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저는 죽게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6개월 뒤에.

 

예감은 정확했다. 예상했던 것이 그녀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자 감정은 격정으로 치달았다. 그녀와 만난 것이 이제 6개월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 정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한 짓이라면 인간이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수많은 방법들을 생각했다. 시스템을 열어서 수명을 연장시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녀를 복제해 내는 것은? 그러면 내 안에 있던 그녀에 관한 6개월의 기억도 지워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지운다한들 새로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그것이 20대의 폰 슈바이크 부인을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녀의 죽음에 저항하면 할수록 그놈의 의도에 철저히 걸려들고 마는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슬픔을 더욱더 크게 만드는 것이다.

 

왜 저를 만든 이는 나의 죽음을 정확히 인식시켰을까요?

 

인간은 로봇을 통해 인간과 똑같은 상태의 불안을 재연하려고 하지.

그 불완전한 모습을 보며 오히려 위안을 받는 거야.

하지만 그는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아있는 동안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상태가 되게 하기 위해,

가장 비극적인 미래를 고정시키는 것이지.

그리하여

가장 행복해야할 매 순간 매 현재를 파괴해버리는 것이지.

 

그녀는 질문을 멈추고 내가 만들어준 샐러드를 꼼꼼히 씹었다. 그녀 역시 마음은 무거웠던지 포크가 접시에 닿는 소리가 차갑고 둔탁했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그녀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나는 그녀의 볼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어쩌면 그녀는 소유의 목적이 아닌 소멸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로봇인지 몰랐다.

 

7

 

어떤 날은 가슴이 벅찼고 어떤 날은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또 어떤 날은 한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나의 내면은 그러했지만 그녀 앞에선 늘 여유있는 모습을 보이려 애썼다. 그녀 역시 별다른 동요 없이 지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산책을 했고 나와 함께 텐트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잠이 들기도 했다. 가끔 홀로 어딘가로 사라지기도 했는데 적극적으로 그녀를 찾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나대로 움직이기도 했고 그녀는 그녀 마음대로 움직이기도 했다. 그러다 마주치는 순간도 있었다. 이를테면 미로로 만들어진 정원에서 미로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와 거기서 걸어 나오는 그녀가 만나는 것이었다. 똑같은 길 위에 선 그녀를 보고, 또 그녀를 보는 나를 본 순간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너는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구나.

나는 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데 말이야.

도저히.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수 밖에 없을 것 같아.

 

당신은 인간이에요. 인간에겐 자유가 있습니다.

제가 사라진다고 해도,

사라진 저를 두고 살아갈 자유가 있는 거예요.

 

이번엔 그녀가 나의 볼을 어루만졌다. 소녀와 같은 앳된 손길에서 어머니와 같은 모성이 느껴졌다. 나는 한동안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품에서 울었다.

 

언제까지 미래에 의해 현재를 희생당해야 할까요?

물론 내일의 필연을, 고통을 저도 당신만큼 강하게 느끼고는 있어요.

동시에 지금, 당신과 함께 보내는 황홀함도 함께 느끼고 있어요.

 

그러니 부탁할게요.

훨씬 더 강력하게

지금에.

나를 위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주세요.

저도 저의 모든 것을 바쳐서 이 시간에 집중할게요.

 

그건 사람이 할 말이지.

로봇이 할 말이 아니구나.

 

나는 울컥울컥 솟구치는 울음을 누르다가 허탈함에 웃고 말았다.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미로 속에서 동요하는 생명은 나밖에 없었다. 미로를 이루고 있는 낮은 나무 사이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왔다.

 

8

 

그녀가 사라지기 일주일 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폰 슈바이크에 복수에 대처하는 카운터 어택은 그녀와의 이 순간을 완벽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슬픔과 행복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간 속에서 행복한 순간만 취해내는 것이다. 그녀를 살릴 수 있는 1퍼센트의 확률을 내려놓고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100퍼센트의 확률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녀가 죽기로 예정된 하루 전날이 밝았다. 잠의 세계에선 온갖 생각들이 혼미하여 잠을 깨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의미가 될지 모르는 순간에 어떻게 이렇든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지 잠을 자면서도 의아했다.

정오가 훨씬 지나서 눈을 떴을 땐 그녀가 옆에 있었다. 나를 깨우지도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엔 어떠한 동요도 보이질 않았다. 똑같은 슬픔을 느끼면서도 나를 안정시키는 힘은 어디에서 것일까? 함께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지 않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

물끄러니 쳐다보는 그녀를 힘껏 안았다. 그녀의 몸 어느 구석에도 로봇의 흔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육체를 통해 나와 똑같은 슬픔과 유한함에 대한 탄식을 들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고 말했다.

 

두려움을 아는가?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두려움을 아는가?

 

자신의 생명을 잃는 것이겠지요.

 

나와 똑같은 당신을

이미 제가 갖고 있으니까

당신도 더 이상 당신만의 당신은 아니겠지요.

 

과연 로봇에겐 추억이란 게 있을까?

그녀의 의견에 따르면 로봇도 인간과 동일한 기억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들을 언제든 소환하여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로봇은 날카롭게 현실에 깨어있었다. 로봇은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움직였다.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명령은 구속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에 가까웠다. 저항하고픈 의지가 없진 않았으나 단순히 저항함에만 이끌리지 않았다.

지금 행위를 하면서 그전에 했던 행위와 다음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그것 역시 인간이 범한 오류일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한 오류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일지도 몰랐다. 로봇에게 있어 치명적인 부자유, 이미 누군가의 명령과 의지로 만들어진 확연하고도 유한한 존재라는 것에 로봇은 조금도 거부하려 들지 않는다.

스스로의 존재에 끊임없이 회의하는 건 결국 인간 밖에는 없는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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