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등산로로 접어드는 언덕길 옆 벤치에 남자는 왼쪽 다리를 길게 내밀고 앉아있었다. 낡았지만 몸에 잘 피트된 청바지였기에 햇볕 아래 내밀어진 다리의 길이가 엄청났다. 키가 크고 말랐으며 얼굴은 창백했다. 귀에는 하얀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그렇게 다리를 내밀고 고개를 땅에 박은 채로 남자는 벤치에 앉아 햇볕을 받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자는 이곳에 오기 전 서울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쳤다고 했다. 일을 하러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다리를 다쳤다고 했다. 보약도 먹을 형편이 못되었고 그저 좋은 공기와 햇볕정도가 그를 위로하는 전부였다.

 

유진은 출근과 퇴근길에 자주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늘 하얀 얼굴에 하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어떤 음악을 듣는지는 몰랐지만 어쩐지 자신이 가슴에 품어두었던 노래들을 이야기하면 하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 이사를 가던 옆집을 도와주고 품삯 대신에 얻게 된 기타를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유진은 또 그를 보았다.

스치듯 짧은 시간이었지만 유진은 그 남자가 자신의 기타를 강렬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튜닝조차 할 줄 모르는 기타를 들고서 어찌할 바를 몰랐던 유진은 가던 길을 되돌아 남자에게 갔다.

 

기타를 간난아이를 보듬듯 안고 서있는 유진은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몰랐다. 다만 기타를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에서 번지수를 잘 찾아온 것만은 확실했다.

기타를 받아든 남자는 마치 자신에게 와야 할 기타가 이제야 왔다는 듯 조심스레 기타를 안았다. 기타를 안은 남자의 앞모습이 오후의 역광 속에 매몰된 채 유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앳된 얼굴이었다. 눈도 코도 입술도 모두 가늘고 길었다.

한껏 말라버린 어깨를 들썩이며 기타의 줄들을 조율하던 남자의 기나긴 손가락. 오랜 시간 버려진 탓에 울림통 근처로 지저분하게 내려앉은 먼지. 각각의 풍경은 저마다 비극적이었다. 각각은 너무나 비극적이어서 하나의 그림 속에서 슬프도록 잘 어울렸다. 남자가 늘어졌던 줄들을 팽팽히 조이자 기타 줄들은 비통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몸을 늘렸다 줄였다를 반복했다. 저렇게 조아대면 줄들이 다 끊어져버릴지 않을까? 유진의 우려에도 남자는 망설임 없이 여섯 줄을 조이며 풀며 악기다운 긴장감을 완성했다. 단지 그것뿐이었지만 유진은 자신이 선생님을 만났다는 확신을 거둘 수 없었다.

피요나 애플을 아세요?

 

유진은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남자에게 물었다. 고개를 가로로 젓는 그에게 자신의 엠피쓰리에 저장된 음악을 들려주었다. 유진의 검은 색 이어폰을 귀에 꽂은 남자는 신중히 음악을 들었다. 혹시 별로 유명하지 않은 곡일까? 남들 시선은 신경 쓰지 않던 유진도 이 순간만큼은 긴장이 되었다.

남자는 전주부분만 듣고도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말없이 곡을 모두 듣고는 귀에서 이어폰을 빼냈다.

 

“잘 알기도 하고 또 모르기도 하고.

본래 이곡은 비틀즈의 곡인데 여러 가수들이 리메이크를 해서 불렀죠. 이 노래는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아요.“

 

남자는 침착하고 또박또박 말했다. 유진은 기뻐서 맞장구를 치려다 겨우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이제 자신을 이해할만한 인간을 발견했다는 반가움이 가슴에 번져갔다. 유진이 다시 용기를 냈다.

 

“기타로 이 곡을 쳐보고 싶어요. 기타로 치기에 이 곡, 어렵나요?“

 

남자는 잠깐 머뭇하더니 이내 기타를 안았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점자책을 더듬듯이 천천히 기타의 지판을 짚어 보더니 이내 전주부분을 기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원곡의 첫머리처럼 약간 둔탁하게 시작한 연주는 점점 기름을 바른 듯 유연하고 세련되게 풀려갔다. 초보자가 무어라 평가하기는 힘들었지만 분명 어떤 선을 넘어선 연주임에는 틀림없었다.

 

더욱이 유진에겐 믿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악보도 없이 단지 듣기만 하고 저렇게 연주가 가능하단 말인가. 남자는 아는 부분까지만 연주하곤 기타를 내려놓고 웃었다.

 

“조금 더 듣고 연주해보면 딸 수 있을 거 같아요.”

 

유진은 ‘딴다는’ 것이 곡을 카피해낸다는 것임을 그날 알았다.

