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썹 그리고 혜신

 

 

 

 

Elliott Smith,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

Guns N‘ Roses, November Rain

Stone Temple Pilot, Down

Slipknot, Duality

 

 

 

   

 

   1

 

방에서 보내는 하루는 빨리 지나갔다. 온전히 하루로 느껴지던 시간은 이틀 분을 보내서야 하루치만큼 느껴졌다. 퇴사 후 꼬박 일주일을 집안에서 보내기도 했다. 수는 한동안 TV만 보았다. 수십 개의 채널을 리모컨으로 재핑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도 있었고 드라마도 있었지만 대부분 뉴스나 시사에 관한 것들을 보았다. 재밌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걸 보는 이유는 어떤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세상을 어떻게 봐야할지 그런 걸 배운 적도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경제와 정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 특히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에선 훨씬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격앙되어있었고 현실은 온통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 문제들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혹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며, 그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질타했다.

수는 아이팟으로 팟캐스트도 들었다. 거기에서도 TV와 마찬가지로 격앙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엔 TV에서 질타를 당하던 대상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역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반대생각을 가진 이들을 질타했다.

수가 느낀 불안감은 그 어느 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했지만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깊이는 너무나 얕았다. 그렇게 몇일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이 지겨워지면 사람들이 만든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다가 문득 불안해지면 다시 TV나 아이팟으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쪽은 결론을 내고 규정을 내리며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또 누구인지를 분명히 가르는 소리였다. 한쪽은 결론도 없고 규정도 없으며 도무지 우리와 우리가 포함된 모든 세상이 모르겠다고 말하는 소리였다.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수는 드디어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방에 틀어박혀 있던 한 달 동안 단지 너무 답답해 졌기에 나오는 거라고 자신에게 말했지만, 사실, 그동안 어떤 회사로부터도 연락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을 떨쳐보기 위한 거였다.

딱히 만날 친구도 지인들도 없었다. 방에서 지내던 때와 달리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더디게 갔다. 목적 없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는 것 인줄 수는 일찍이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는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의미 없는 행동이나마 하지 않으면 자신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2

 

늦은 밤 서울에서 신도시로 향하는 광역버스의 뒷자리에서 수는 앞좌석으로 향하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밀려서 버스 뒷자리로 쪽으로 걸어가던 수는 스치듯이 한 여자를 보았다. 얼굴의 반을 가린 커다란 선글라스와 곱슬곱슬한 긴 머리에 스카프를 칭칭 두른 여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잠이 들어있었다.

‘혜신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로 만난 적이 없었지만 수는 그녀가 혜신임을 직감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졸업식 날 어색하게 헤어진 후 둘은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나마 몽이 군대로 간 이후론 모든 친구들의 연락을 끊어져버렸다.

 

그동안 가수로 데뷔는 한 건인지. 서울을 벗어난 버스가 수가 사는 신도시의 초입 쪽으로 들어서자 수는 궁금함을 넘어 조바심까지 들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수는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고 혜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잠든 여자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를 옆에 앉은 여자가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주 깊은 잠에 들었음이 분명했다. 막 흔들어 깨우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며 그녀 옆에 자리를 지켰다.

잠깐 수가 밖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버스가 멈춰 섰고 혜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뒷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수도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랐다. 혜신은 스카프 자락을 휘날리며 걸었다. 치렁치렁한 치마 역시 바람에 흩날려 지나던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뭔가 유행을 앞선 것도 같고 반대로 유행에서 아주 멀어진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수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빨리 걸었다. 마침내 수의 목구멍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이혜신.”

 

길을 가던 그녀가 멈춰섰다. 천천히 몸을 돌려 수를 바라보는 그녀가 선그라스를 벗었다.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혜신은 창백한 얼굴을 가리던 치렁치렁한 머리를 쓸어올리곤 수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샷 하나 더 추가해줘.”

진한 카페모카에 샷을 하나 더 추가해달라는 혜신의 주문은 의외였다.

“요즘 계속 잠만 자서 말이야.”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내미는 동안 수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장기간 다이어트를 한 탓인지 얼굴은 놀랄 만큼 작았고 상대적으로 눈과 코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보였다. 혜신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를 잠이 덜 깬 몽롱한 눈으로 쳐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집에 오는 길인가 봐.”

