tuesday, Wednesday, Thursday, Friday, Saturday, Sunday.

But there is no Some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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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뮤즈의 아이들

 

 

Eugenie, Clement

 

 

 

 

 

 

1

 

이지로의 아이언 스윙은 간결했다. 배가 좀 나오긴 했지만 몸매에 비해 폼은 그럴 듯 했다. 분명 정식 렛슨을 받았을 것이다. 스코어가 덜 나오는 한이 있더라도 폼만큼은 아름다워야 한다. 누군가의 골프 철학처럼 이지로의 생각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매번 날아가는 공은 비슷한 포물선을 그리며 그물 벽에 붙여놓은 타겟 주위를 맞혔다. 녹색의 그물로 둘러 쌓인 골프 연습장에서 스윙을 하고 있는 건 이지로밖에 없었다. 뒷좌석에 앉아서 구경하는 이도 수 혼자였다. 강남 한 복판에 숨구멍을 뚫어놓은 듯 했다. 그런대로 공기는 상쾌했고 바람도 시원했다.

 

바람이 불자 수는 어떤 냄새에 민감해지는 걸 느꼈다. 이지로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 신경이 쓰였다. 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지하실 냄새가 온몸에 배어있는 것부터가 그랬다. 골프장도 아닌 연습장에서 조차 아래 위 골프복은 물론 벨트와 모자까지 차려입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본적으로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란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 뭔가를 준비해야했다.

 

마치 자신의 실력을 시위하듯 말없이 수 십 개의 공을 때려낸 이지로가 땀을 닦으며 수를 향해 다가왔다. 주위를 한 번 살핀 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언제까지 그거 할 거냐?”

 

“글쎄요.”

 

수는 별 다른 말이 생각나질 않았다.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도 있었고 ‘그거’라고 지칭한 이지로의 표현이 거슬렸다.

 

“뭔가가 끝났다면 뭔가를 시작해야 하잖아.”

 

이지로는 수에게 있어 뭔가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라는 이야기였다. 순간 수는 두 우주가 평행하게 나아갈 뿐 앞으로도 영원히 닿는 접점이 없을 거란 직감이 들었다. 이지로의 두 번째 문장이 더 할 말을 없게 만들었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고층건물들 사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골프를 쳐보니까 이제야 좀 알겠더라구.”

 

수의 이야기가 없자 곧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 점은 이 남자를 미워할 수 없게끔 했다. 타인에게 반드시 들어야할 이야기도 없고 꼭 해줘야할 이야기도 없는 것이다. 그런 쿨함이 수는 좋았다.

 

“힘을 빼라고 하지. 모든 스포츠가 다 그런 거지만.”

이지로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후 담배를 물었다.

 

“처음부터 힘을 빼려고 했지. 그게 될 리가 없었어. 힘을 뺀다는 건 처음부터 힘을 주지 않는 것이 아닌 거야. 처음엔 엄청 힘을 들이지. 아니, 힘을 줘야 해. 연습하고 나면 어깨랑 팔이랑 손바닥이 모두 엉망이 되지. 그러다 조금씩 흐름을 익히게 되면 거기서부터 필요 없는 힘들을 조금씩 덜어내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새 꼭 필요한 힘만 남게 되는 거지.”

수는 이지로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다음 경쟁 피티는 꼭 필요한 힘만 남을 거예요.”

 

이지로가 기분 좋게 연기를 내뿜었다.

 

“글쎄다. 힘이 빠져가는 건지. 아니면 아예 힘줄이 끊어져 버린 건지.”

 

담배를 비벼끈 이지로는 휴대폰을 한 번 확인하곤 자신의 골프 클럽들을 챙겼다. 골프백엔BMW가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락커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는 이지로의 힘 빠진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뭔가 할 말이 생각이 났지만 꺼내 놓지는 않았다. 둘은 연습장을 나와 근처의 호프집으로 간 후 맥주를 두 잔씩 마셨고 2차 없이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졌다.

