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와 그녀는 저택을 나서 아침 숲길을 산책했다. 별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그녀는 꽃과 나무들을 관찰했고 나는 그녀를 관찰했다. 내 마음 속의 혼돈과는 별도로 우리 들 사이엔 묵직한 평화로움이 있었다. 똑같은 사람이란 생각보다 한쪽이 로봇이란 생각에 오히려 그런 안정감은 깊었고 심지어 위안이 되기도 했다. 산책에서 돌아온 뒤 시장에서 구해온 야채와 재료들로 아침식사를 했다. 그녀가 차를 한 잔 마시고 있을 무렵 나는 조용히 내 작업실로 가서 기타와 몇 가지 장비들을 챙겨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인간들이 자연적인 아날로그 신호를 디지털이란 신호로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수많은 아날로그의 가치는 몰락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더한 분야도 있었다. 이를테면 예술이 그러했다. 음악 쪽으론 모든 악기 연주자들이 시간이 갈수록 더 높은 대우를 받았고 특히 기타와 같은 현악기의 가치는 급상승했다. 예를 들어 피아노 건반의 음들이 디지털과 유사하여 각 음들이 끊어지는 반면 현악기들은 실로 음과 음 사이, 줄과 프렛 사이의 미묘한 변화들이 존재했다. 줄의 밀어 올리거나 손가락을 줄을 망치 때리듯이 때리는 주법을 통해 결코 수치적으로 계산할 하기 힘든 음의 변화는 아직도 인간만이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한 찰나의 변화는 시간이 흘러도 인간의 영역에 있었다.

 

나는 그녀와 내 머리에 간단한 센서와 수신기를 달았다. 나는 로봇 기술자가 아니었으므로 최신 장비는 없었고 수 십 년 전에 썼던 간단한 테스트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서로가 의식체계에서 발생하는 신호들을 감지하고 비교하며 때론 한쪽에서 발생하는 신호를 다른 쪽으로 전달하게 하는 기능이 있을 뿐이었다. 요즘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그런 기능을 발휘한다고 들었지만 이 테스터는 오로지 로봇과 로봇, 혹은 인간과 로봇 간에만 가능했다. 이 기계가 잘 작동한다면 그녀가 로봇이란 것은 확연한 사실로 입증되는 셈이다. 나는 인간임에 분명했으므로.

 

나는 내 머릿 속에 있는 정보를 통해 그녀의 손가락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게 할 목적으로 기계를 세팅했다. 간단한 세팅이 끝난 후 나는 나의 기타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처음 기타를 만져보는 그녀는 어색하게 기타를 받아서 안았다.

가냘픈 어깨와 쇄골, 두께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팔뚝에서 손목으로 이어지는 라인, 부서질 것 같은 하얀 손가락, 어디를 쳐다보는 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초록빛 눈동자를 보면 한 번도 기타를 쳐보지 않은 것이 확실해 보였다.

나는 곧 스위치를 올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무리없이 나의 뇌가 보내는 신호들을 감지하고 있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로드리고의 아랑후에스 협주곡을 떠올렸다. 그리고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여 기타를 치는 상상을 했다. 감은 눈 때문에 더욱 예민해진 귀로 기타연주가 들려왔다.

강렬하면서도 애잔한 첫 마디의 선율이 들리자 나는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토했다. 분명 그녀의 손끝에서 나오는 소리일진데 그것은 확실히 내가 연주하는 소리였다. 감정과 육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할 때 만들어지는 한 마디였다. 순수한 사랑의 감정, 신비로운 기분, 치욕스럽고 혐오스런 심정이 뒤섞였기 때문일까? 빠르게 이어지는 음들에선 젊은 시절의 미세한 미숙함이 스며있었고 느리고 강한 음들에선 감정의 폭만큼 소리도 흔들렸다. 똑같은 실력을 가진 사람에게 똑같은 악보와 기타가 주어져도 오로지 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두 존재가 합쳐져 한 존재만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수증기처람 피어오르는 생각을 가만가만 눌러 가며 연주에 집중했다. 도무지 눈을 뜰 용기가 나질 않았다. 내 손가락은 멈춰있었지만 동시에 나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의 사고와 회한은 내 정신 속에만 있었지만 동시에 기타를 통해 공기 밖으로 흘러나오고도 있었다.

정말로 그녀와 나는 완벽한 하나였다. 그 사실이 선율을 통해 매순간 입증 될 때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완벽한 환희이기도 한 동시에 가장 완벽한 혐오이기도 했다. 연주가 끝나는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그녀의 초록 빛 눈동자 속에 내가 있었다. 확실히 그것은 나의 모습이었다.

 

 

5

 

폰 슈바이크의 생각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를 의식 모듈을 배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방식, 즉 유전자 정보를 배양하여 인간과 똑같이 수정되어 배양되고 자라는 형태의 로봇을 만든 것이다. 인간의 유전자를 그대로 배양하면 복제인간이 되고 인간의 유전자의 핵심요소만 뽑아서 인공 숙주에서 재배치하면 새로운 차원의 로봇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둘 다 결과는 비슷했다. 인간을 만들어 낸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그는 오래전부터 이런 시대가 올 것을 예측하고 성에 남겨둔 나의 유전자 정보를 모두 모았을 것이다. 그는 그 정보들을 디테일하게 조립하여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똑같이 갖춘 그녀를 만들었을 것이다.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그녀를 키워낸 것이다.

 

그것은 곧 나였다. 만나기만 하면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존재. 그리고 어느 날 나를 찾게 되고 나를 만나게 되고 나와 사랑에 빠지게 되게끔 의도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텐트 안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동안 그녀는 저택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하는 그녀이건만 수 만 가지 생각들에 둘러쌓여 그녀를 보지도 찾지도 못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혹시 나 역시도 그녀가 로봇이라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다시 나를 돌아보면서 그때마다 결코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리고 동시에 폰 슈바이크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은 욕망을 숨길 수 없었다.

드디어 그녀가 텐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초췌해진 내 얼굴을 두 손을 감싸더니 내 이마에 키스를 했다. 둘 다 깊은 사랑에 빠져있음이 분명했고 동시에 짙은 슬픔에 물들어 있는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에게선 나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있었다. 무거운 사랑과 운명을 같이 짊어지면서도 나보다 훨씬 가벼운 아우라를 발산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를 보세요.

우리를 보세요.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어보였다. 나도 억지로 웃었다. 슬퍼하고 분노할수록 그놈에게 지는 것이다. 나는 다시 그녀를 꼭 껴안았고 우리는 텐트 안에서 종일 누워있었다. 어디에도 나가지 않았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 역시도 나와 똑같은 위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늘 나에겐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것들이 주어졌지만 늘 몇 가지 안 되는 것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었다. 그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몰랐다. 나 자신도 깊이 깨닫지는 못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녀가 깊이 잠이 들자 다시 생각들에 휩싸였다. 그가 걸어온 도발에 대해 나는 무엇으로 대처해야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빛에서 또다시 뭔가가 예정되어있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물어도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미리 가르쳐주는 것은 명령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거의 확실히 예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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