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썹 그리고 혜신

 

 

 

 

Elliott Smith, Everything Means Nothing to me

Guns N‘ Roses, November Rain

Stone Temple Pilot, Down

Slipknot, Duality

 

 

 

   

 

   1

 

방에서 보내는 하루는 빨리 지나갔다. 온전히 하루로 느껴지던 시간은 이틀 분을 보내서야 하루치만큼 느껴졌다. 퇴사 후 꼬박 일주일을 집안에서 보내기도 했다. 수는 한동안 TV만 보았다. 수십 개의 채널을 리모컨으로 재핑하며 시간을 보냈다. 영화도 있었고 드라마도 있었지만 대부분 뉴스나 시사에 관한 것들을 보았다. 재밌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걸 보는 이유는 어떤 불안감 때문이었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가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세상을 어떻게 봐야할지 그런 걸 배운 적도 공부를 한 적도 없었다.

 

경제와 정치에 관해서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식의 문제가 아니었다. TV에 나오는 사람들, 특히 공중파가 아닌 케이블에선 훨씬 더 직접적이고 자극적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한결같이 격앙되어있었고 현실은 온통 문제투성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그 문제들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 혹은 하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이라며, 그들과 생각이 다른 이들을 질타했다.

수는 아이팟으로 팟캐스트도 들었다. 거기에서도 TV와 마찬가지로 격앙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엔 TV에서 질타를 당하던 대상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도 역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반대생각을 가진 이들을 질타했다.

수가 느낀 불안감은 그 어느 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 생활을 했지만 자신이 세상을 이해하는 깊이는 너무나 얕았다. 그렇게 몇일을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들이 지겨워지면 사람들이 만든 음악을 들었다. 음악을 듣다가 문득 불안해지면 다시 TV나 아이팟으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쪽은 결론을 내고 규정을 내리며 우리가 누구이며 그들은 또 누구인지를 분명히 가르는 소리였다. 한쪽은 결론도 없고 규정도 없으며 도무지 우리와 우리가 포함된 모든 세상이 모르겠다고 말하는 소리였다.

 

방에서만 시간을 보내던 수는 드디어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했다. 방에 틀어박혀 있던 한 달 동안 단지 너무 답답해 졌기에 나오는 거라고 자신에게 말했지만, 사실, 그동안 어떤 회사로부터도 연락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막막함과 두려움을 떨쳐보기 위한 거였다.

딱히 만날 친구도 지인들도 없었다. 방에서 지내던 때와 달리 거리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더디게 갔다. 목적 없이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는 것 인줄 수는 일찍이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수는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렇게 의미 없는 행동이나마 하지 않으면 자신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2

 

늦은 밤 서울에서 신도시로 향하는 광역버스의 뒷자리에서 수는 앞좌석으로 향하던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밀려서 버스 뒷자리로 쪽으로 걸어가던 수는 스치듯이 한 여자를 보았다. 얼굴의 반을 가린 커다란 선글라스와 곱슬곱슬한 긴 머리에 스카프를 칭칭 두른 여자는 고개를 한쪽으로 돌린 채 잠이 들어있었다.

‘혜신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로 만난 적이 없었지만 수는 그녀가 혜신임을 직감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졸업식 날 어색하게 헤어진 후 둘은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그나마 몽이 군대로 간 이후론 모든 친구들의 연락을 끊어져버렸다.

 

그동안 가수로 데뷔는 한 건인지. 서울을 벗어난 버스가 수가 사는 신도시의 초입 쪽으로 들어서자 수는 궁금함을 넘어 조바심까지 들었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수는 목적지에서 내리지 않고 혜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잠든 여자 옆으로 자리를 옮긴 남자를 옆에 앉은 여자가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주 깊은 잠에 들었음이 분명했다. 막 흔들어 깨우고 싶은 충동을 겨우 누르며 그녀 옆에 자리를 지켰다.

잠깐 수가 밖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 버스가 멈춰 섰고 혜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뒷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수도 반사적으로 그녀를 따랐다. 혜신은 스카프 자락을 휘날리며 걸었다. 치렁치렁한 치마 역시 바람에 흩날려 지나던 사람들이 쳐다보았다. 뭔가 유행을 앞선 것도 같고 반대로 유행에서 아주 멀어진 느낌도 들었다. 그녀는 수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빨리 걸었다. 마침내 수의 목구멍에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이혜신.”

 

길을 가던 그녀가 멈춰섰다. 천천히 몸을 돌려 수를 바라보는 그녀가 선그라스를 벗었다.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혜신은 창백한 얼굴을 가리던 치렁치렁한 머리를 쓸어올리곤 수를 바라봤다. 그녀는 이미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샷 하나 더 추가해줘.”

진한 카페모카에 샷을 하나 더 추가해달라는 혜신의 주문은 의외였다.

“요즘 계속 잠만 자서 말이야.”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내미는 동안 수는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장기간 다이어트를 한 탓인지 얼굴은 놀랄 만큼 작았고 상대적으로 눈과 코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커보였다. 혜신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수를 잠이 덜 깬 몽롱한 눈으로 쳐다보며 커피를 마셨다.

“집에 오는 길인가 봐.”

수가 묻자 혜신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주 와버렸어. 집에.”

 

수는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기획사 소속 연습생이 칼로리 높은 카페모카를 마시고 그것도 샷까지 추가하는 건 뭔가 수상했다. 그 옛날 뻥과자를 먹고도 과식했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무엇보다 발랄하고 거침없던 기운이 하나도 보이질 않았다. 마치 몸 안의 모든 피를 흡혈귀에게 받치고 돌아온 이처럼 창백했다.

“너도 집에 오는 길인가 봐.”

수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둘은 말없이 커피만 마시다 이내 커피숍을 나섰다. 수는 혜신이 걷는 방향으로 한동안 걸었고 곧 헤어졌다. 전화번호만 서로 교환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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