 

지하실로 내려오자 아무도 없었다.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지로 앞에서 의식되던 미세한 냄새가 한층 더 또렷해졌다. 그 냄새를 확연히 인지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방금 강남을 다녀온 뒤로 이 공간은 한층 낯설게 다가왔다. 수는 문득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보았다. 회사를 다니던 시절과 비교해 피부는 창백해졌고 살도 많이 빠져보였다. 영양 상태도 썩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했다. 유진도 몽도 나처럼 매일 이 거울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지금 넌 뭐하고 있니?’

 

거울 뒤에서 딱히 누구라고 지칭할 수 없는 집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중엔 분명 이지로의 목소리도 있었다. 딱히 뭘 하고 있는지 말할 거리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건 불가능하겠죠?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할 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해요.

그 다음에야 뭔가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생각해보니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몇일 동안 기타를 잡지도 않았고 특별히 음악을 듣지도 않았고 일도 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은 가벼웠다. 처음 이곳에서 가벼움을 느낀 그날 이후로 그 가벼움이 쉬이 가시질 않았다. 아니, 점점 더 가벼워지고 있는 지도 몰랐다.

2

 

30층.

 

이렇게 높은 곳까지 이렇게 빠른 속도로, 유진은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앨리베이터 속에서 유진은 빠른 속도로 혈압이 상승하는 것을 느꼈다. 높은 산을 자신의 발로 오른 적은 있었어도 타자의 힘으로 밀어 올려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38층에서 문이 열리고 유진이 발을 내딛자 폭신한 카펫 감촉이 느껴졌다. 비서는 곧 유진을 알아보고 소파에서 잠시 기다리기를 권했다. 사무실 문 틈 사이로 미세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귀에 들릴 듯 말 듯한 음악은 클래식 음악 같기도 했고 재즈 같기도 했다. 유진은 자신이 음악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휘휘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비서의 안내로 유진은 방에 들어섰다. 하얀 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3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두 팔을 벌리며 유진을 맞았다. 가볍게 남자의 손을 쥐며 유진은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삭발을 한 듯 짧은 머리, 턱과 코밑과 볼을 덮은 짙은 갈색 수염이 하얀 얼굴 위에 강렬한 라인을 그리고 있었다. 서양인의 체구였지만 눈빛은 어쩐지 동양인 같아 신비로운 인상을 주었다. 그는 어눌하긴 했지만 또렷한 한국어로 말했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다.

 

간단한 회사와 자신에 관한 소개만 했을 뿐인데, 유진은 단박에 이 남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음을 알아챘다. 회사생활을 하며 몸으로 체득한 기술이었다. 그것은 바람기와는 상관없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들켜버리고 마는 순진함 같은 것이 있었다. 상대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확신하자 훨씬 마음이 편해졌다. 당돌한 질문도 무리 없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저에게 원하는 게 뭐죠?”

 

유진이 남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금방 얼굴이 붉어지고 눈을 다른 곳에 두려했다. 갑자기 고개를 돌린 남자는 순간 프랑스어로 자신에게 뭔가를 타이르듯 이야기하면서 이내 자세를 고쳐 잡고 유진을 쳐다보았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요. 내 머릿속엔 트리니티의 제품을 좋아하는 한 여자가 산다. 아주 구체적으로 그 여자를 그리고 있지요. 그래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었을 땐, 전 그 사람에게 그 옷을 먼저 입혀 봐요. 그리고 반응을 물어보죠.”

 

“재밌네요.”

 

유진의 대꾸에 남자는 한층 더 힘을 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상상하다 보니 뭐랄까. 그 여자 말고도 항상 우리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떠올라요. 뭐라고 해야 되지. 상상 속의 팬들? 그냥 돈과는 상관없이 우리 제품과 코드가 맞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그냥 우리 제품을 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들. 그런데 당신도 그렇지 않을까요?”

 

유진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당신에게도 상상 속의 팬이 있지 않나요? 당신의 목소리를 사랑해주고 무조건 응원해 주는 가령 콘서트를 열면 맨 앞줄에 나와서 당신을 응원할 그런 타입의 사람들이요.”