수가 묻자 혜신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주 와버렸어. 집에.”

 

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기획사 소속 연습생이 칼로리 높은 카페모카를 마시고 그것도 샷까지 추가하는 건 뭔가 수상했다. 그 옛날 뻥과자를 먹고도 과식했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무엇보다 발랄하고 거침없던 기운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몸 안의 모든 피를 흡혈귀에게 받치고 돌아온 이처럼 창백했다.

“너도 집에 오는 길인가 봐.”

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커피만 마시다 이내 커피숍을 나섰다. 수는 혜신이 걷는 방향으로 한동안 걸었고 곧 헤어졌다. 전화번호만 서로 교환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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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루 종일 우리는 침대에서 서로를 보며 마지막 날을 보냈다. 오후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잠을 자다가 깨어나곤 했다. 꿈에서 나는 거친 파도 위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창을 통해 보니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고 주위의 배들이 모두 위태해 보였다. 그 중 심하게 흔들리던 배 하나가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그러더니 내가 타고 있던 배 위에서 멈춰 섰다. 마치 헬리콥터가 머리 위에 떠있는 것처럼. 나는 놀라 잠을 깼다. 여전히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일도 비가 계속 해서 내릴 거예요.

저는 정확히 정호가 되면 밖으로 나가 비를 맞을 겁니다.

그 시점을 기해서 제 몸의 모든 부분은 수용성 상태로 바뀔 겁니다.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있어요.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나는 한동안 누워 있다가 문득 그녀의 손을 이끌고 저택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새롭게 모든 곳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온갖 유치한 상상과 감정들을 그대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부모를 잃고 서러웠던 기억들과 장남감에 얽힌 온갖 상상들을 마치 소년이 된 것처럼 그녀에게 고백했다. 나는 중간중간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는 웃었다. 나는 가끔 소리 내어 웃었고 그녀는 똑같이 웃었다.

 

9

 

정오가 되었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곤 텐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 까지 보아 주세요.

제가 사라지는 장면은 극한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마지막 기쁨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당신도 나도 마지막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제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저는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당신을 생각하겠습니다.

 

그녀는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섰다. 밖은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쳤다. 나는 미끄러져 나가는 그녀의 손을 일부러 잡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가장 잘 보이는 1층 서재로 들어갔다. 세로로 긴 격자 유리창을 통해 그녀를 보았다. 아무래도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녀를 보았다. 미로의 숲까지 내려간 그녀는 미로의 입구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가 닿은 그녀의 몸은 어깨부터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끈적한 흔적이나 수증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만 했다. 다음으로 발바닥과 발목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있던 형상은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녹을 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도저히 마지막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숙여진 고개는 어떤 명령으로도 들어올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천국을 보았던 사람은

또한 지옥을 볼 확률이 높다는 것을.

 

10

 

지난 1년은 완벽한 상실의 시간이었다. 완벽하다는 것은 단 한줄기의 희망 따위도 없었단 이야기다. 그러나 예상 밖에도 지옥으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자살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고 나는 비교적 잘 먹고 잘 잤다. 다시금 그녀가 없던 삶으로 적응해 갔다.

다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낯설어 졌다. 혹시 치매의 증상은 아닐까 테스트 해보았지만 아무런 이상 징후를 찾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낯설어 지는 이곳은 어쩌면 천국와 지옥 사이에 있는 에어쿠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떠올린 적은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천국만 있고 지옥은 없다, 라고 생각했었다. 천국은 없고 지옥만 있다, 라고 생각도 했었다. 천국와 지옥이 동시에 있다, 라는 생각은 처음으로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살하겠다는 의지는 희미해졌다. 다만 기력은 예전만 못했고 먹고 마시기 위해 가정부 몇 명을 고용했고 텐트는 치워버렸다. 오후가 되면 미로의 숲에 들어가 걷기도 했다.

 

얼마 전 부터 다시는 들지 않을 것 같은 기타를 잡았다. 그것도 아랑후에스만을 연주했다.

매일 아침 아랑후에스를 연주할 때마다 음과 음 사이로 그녀의 음성이 섞여서 들렸다. 음들을 정확히 연주하는 동안 남은 감각을 모두 동원해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손가락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연주가 가능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몸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연주는 가능했다. 다만 그녀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면 되었다.