그렇게 벤치에서 만났던 둘은 다음날 남자의 방을 찾았다. 자신의 오디오에 유진의 엠피쓰리를 연결하고는 곡을 들으며 기타를 연주했다. 그렇게 듣고 연습하던 남자는 반나절이 지나자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능숙하게 연주해냈다.

유진의 눈엔 마치 그 음악의 기타를 남자가 연주하는 듯 보였다. 아주 정확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가 기타를 내려놓자 유진은 탄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사부님.”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외쳤다.

그날 이후로 유진은 꾸준히 남자를 찾아갔다. 다리를 다친 남자는 홀로 집에 남아 변변히 끼니도 챙겨먹지도 않고 음악만 들으며 지냈다. 유진은 그 집에서 기타를 배우고 연습하고 대신 자신이 만든 음식을 날랐다. 연습이 끝나면 기타를 남자에게 맡기기도 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그 남자는 기타로 어떤 곡을 치고 있을 지 유진은 궁금했지만 남자는 쉽게 자신의 연주를 보여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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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유진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보게 된 뮤직비디오를 떠올렸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어떤 공간으로 들어오더니 그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한구석에서 처연하게 노래를 부르는 소녀가 있었다. 그때 그 아이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내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소녀는 무기력해 보였지만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멜로디를 중얼거렸다. 화면 안에서 소녀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비디오를 찍는 카메라가 아니라 바로 유진, 자신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사였지만 그 노래가 자신을 이야기한다고 확신했다.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니 술판은 질펀해졌다. 나사 풀린 듯이 아무 말이나 내뱉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어깨를 치고 맥주와 소주를 섞은 술잔을 건네는 사람들. 화면 속의 풍경보다는 평화로운 편이었지만, 만약 유진이 그 소녀처럼 이 삼겹살집 한 켠에서 홀로 앉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화면으로 구현해 낸다면 이것 역시 뮤직비디오가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술이 만취하여 들어온 아버지가 가재도구를 집어던졌고 엄마가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로 되받는 아수라장 속에서 유진은 홀로 이 노래를 흥얼거린 적이 있었다. 노래를 중얼거리다 아버지의 욕지기가 커지자 자신도 모르게 크게 노래를 내지를 뻔 했다.

비가 그친 거리로 유진과 회사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다음 코스가 어딘지는 뻔했다. 몇몇 술이 약한 사람들과 여직원들이 자리를 떴지만 유진은 오히려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시간이 왔기 때문이었다.

노래방에서 자리를 잡자 곧 테이블 위로 맥주 캔이 쏟아졌다.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18번을 불러댔다. 혼자 구석에 앉아 맥주 캔을 한 번에 털고 캔을 우그러뜨린 유진이 마이크를 잡았다.

언제나처럼 전주가 시작되기 전 어떤 팽팽한 긴장감이 유진과 주변을 감쌌다.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정말 비가 내리는 날엔 열차라도 집어타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바로 그런 감정을 그대로 실어서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뒤집어 졌다. 꽁꽁 숨겨둔 자신의 몸을 맘껏 드러내고 유진은 진짜 가수 윤수희가 된 것처럼 화면을 등진 채로 아저씨들을 바라보며 불렀다. 그리고 이내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섰다.

유진이 비틀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중심을 잡는 다는 것이 테이블 위의 맥주 캔 몇 개를 발로 걷어차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누구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유진의 노래를 기점으로 광란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저 사이코 년.

 

유진은 노래가 잠깐 쉬는 사이 여직원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닿는 걸 느꼈다. 내면의 소리를 들은 지도 몰랐다.

그래. 미친년. 그렇게 미친년이 한 번씩 되어줘야 살 수가 있지. 술이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어떤 끼를 건드린다는 것을 유진은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끼가 넘쳐오를 때 그것을 가장 저급한 형태로 풀어놓는 것은 그녀의 생존전략이었다.

 

노래가 2절로 접어들자 난리 부르스가 연출되었다.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사장님은 입을 헤벌리고 어디서 저런 복순이가 왔나 흐뭇해했다. 유진이 띄워놓은 분위기에 남녀는 자연스럽게 엉켰고 유진 역시 자신에게로 붙는 남자들을 느꼈다. 딸뻘되는 여자의 가슴과 엉덩이에 손을 대는 아버지뻘의 남자들. 유진은 처음엔 단호하게 밀어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선에선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그것이 별다른 능력도 없고 사교성도 없으며 근무 내내 필요한 말 외엔 거의 하지 않고 온몸을 회사점퍼로 꽁꽁 싸맨 여자가 쥐꼬리만한 월급을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술에 절었어도 그녀를 더듬던 손길은 정확히 기억했다. 그리곤 다음 회식자리까지 다시 비사교적인 모드로 돌아갔다. 회사 내에서 유진은 미친년, 사이코 년으로 불렸지만 적어도 사내 중엔 그녀가 나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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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유진

 

 

 

Fiona Apple, Across the Universe

Elliott Smith, Clementine

Elliott Smith, Ballad of Big Nothing

Travis,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Alanis Morissette, Thank You

Nuno Bettencourt, Midnight Express

어떤날, 오후만이 있던 일요일

 

 

 

   

 

1

미친년.