 

아직 정식 무대에 서보지 않은 유진이었지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나와 코드가 비슷하거나 나의 코드를 이해해줄 그런 사람들. 함께 노래를 불렀던 그와 수와 몽과 혜신, 섬에서 본 일본인 아줌마들. 그리고 거리에서 만난 기타리스트. 그런 사람들이 떠올랐다.

 

“전 생각했어요. 우리제품을 좋아할 사람들과 당신의 노래를 좋아할 사람들이 어쩌면 아주 비슷할 거라고요. 내 생각이 맞다면 우리가 상상한 팬들을 위해 우리는 비주얼을 제공하고 당신들은 오디오를 제공하는 셈이죠.”

 

“왜 하필 우리들인가요? 우리의 음악을 들어본 것도 아니고 인지도가 높은 가수도 많은데요. 그들을 쓰는 게 훨씬 더 안정적이지 않나? 더구나 이 브랜드의 메인 모델도 정해진 거고요.”

 

유진의 질문에 남자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당신은 혹시 소리를 듣고 형상을 그리기도 하나요? 아마 음악을 하는 분이니까 그렇겠지요. 저는 형상을 보면 그 안에 잠재된 소리가 들립니다. 뮤직 비디오를 보면서 저는 제 감각에 확신을 가졌어요. 제가 제안하는 건 일종의 실험이라고 보면 됩니다. 과연 내 감각이 맞을지 아니면 에이전시가 제시하는 확률과 통계가 맞을지.”

 

남자가 이어서 이야기의 본론을 제시했다. 회사 측에서 의상은 물론이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무대를 꾸며주겠다는 것이다. 물론 대형 공연도 아니고 세밀하게 기획된 이벤트도 아니었다. 게릴라식으로 진행하는 대신 자유롭게 노래할 기회를 주고 회사에서는 라이브한 반응을 살피겠다는 것이었다. 정식 광고대행사가 제시한 전략과 상반되어 있기에 본사의 이사로 있는 이 남자의 단독 판단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 남자의 말대로 실험 정도일 것이다.

 

유진은 회사를 나오면서 제일 먼저 몽을 그리고 수와 혜신을 차례로 떠올렸다. 자신의 판단과 비슷할 거라 생각은 했지만 정확히 그들의 생각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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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건 B급이 되어야한다.

 

너무 좋아서 A급이 되면 안 된다. 가슴 속엔 A가 되고 싶지만 결코 표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지로는 종종 역적의 무리처럼 자신에게 일감을 주는 ‘갑’들을 향해 칼을 꺼내들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갑과 을을 떠나 회사 대 회사로 맞붙는 기회는 짜릿했지만 결과가 나쁘면 타격도 컸다. 한 번 칼을 뽑아서 실패했다면 그 칼은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음 기회를 도모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엔 이지로도 뽑은 칼을 쉽게 거두지 못했다.

 

1시간쯤 지나자 낮술에 취한 이지로가 다시 회사로 들어갔다. 내일 들어가기로한 시안 광고 제작물에 대한 최종 컨펌을 위해서였다. 간단히 컨펌을 마친 이지로는 다시 술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기다리게 했던 수를 보며 실실 웃더니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광고는 분노로 하는 거야. 그렇지?”

 

이지로는 낄낄대며 술잔을 비웠다. 수는 잠자코 바라보았다. 증오하는 상대를 위해 억지로 일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비로소 증오하는 상대의 멱살을 잡았다가 다시 손을 놓고 머리를 숙여야 하는 기분은 또 어떨까?

 

‘난 시간을 정해 놓고 아이디어를 내지. 길어야 3시간. 딱 3시간만 하고 털어버리는 거야.’

 

이지로의 말들이 떠올랐다. 이지로는 그들이 미웠을 것이다. 자신이 내놓은 아이디어들이 손쉽게 보여 지고 별 생각 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것들에 분노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에겐 딱 3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이상 자신의 것을 내놓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이번 피티 건에 이지로는 오롯이 30일을 쏟아 부었다. 그건 오롯이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지로는 마시고 또 마셨다. 수도 마실 수 있는 만큼 따라 마셨다. 그날도 역시 2차는 없을 터였다. 이지로가 비틀거리며 술집을 나오면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BMW 7시리즈 한 대가 수와 이지로 앞에 섰다. 돈을 좀 벌었다는 건 알았지만 왜 이토록 대형차량이란 말인가.