하지만 음악의 흐름이 점점 더 부드러워 질수록 그녀의 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미약해지고 가늘어졌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문득 펜을 잡았다.

 

이제,

나에게도 못한 이야기를 너에게 한다.

 

첫 문장만큼은 쉽게 썼다. 단 한 줄의 문장을 썼고 나는 만족했다. 첫 문장만 썼을 뿐인데 첫 문장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부터는 도무지 써지지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아마도 첫 번째 문장이 잘못되어서 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결코 첫 번째 문장을 지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고집이라기보다는 운명 혹은 계시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을 쓰는 일이었다.

오늘도 역시 두 번째 문장을 위해 여러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단지 짧은 순간이나마 머리가 맑아졌던 순간은 있었다. 펜을 굴리던 중 풀리지 않는 문제는 혹시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폰 슈타이크가 복수를 목적으로 그녀를 보냈던 건 아니었을 지도 몰라,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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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저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6개월 뒤에.

 

예감은 정확했다. 예상했던 것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감정은 격정으로 치달았다. 그녀와 만난 것이 이제 6개월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한 짓이라면 인간이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많은 방법들을 생각했다. 시스템을 열어서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녀를 복제해 내는 것은? 그러면 내 안에 있던 그녀에 관한 6개월의 기억도 지워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운다한들 새로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20대의 폰 슈바이크 부인을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녀의 죽음에 저항하면 할수록 그놈의 의도에 철저히 걸려들고 마는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을 더욱더 크게 만드는 것이다.

 

왜 저를 만든 이는 나의 죽음을 정확히 인식시켰을까요?

 

인간은 로봇을 통해 인간과 똑같은 상태의 불안을 재연하려고 하지.

그 불완전한 모습을 보며 오히려 위안을 받는 거야.

하지만 그는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가 되게 하기 위해,

가장 비극적인 미래를 고정시키는 것이지.

그리하여

가장 행복해야할 매 순간 매 현재를 파괴해버리는 것이지.

 

그녀는 질문을 멈추고 내가 만들어준 샐러드를 꼼꼼히 씹었다. 그녀 역시 마음은 무거웠던지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가 차갑고 둔탁했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녀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나는 그녀의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어쩌면 그녀는 소유의 목적이 아닌 소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로봇인지 몰랐다.

 

7

 

어떤 날은 가슴이 벅찼고 어떤 날은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또 어떤 날은 한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나의 내면은 그러했지만 그녀 앞에선 늘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그녀 역시 별다른 동요 없이 지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했고 나와 함께 텐트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가끔 홀로 어딘가로 사라지기도 했는데 적극적으로 그녀를 찾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움직이기도 했고 그녀는 그녀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다 마주치는 순간도 있었다. 이를테면 미로로 만들어진 정원에서 미로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와 거기서 걸어 나오는 그녀가 만나는 것이었다. 똑같은 길 위에 선 그녀를 보고, 또 그녀를 보는 나를 본 순간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너는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구나.

나는 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말이야.

도저히.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당신은 인간이에요. 인간에겐 자유가 있습니다.

제가 사라진다고 해도,

사라진 저를 두고 살아갈 자유가 있는 거예요.

 

이번엔 그녀가 나의 볼을 어루만졌다. 소녀와 같은 앳된 손길에서 어머니와 같은 모성이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품에서 울었다.

 

언제까지 미래에 의해 현재를 희생당해야 할까요?

물론 내일의 필연을, 고통을 저도 당신만큼 강하게 느끼고는 있어요.

동시에 지금, 당신과 함께 보내는 황홀함도 함께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부탁할게요.

훨씬 더 강력하게

지금에.

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주세요.

저도 저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이 시간에 집중할게요.

 

그건 사람이 할 말이지.

로봇이 할 말이 아니구나.

