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루 종일 우리는 침대에서 서로를 보며 마지막 날을 보냈다. 오후부터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안은 채 잠을 자다가 깨어나곤 했다. 꿈에서 나는 거친 파도 위에서 배를 타고 있었다. 창을 통해 보니 집채만한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고 주위의 배들이 모두 위태해 보였다. 그 중 심하게 흔들리던 배 하나가 공중으로 날아 올랐다. 그러더니 내가 타고 있던 배 위에서 멈춰 섰다. 마치 헬리콥터가 머리 위에 떠있는 것처럼. 나는 놀라 잠을 깼다. 여전히 그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일도 비가 계속 해서 내릴 거예요.

저는 정확히 정호가 되면 밖으로 나가 비를 맞을 겁니다.

그 시점을 기해서 제 몸의 모든 부분은 수용성 상태로 바뀔 겁니다.

그렇게 프로그램 되어있어요.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 쉬었다. 나는 한동안 누워 있다가 문득 그녀의 손을 이끌고 저택의 곳곳을 돌아다녔다.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새롭게 모든 곳을 소개해주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생각나는 온갖 유치한 상상과 감정들을 그대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부모를 잃고 서러웠던 기억들과 장남감에 얽힌 온갖 상상들을 마치 소년이 된 것처럼 그녀에게 고백했다. 나는 중간중간 눈물을 흘렸지만 그녀는 웃었다. 나는 가끔 소리 내어 웃었고 그녀는 똑같이 웃었다.

 

9

 

정오가 되었고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곤 텐트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정원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 섰을 때 그녀는 나를 보며 말했다.

마지막 까지 보아 주세요.

제가 사라지는 장면은 극한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가 누리는 마지막 기쁨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당신도 나도 마지막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제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까지

저는 당신을 지켜보겠습니다.

당신을 생각하겠습니다.

 

그녀는 비가 쏟아지는 밖으로 나섰다. 밖은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쳤다. 나는 미끄러져 나가는 그녀의 손을 일부러 잡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가장 잘 보이는 1층 서재로 들어갔다. 세로로 긴 격자 유리창을 통해 그녀를 보았다. 아무래도 눈물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몰래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녀를 보았다. 미로의 숲까지 내려간 그녀는 미로의 입구 앞에서 멈춰섰다. 그리곤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비가 닿은 그녀의 몸은 어깨부터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끈적한 흔적이나 수증기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만 했다. 다음으로 발바닥과 발목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있던 형상은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녹을 땐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도저히 마지막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숙여진 고개는 어떤 명령으로도 들어올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천국을 보았던 사람은

또한 지옥을 볼 확률이 높다는 것을.

 

10

 

지난 1년은 완벽한 상실의 시간이었다. 완벽하다는 것은 단 한줄기의 희망 따위도 없었단 이야기다. 그러나 예상 밖에도 지옥으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자살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멍한 상태가 지속되었고 나는 비교적 잘 먹고 잘 잤다. 다시금 그녀가 없던 삶으로 적응해 갔다.

다만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공간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낯설어 졌다. 혹시 치매의 증상은 아닐까 테스트 해보았지만 아무런 이상 징후를 찾지 못했다.

하루가 다르게 낯설어 지는 이곳은 어쩌면 천국와 지옥 사이에 있는 에어쿠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떠올린 적은 아마도 처음이었을 것이다. 천국만 있고 지옥은 없다, 라고 생각했었다. 천국은 없고 지옥만 있다, 라고 생각도 했었다. 천국와 지옥이 동시에 있다, 라는 생각은 처음으로 한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살하겠다는 의지는 희미해졌다. 다만 기력은 예전만 못했고 먹고 마시기 위해 가정부 몇 명을 고용했고 텐트는 치워버렸다. 오후가 되면 미로의 숲에 들어가 걷기도 했다.

 

얼마 전 부터 다시는 들지 않을 것 같은 기타를 잡았다. 그것도 아랑후에스만을 연주했다.

매일 아침 아랑후에스를 연주할 때마다 음과 음 사이로 그녀의 음성이 섞여서 들렸다. 음들을 정확히 연주하는 동안 남은 감각을 모두 동원해 그녀의 목소리를 들어야했다. 손가락은 머리를 통하지 않고도 연주가 가능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몸이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연주는 가능했다. 다만 그녀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면 되었다.

하지만 음악의 흐름이 점점 더 부드러워 질수록 그녀의 소리는 하루가 다르게 미약해지고 가늘어졌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문득 펜을 잡았다.

 

이제,

나에게도 못한 이야기를 너에게 한다.

 

첫 문장만큼은 쉽게 썼다. 단 한 줄의 문장을 썼고 나는 만족했다. 첫 문장만 썼을 뿐인데 첫 문장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평소에 글을 써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일단 이렇게 시작해야할 것 같은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문장부터는 도무지 써지지가 않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아마도 첫 번째 문장이 잘못되어서 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결코 첫 번째 문장을 지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건 고집이라기보다는 운명 혹은 계시 같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을 쓰는 일이었다.

오늘도 역시 두 번째 문장을 위해 여러 문장을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단지 짧은 순간이나마 머리가 맑아졌던 순간은 있었다. 펜을 굴리던 중 풀리지 않는 문제는 혹시 ‘나와 너’ 사이의 관계에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폰 슈타이크가 복수를 목적으로 그녀를 보냈던 건 아니었을 지도 몰라, 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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