 

이지로와 수는 뒷자리에 앉았다. 대리 운전기사는 둘을 태우고 이지로의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언젠가 이지로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가 어느 부잣집의 운전기사로 일했다고. 아마도 이 중고 BMW는 그런 목적으로 구입했을 것이다.

아버지를 뒷좌석에 모시고 시내를 질주하기 위해. 그렇게 자신 혹은 아비에게 응어리진 것을 풀어버리기 위해 이지로는 거침없이 돈을 썼을 것이다. 비록 악마에게 꾸어온 돈이기 했지만 이지로에게 돈은 그런 의미였다.

 

최근 들어 그가 많이 약해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사적인 대화도 없었고 무너진 자신을 함부로 드러내지도 않았다. 수를 곁에 두고 싶으면서도 무리하게 그를 당겨서 옆에 두려고 하지 않았다. 오늘도 2차는 없었다. 가까운 지하철 역 앞에서 수를 내려주고 이지로는 BMW는 어디론가를 향해 떠났다.

 

 

 

잔뜩 술이 취해 돌아온 수를 유심이 보던 유진이 물었다.

 

“커피 좀 마실래? 녹차 마실래?”

수가 대꾸 없이 일방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불안하지 않아? 이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간을 끝내버릴 수 있는 기회인데.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말이야 세상을 이런 식으로 생각해. 가령 수직선 위에 서서 오늘은 이만큼 달려왔다. 그리고 남은 끝을 가늠하며 또 생각해. 이제 이만큼 남았구나.

우리 같은 인간들은 어쩌면, 끝없이 나아가가지만 제자리로 돌아오는 원과도 같은 거 아닐까? 그것은 바깥세상의 기준으로 본다면 끝없는 삽질이겠지만. 똑같은 회전은 횟수가 더해져도 무의미하다고 하겠지.

그런데 말이야. 매번의 회전은 그때마다 다른 질감인거야.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거야.

그러니까. 원을 그릴 것인가. 선을 그을 것인가. 그게 문제겠지?“

 

수가 유진을 바라봤다. 유진도 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유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하다 입을 열었다.

 

“수. 커피를 마실래? 차를 마실래?”

 

8

 

달라진 건 없었다.

 

수의 말대로 그저 다시 한 바퀴를 더 돈 것과 같았다. 한바탕 촬영이 끝나고 노동으로 들어온 돈으로 조금 더 잘 먹었고 악기를 손봐줬고 연습실을 보수했다. 각자 벌이를 위해 일을 했고 남은 시간은 모여서 음악으로 놀았다. 하지만 수의 말대로 다시 한 바퀴를 도는 동안 각자의 질감은 미묘하게 변해갔다.

 

유진은 음악에 대한 몰입이 강해졌다. 오기와 악으로 버티던 지난 모습과는 달리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움이 더해졌다. 목소리는 무조건 강하지 않았고 강과 약을 구사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과 몸짓과 목소리는 점점 더 미침에 가까워져 갔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는 듯 보였지만 멤버들이 내는 소리에 더 예민해졌고 함께 녹아들어갔다.

 

수는 유진을 보며 깨달았다. 크게 지르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많이 노출함으로서 미침을 완성할 수는 없다는 것을. 오로지 자신의 근원을 건드림으로써 진정한 미침이 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카메라 앞에 선 이후로 그녀의 음악에서 관능이 일었다. 예전에 지녔던 관능은 사실 음악과는 별개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걷거나 앉아있거나 말할 때나 발견되었던 것이지 결코 음악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이제 그녀의 매력이 자연스럽게 음악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기한 것은 노래 부를 때 드러나는 관능은 상대를 자극하는 욕망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그런 순수한 관능은 수뿐만 아니라 연주하는 다른 멤버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가끔 유진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고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녀의 가슴에 시선을 두거나 유진이 없는 곳에서 그 사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이지로가 제작한 광고영상은 오래지 않아 인터넷에 화제의 영상으로 떠올랐다.