 

나는 울컥울컥 솟구치는 울음을 누르다가 허탈함에 웃고 말았다.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미로 속에서 동요하는 생명은 나밖에 없었다. 미로를 이루고 있는 낮은 나무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8

 

그녀가 사라지기 일주일 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폰 슈바이크에 복수에 대처하는 카운터 어택은 그녀와의 이 순간을 완벽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슬픔과 행복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 행복한 순간만 취해내는 것이다. 그녀를 살릴 수 있는 1퍼센트의 확률을 내려놓고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100퍼센트의 확률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녀가 죽기로 예정된 하루 전날이 밝았다. 잠의 세계에선 온갖 생각들이 혼미하여 잠을 깨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의미가 될지 모르는 순간에 어떻게 이렇든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지 잠을 자면서도 의아했다.

정오가 훨씬 지나서 눈을 떴을 땐 그녀가 옆에 있었다. 나를 깨우지도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질 않았다. 똑같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나를 안정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것일까? 함께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물끄러니 쳐다보는 그녀를 힘껏 안았다. 그녀의 몸 어느 구석에도 로봇의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육체를 통해 나와 똑같은 슬픔과 유한함에 대한 탄식을 들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고 말했다.

 

두려움을 아는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을 아는가?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이겠지요.

 

나와 똑같은 당신을

이미 제가 갖고 있으니까

당신도 더 이상 당신만의 당신은 아니겠지요.

 

과연 로봇에겐 추억이란 게 있을까?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로봇도 인간과 동일한 기억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언제든 소환하여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로봇은 날카롭게 현실에 깨어있었다. 로봇은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움직였다.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에 가까웠다. 저항하고픈 의지가 없진 않았으나 단순히 저항함에만 이끌리지 않았다.

지금 행위를 하면서 그전에 했던 행위와 다음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인간이 범한 오류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한 오류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로봇에게 있어 치명적인 부자유, 이미 누군가의 명령과 의지로 만들어진 확연하고도 유한한 존재라는 것에 로봇은 조금도 거부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의 존재에 끊임없이 회의하는 건 결국 인간 밖에는 없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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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와 그녀는 저택을 나서 아침 숲길을 산책했다. 별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꽃과 나무들을 관찰했고 나는 그녀를 관찰했다. 내 마음 속의 혼돈과는 별도로 우리 들 사이엔 묵직한 평화로움이 있었다. 똑같은 사람이란 생각보다 한쪽이 로봇이란 생각에 오히려 그런 안정감은 깊었고 심지어 위안이 되기도 했다. 산책에서 돌아온 뒤 시장에서 구해온 야채와 재료들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녀가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무렵 나는 조용히 내 작업실로 가서 기타와 몇 가지 장비들을 챙겨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인간들이 자연적인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이란 신호로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아날로그의 가치는 몰락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더한 분야도 있었다. 이를테면 예술이 그러했다. 음악 쪽으론 모든 악기 연주자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 높은 대우를 받았고 특히 기타와 같은 현악기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예를 들어 피아노 건반의 음들이 디지털과 유사하여 각 음들이 끊어지는 반면 현악기들은 실로 음과 음 사이, 줄과 프렛 사이의 미묘한 변화들이 존재했다. 줄의 밀어 올리거나 손가락을 줄을 망치 때리듯이 때리는 주법을 통해 결코 수치적으로 계산할 하기 힘든 음의 변화는 아직도 인간만이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한 찰나의 변화는 시간이 흘러도 인간의 영역에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내 머리에 간단한 센서와 수신기를 달았다. 나는 로봇 기술자가 아니었으므로 최신 장비는 없었고 수 십 년 전에 썼던 간단한 테스트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서로가 의식체계에서 발생하는 신호들을 감지하고 비교하며 때론 한쪽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다른 쪽으로 전달하게 하는 기능이 있을 뿐이었다. 요즘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그런 기능을 발휘한다고 들었지만 이 테스터는 오로지 로봇과 로봇, 혹은 인간과 로봇 간에만 가능했다. 이 기계가 잘 작동한다면 그녀가 로봇이란 것은 확연한 사실로 입증되는 셈이다. 나는 인간임에 분명했으므로.

 

나는 내 머릿 속에 있는 정보를 통해 그녀의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게 할 목적으로 기계를 세팅했다. 간단한 세팅이 끝난 후 나는 나의 기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처음 기타를 만져보는 그녀는 어색하게 기타를 받아서 안았다.