인터넷 댓글엔 유진에 대해 갖가지 소문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메이저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준비한 신인이라는 소리도 있었다.

 

유진에게도 은밀한 제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몇 트랜드에 민감한 광고주들은 공식 광고대행사로 모델에 관해 문의했지만 그쪽에선 유진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광고대행사는 자신이 개입하지 않은 건에 대해선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지로쪽에서도 영상의 소유권을 판 이후엔 전혀 협조가 없었다. 유진에 관한 소문만 커졌다.

 

유진 쪽으로 직접 접촉을 시도하는 곳도 있었다. 대부분 모델계약을 하거나 전속계약을 하자는 것이었다. 유진은 실제로 그들과 만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건 모호한 조건이었다. 몇 년이든 몇 달이든 트레이닝을 거쳐 앞으로의 진출 방향을 모색하자는 것이었다. 유진은 그것으로 그들과의 접촉을 끝냈다. 음악이 아니라면 그녀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즈음 그녀의 이름은 인터넷의 검색어 순위에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의 동영상은 곧 내려졌다. 피티를 따낸 광고대행사에선 국내 톱 모델을 써서 장기 광고 캠페인을 계획 중이었다. 그 틈에 끼어든 유진의 동영상은 향후 광고홍보 전략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주장이었다. 그건 그들이 장기간에 걸쳐 받아낼 막대한 수수료를 삭감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메인 모델은 하나로 가야합니다.”

 

광고대행사의 집요한 주장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물론 그 주장이 이국 브랜드를 이 나라의 시장에 안착시키는 답이 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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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들 전원의 의견은 일치했다. ‘러브 풀(Love fool)’만큼 어울리는 곡은 없다고.

곡을 고르고 부르고 연주하는 건 모두 아이들의 차지였다. 그다음의 일에 대한 결정권은 모두 그들의 차치가 될 것이지만.

 

기본적인 스토리 보드가 주어지고 간단히 회의를 한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갔다. 유진은 계속해서 카디건스의 '러브 풀(Love fool)'을 불렀다. 비록 유진이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면 나머지 멤버들이 연주하는 전형적인 뮤직 비디오였지만. 카메라 안에서 발견되는 유진은 각기 다른 유진이었다.

 

감독은 여러 가지 포즈와 컨셉을 주문했고 유진은 적극적으로 따랐다. 몇 분 안되는 뮤직비디오에 저렇게나 많은 이미지 컨셉이 필요할까, 수는 의아했다. 섹시한 스타일에서 귀여운 스타일, 캐주얼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스타일, 심지어 프레피룩까지, 저녁 무렵 시작된 촬영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도 유진은 부담스러워하거나 지쳐가기는커녕, 오히려 감독이 유진의 뜻대로 움직여주는 것 같았다.

 

수는 촬영 도중 틈틈이 모니터 비디오 화면을 훔쳐봤다. 대부분 유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풋티지엔 유진의 시각적인 매력만 존재했다. 아침 무렵 메인 컷과 러프하게 편집된 영상물을 보면 그녀가 불렀던 노래는 소거되어 그녀의 음색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수는 지금껏 소리를 동반하지 않은 유진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또한 그녀의 목소리만 따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좋은 목소리이며 매력적인 톤이다. 하지만 그것이 늘 시각적인 매력과 함께였기에 배가 되었던 건 아닐까. 마치 절반만 존재하는 유진을 보는 것 같아 약간 기괴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느낌은 오로지 수에게만 있었을 것이다. 감독과 이지로 모두 결과물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의구심보다 확신이 필요했다. 확신이 들지 않으면 없던 확신을 만들어서라도 가져야했다. 촬영 후 이틀이 지나자 감독은 이지로와 수 그리고 사원들이 있는 곳에서 간단한 시사회를 가졌다. 최종 결과물을 확인한 이지로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처음 유진을 보았을 때의 확신은 틀림이 없다고. 다만 그곳에 유진은 없었으므로 유진이 동의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피티는 이지로의 확신의 찬 목소리로 진행되었다. 시종일관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지로가 소구하는 방향은 한 가지였다. 구구절절한 메시지가 아닌 감각에 호소하라. 그리고 그 감각의 결정체는 한 편의 뮤직비디오였고 무엇보다 유진이었다.