가냘픈 어깨와 쇄골, 두께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팔뚝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라인, 부서질 것 같은 하얀 손가락, 어디를 쳐다보는 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초록빛 눈동자를 보면 한 번도 기타를 쳐보지 않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나는 곧 스위치를 올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무리없이 나의 뇌가 보내는 신호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을 떠올렸다. 그리고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여 기타를 치는 상상을 했다. 감은 눈 때문에 더욱 예민해진 귀로 기타연주가 들려왔다.

강렬하면서도 애잔한 첫 마디의 선율이 들리자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토했다. 분명 그녀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리일진데 그것은 확실히 내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감정과 육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할 때 만들어지는 한 마디였다. 순수한 사랑의 감정, 신비로운 기분, 치욕스럽고 혐오스런 심정이 뒤섞였기 때문일까? 빠르게 이어지는 음들에선 젊은 시절의 미세한 미숙함이 스며있었고 느리고 강한 음들에선 감정의 폭만큼 소리도 흔들렸다. 똑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에게 똑같은 악보와 기타가 주어져도 오로지 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두 존재가 합쳐져 한 존재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수증기처람 피어오르는 생각을 가만가만 눌러 가며 연주에 집중했다. 도무지 눈을 뜰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내 손가락은 멈춰있었지만 동시에 나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사고와 회한은 내 정신 속에만 있었지만 동시에 기타를 통해 공기 밖으로 흘러나오고도 있었다.

정말로 그녀와 나는 완벽한 하나였다. 그 사실이 선율을 통해 매순간 입증 될 때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완벽한 환희이기도 한 동시에 가장 완벽한 혐오이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는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그녀의 초록 빛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다. 확실히 그것은 나의 모습이었다.

 

 

5

 

폰 슈바이크의 생각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의식 모듈을 배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방식, 즉 유전자 정보를 배양하여 인간과 똑같이 수정되어 배양되고 자라는 형태의 로봇을 만든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그대로 배양하면 복제인간이 되고 인간의 유전자의 핵심요소만 뽑아서 인공 숙주에서 재배치하면 새로운 차원의 로봇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결과는 비슷했다. 인간을 만들어 낸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그는 오래전부터 이런 시대가 올 것을 예측하고 성에 남겨둔 나의 유전자 정보를 모두 모았을 것이다. 그는 그 정보들을 디테일하게 조립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똑같이 갖춘 그녀를 만들었을 것이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녀를 키워낸 것이다.

 

그것은 곧 나였다.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존재. 그리고 어느 날 나를 찾게 되고 나를 만나게 되고 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게끔 의도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텐트 안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동안 그녀는 저택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이건만 수 만 가지 생각들에 둘러쌓여 그녀를 보지도 찾지도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혹시 나 역시도 그녀가 로봇이라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나를 돌아보면서 그때마다 결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동시에 폰 슈바이크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욕망을 숨길 수 없었다.

드디어 그녀가 텐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초췌해진 내 얼굴을 두 손을 감싸더니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둘 다 깊은 사랑에 빠져있음이 분명했고 동시에 짙은 슬픔에 물들어 있는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나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무거운 사랑과 운명을 같이 짊어지면서도 나보다 훨씬 가벼운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를 보세요.

우리를 보세요.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나도 억지로 웃었다. 슬퍼하고 분노할수록 그놈에게 지는 것이다. 나는 다시 그녀를 꼭 껴안았고 우리는 텐트 안에서 종일 누워있었다. 어디에도 나가지 않았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 역시도 나와 똑같은 위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늘 나에겐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것들이 주어졌지만 늘 몇 가지 안 되는 것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나 자신도 깊이 깨닫지는 못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가 깊이 잠이 들자 다시 생각들에 휩싸였다. 그가 걸어온 도발에 대해 나는 무엇으로 대처해야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빛에서 또다시 뭔가가 예정되어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미리 가르쳐주는 것은 명령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거의 확실히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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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폰 슈바이크는 평생 귀족으로 살기 원했다. 아마도 17세기 정도의 삶의 형태를 꿈꾸지 않았을까? 돈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었고 그는 기꺼이 그의 상상을 현실에 구현했다. 대단한 거부였던 그는 거금을 들여 자신이 기거할 성을 짓고 많은 하인과 관리인을 두었다. 그들은 고용된 인간들이 아니었다. 오로지 그의 목적을 위해 태어난 로봇들이었다.

옛 스위스 땅에 터를 잡은 그는 수 백 년 전 그의 선조의 영위했던 삶을 재현해냈다. 그는 거기에서 각종 예술 활동을 장려하고 예술가를 초청해 인간의 위대함을 증명하려했다.

그가 초청한 인간들 중엔 30대의 젊은 기타리스트였던 나도 포함되어있었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그의 성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나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연주회가 끝나면 늘 연주자들 위해 파티를 열었다. 그것도 오랜 전 시대의 방식으로.

 

혹시 여러분 중에 로봇은 없으시죠?

 

그가 매우 정중하면서도 뼈있는 농담을 던졌고 모두가 유쾌하게 웃었다. 그 당시만 해도 보통 사람의 육안으로는 로봇과 인간을 구별할 수 없는 정도가 되었다. 폰 슈바이크는 그런 완벽에 가까운 로봇들을 두고 있었지만 신념은 확신했다. 창조와 아름다움의 분야엔 결코 로봇은 들어올 수 없는 것을.

그는 그와 함께하는 로봇들을 소개했다. 그의 하인들이었고 집사였고 또한 20대의 여인이 있었다.

 

이 여인은 바로 스무 살 무렵의 제 아내를 재현한 작품이죠.

물론 제 부인을 대신할 수 없겠죠.

하지만 늘 그녀를 곁에 두면서 그녀를 추억하지요.

 

폰 슈바이크는 감회에 젖어 콧수염 만지작거렸고 왼손을 뻗어 여인에게 자기를 소개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여인은 고개를 숙여 간단히 목례를 했고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전혀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폰 슈바이크의 부인은 결혼하기 전에 본 적이 있었다. 예술에 대단한 식견을 가진 대부호의 딸이었다. 나의 연주를 듣고 깊은 상념에 빠졌던 그녀에게 나는 나도 모르게 연정을 품었던 적이 있다. 그때가 그녀가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다. 나도 폰 슈바이크도 30살 이전의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어떤 기술이 있길래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를 대하면서도 그 존재를 이미 대했던 것 같은 강렬한 확신을 갖게 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폰 슈바이크의 낭만성에 감동한 듯 보였다. 마흔 살에 그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었던 서른 살의 부인을 만났고 그녀는 10년 뒤 세상을 떠났다. 폰 슈바이크는 부인의 유전정보를 그대로 최신 로봇 기술에 적용하여 그가 만나기도 전의 여인을 완벽하게 재생한 것이다. 당연히 보통 사람들은 상상한 할 수 없는 거금을 들였을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몇몇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제 로봇은 인간과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정교해졌다. 하지만 로봇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예상외로 드물었다. 20세기에서 21세기 사이에 만들어진 영화에선 로봇과 인간이 사랑에 빠지기도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았다. 그건 이미 로봇과 인간은 동등 할 수 없는 클래스라는 자각 때문일 것이다. 수백 년 전 피부색과 출생에 따라 인간이 차별되었던 것과 같은 원리일 것이다.

 

인간이 계급체제에서 평등체제로 돌아선지 수 백 년이 지났다. 몇몇 지식인들은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이 시대를 이렇게 평가했다. 로봇은 결국 정당화된 계급체제로의 전환을 이룬 쾌거였다. 왜 쾌거냐고? 인간의 밑바닥엔 계급을 이루고 싶은 욕구, 부리고 싶은 욕구가 그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이 평등을 사랑하고 지향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다만 윤리 의식이 강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제 로봇을 통해 인간은 그 밑바닥 욕구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

 

돌이켜 보건데, 로봇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가 있었다. 육안으로 인간과 로봇을 구별하기 힘들었고 실제로 함께 오래도록 산다 해도 감수성이 예민하지 않고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 시대 상류층엔 이런 것들이 유행했다. 비싼 로봇을 구입하고선 그것들을 함부로 폭행하고 파괴하는 것, 더 나아가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는 지 확인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학대를 가하는 것. 그런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꽤 오랫동안 유행을 하기도 했다.

 

그건 사랑의 재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부인에 관한 명백한 모독입니다.

 

나는 폰 슈바이크의 젊은 부인을 보며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그것은 부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로봇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그건 전혀 다른 어떤 존재였다. 그런 생각과 감정이 어쩌면 비극의 첫 단추였는지도 모르겠다.