 

이지로의 목소리가 멈추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지로가 스텝에게 손짓을 하자 대형 스크린에 뮤직 비디오가 펼쳐졌다. 수는 뮤직 비디오가 흐르는 내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감독은 하얀 배경을 뒤에다 두고 밴드가 연주하는 모습을 메인으로 찍었고 유진의 단독샷 을 집중적으로 찍었었다. 실제로 완성된 작품은 현란한 편집과 효과가 들어가 있어서 원래의 거친 소스의 흔적은 볼 수가 없었다. 거기엔 다양한 광고주의 제품들과 유진의 스타일이 매치되어 있었다. 가끔 혜신도 들어가 있었고 그것보다 더 적게 몽과 수도 표현이 되어있었다.

 

수는 한 번도 그렇게 다양한 스타일로 연출된 유진을 본 적이 없었다. 지금껏 접했던 그녀의 모습은 청바지나 단출한 의상이 전부였기에 비디오 속의 그녀의 모습은 믿기질 않았다. 확실히 그녀에겐 압도하는 매력이 있었다. 신체적으로도 가슴이 크고 다소 굵은 허벅지와 대비되는 가는 목선과 허리, 다리가 그랬고 카메라를 쳐다보는 눈빛도 그랬다.

 

하지만 수가 확신하는 그녀의 결정적인 매력은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멤버들의 소리도 유진의 목소리는 없었다. 수와 친구들이 담당한 것은 오로지 시각의 영역이었고 음악은 원곡이 처음부터 끝까지 더빙되었다. 마치 새로운 버전의 뮤직비디오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들어보지 못한 소리를 사람들이 궁금해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에겐 자신들의 제품을 바탕으로 펼쳐진 매력적인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이정도면 성공적이야."

 

피티장을 나서며 이지로가 말했다. 드라마에서처럼 기립박수를 치는 모습 따윈 없었다. 그저 묵묵히 들었고 끝나는 순간 형식적인 박수가 이어졌다. 다만 화면을 보던 광고주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에 만족할 뿐이었다.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짧은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지자 광고주의 유일한 질문은 하나였다.

 

“저 메인 모델은 신인 연기자입니까?”

 

7

 

이지로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피티는 실패로 끝났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술집으로 호출하는 이지로를 수는 피하고 싶었다. 어쩐지 평소와는 다르게 많이 망가졌을 거란, 그래서 보기 힘든 모습들이 펼쳐지지 않을까? 수는 내심 불안한 마음을 안고 강남으로 갔다. 피티의 승자는 참여했던 두 개의 메이저급 대행사 중 하나였다. 일반적인 의류광고의 전형을 제시했다고 한다. 또한 한 회사가 상당한 커미션을 뒤로 제안하는 바람에 광고의 퀄리티와는 상관없는 쪽으로 승패가 갈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광고주의 실권자가 대행사의 사장과 같은 학교 동창이란 소문도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인건 완벽한 실패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티가 끝난 뒤 임원진과 실무진의 반응이 엇갈렸다고 했다. 임원진들은 메이저 대행사에 표를 몰아주었고 실무진들은 이지로 쪽에 손을 들어주었다. 피티 결과가 발표된 직후 한 가지 제안이 있었다. 이지로 측에서 제작한 풋티지를 인터넷 등에서 동영상 마켓팅으로 쓰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물은 이지로의 ‘비 크리에이티브’가 아닌 광고주의 이름을 달고 나가야 했다. 이지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 이번 건은 자신의 승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지저분한 거래가 있었다면 그것 역시도 진작에 알지 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는 것이다.

 

“일은 계속 되어야한다.”

 

그 와중에서도 이지로는 한 손에 술잔을 한 손에 전화기를 들고 타 광고주들을 위한 시안 제작을 사원들에게 지시했다. 전화를 끊고 이지로는 술을 마시고 줄담배를 피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일은 계속 되어야하지. 자존심이야 어떻던. 그나마 들어간 돈을 뽑아낼 수 있는 건 천만다행한 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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