 

3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지만 그녀는 숄을 두른 채 대리석 상 앞에 서있었다. 나도 한동안 그녀의 뒤에 서있었고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사실은 둘 다 로봇이었지. 당시 기술은 지금처럼 자유로운 감각과 정신을 로봇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 겉은 대단히 정교했지만 속은 일일이 프로그램 모듈이 들어가야 했던 시절이야. 지금이야 어린이 로봇이 자라서 성인 로봇이 되는 것도 놀라운 일만은 아니지. 자신이 로봇인지도 모르게 키워진다고도 하잖아.

그 아이의 엄마는 폰 슈바이크가 만든 하녀 로봇이었지. 로봇 아이도 하나 딸려서 말이야. 그때 어미는 아이를 성 안에서 잃어버렸었지.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정도의 유아였어. 미로처럼 얽힌 성 안에서 사소한 실수로 길을 잃는 경우가 많았어. 항간엔 폰 슈바이크가 일부러 그런 일을 꾸민다는 소문이 있었지. 로봇의 디테일한 반응을 보기 위해서라나. 우여곡절 끝에 엄마는 아이를 찾았어. 아이를 찾은 엄마는 아이를 꼭 껴안은 채 엄청난 환희에 젖어있었어. 폰 슈바이크는 그녀에게 가서 물었지.

 

지금 이 아이를 언제까지 안을 수 있겠나.

 

백 년이라도 가능해요.

주인님. 아무렴요.

백 년 동안이라도 이 아이를 안고 있을 수 있답니다.

 

폰 슈바이크는 그렇다면 진짜 너의 감정을 보여 달라고 했어. 그러자 그녀는 다시 환희에 차서 아이를 안았지. 정말 그렇게 몇 일을 안고 있었어. 둘에겐 배고픔도 아픔도 졸림도 느끼지 못했지. 명백한 프로그램 실수였어. 아무리 커다란 환희라 해도, 아이와 엄마의 유대관계라곤 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을 수 있겠어? 그런데 실제로 그 장면을 본 사람들이 수근 대기 시작했지.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그것은 수 백년 전에 만들어진 피에타 상에 버금갈 만큼의 생생한 감동이 있다고.

폰 슈바이크는 그 소식을 듣고 기분이 나빠졌을 거야. 어떻게 로봇의 환희 따위가 인류의 위대한 작품이 빚어낸 거룩한 슬픔과 비교될 수 있겠냐면서 펄펄 뛰었겠지. 그는 당장 두 로봇의 전원을 제거해버렸지. 나는 그때 다른 음악가와 미술가들과 더불어 그의 성에서 머무르고 있었어. 나는 막 전원이 제거된, 폐기 직전의 두 로봇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지. 그것은 순수하기 이를 때 없는 모성의 상징이었어. 나와 몇몇은 폐기직전의 로봇 두 기를 몰래 빼돌려 그것을 대리석 상으로 만들었어. 그것이 바로 지금 보고 있는 저 상이야.

그 사실을 들은 폰 슈바이크가 대노했지. 그는 나와 친구들에게 다가와 콧수염을 뽑을 듯이 잡아당기며 차분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하더군.

 

로봇에게 신성을 느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럴까요?

존재하고 있는 아름다움을 다만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지요.

당신이야 말로 로봇이 아닌가요?

 

나는 그때 분노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을 보았지. 폰 슈바이크가 어떤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나는 곧바로 상을 외부로 옮겼고 그의 성을 나왔어. 지금의 저 대리석 상은 그 후 몇 년 간 이곳에 보관되었고 새로운 작품을 찾던 사람들의 눈에 띄어 세상에 공개되었어.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 각종 전시회에 초대되었고 당시 사회에 큰 이슈가 되었지. 동시에 몇몇 인사들은 폰 슈바이크를 맹렬히 비난했어.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아왔던 인류 예술의 수호자였던 그를.

폰 슈바이크의 성을 나온 이후로 그와 연락이 닿은 적은 없었어. 하지만 그는 줄곧 복수를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기어이 복수를 하고야 만 거군.

 

너를 만들어 나에게 보낸 것으로.

인간을 우습게 만든 벌을 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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