 

유진은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벽을 쏘아봤다. 기타로 전주부분을 친 후 막 노래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자신의 감정이 망쳐진 탓에 유진은 털썩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무래도 이 기타소리 때문이겠지.

나라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유진이 자신의 기타 소리가 부끄러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친년. 어딜 가나 미친년이었다. 옆집 아줌마 뿐만 아니라 술에 미쳐 사는 아버지도, 유진을 미친년이라 불렀다. 그건 늘 미친 짓을 해서 미친년이 아니었다. 평소엔 새초롬하게 있다가도 뭔가 발동이 걸리면 180도로 바뀌기는 이른바 ‘잠재형 사이코’였다.

 

유진은 방바닥에 널브러진 채 그냥 잠이 들 뻔 했다. 시계를 한 번 본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따끈한 바닥에 손바닥을 대어보았다. 벽으로 새어든 바람 탓인지 냉기가 등 주변을 감돌았다. 유진은 답답한 듯 티셔츠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유진의 손에 브래지어가 들려졌다.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칠 땐 이상하게도 브래지어를 하기가 싫었다. 답답해서 노래가 잘 나오지 않았다. 뛰쳐나오려는 힘을 브래지어가 붙잡아 두려는 것 같았다.

 

어제 그가 일러 준 코드를 잡으려고 왼 손가락에 힘을 줘보지만 결국 오른 손가락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후들후들 코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힘껏 줄을 내려쳐보지만 둔탁한 소리만 가득했다. 기본 코드는 제법 소리가 나는데 왜 하이 포지션 코드만 잡으면 그런 건지. 혹시 기타가 너무 후져서 그런 건 아닐까? 하지만 사부가 시범을 보이던 순간을 생각하곤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똑같은 기타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기타를 배우려 했던 건 기타 자체 보다는 기타에 자신의 노래를 얹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기에 유진은 기타를 접고 노래만 불렀다. 곧 짜증 섞인 욕지기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지금 시각은 일요일 오전 6시.

아버지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놈의 술에 미쳐서. 죽지는 않았겠지. 오빠는 완전히 떠났다. 그건 확실했다. 엄마도 떠났다. 하지만 곧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사람들과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 때문에 유진의 머릿속이 잠깐 복잡했다.

 

유진은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기타를 잡았다.

 

 

 

2

 

유진은 검은색 회사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다.

 

왼쪽 가슴에 자수로 회사 이름이 박힌 점퍼는 여직원들이 저주하는 패션 아이템 중 으뜸이었지만 유진은 사무실에 오면 이 점퍼를 고집했다. 자신의 치수보다 두 사이즈 정도 큰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면 두 눈을 빼고는 거의 모든 부분이 가려졌다.

갓 스물을 넘긴 여자는 회사의 남자들이 유달리 발육이 좋았던 자신의 가슴을 힐끔거린다는 것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잔뜩 웅크린 채 유진은 늘 주변을 경계했다.

 

남자들은 수시로 유진에게 다가와 시시껄렁한 말장난을 걸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유진은 한 숨을 쉬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스란히 한 숨을 삼키는 동안 유진은 종종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유진은 꼭 필요한 말을 빼곤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유진을 믿었다.

 

그럼에도 유진은 자신의 가치가 목소리에 있다고 믿었다. 어쩌다 들린 읍내 노래방 화면에 찍혔던 점수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기적인 장치를 통해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 보다 마을 뒷산의 산책길을 홀로 걷다가 나직이 새어나오는 자연스런 목소리를 좋아했다.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부르게 되는 노래에 자신이 치유되곤 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주변의 자연 속으로 잘 녹아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유진은 자신의 목이 명기라고 할 순 없겠지만 어떤 음악을 실어도 거슬리지 않는 무난한 악기라고 생각했다.

 

유진의 목을 타고 다양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비록 듣는 폭은 좁아서 흘러들었던 트로트나 가요 혹은 음악시간에 배웠던 가곡들도 더러 있었지만 두서없이 목을 통해 나오는 노래들을 유진은 허투루 부르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더 어려워지고 음악적으론 할 수 없는 것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곡 하나하나에 더 신경을 쓰고 불렀다. 그렇게 수없이 몰입하여 노래를 부르다 보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들이 저만치 흘러가고 있음을 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봄을 앞두고 있었지만 겨울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따스했다 추워지고 다시 기온이 올라갔지만 스산한 기운은 여전했다. 날씨가 요동칠수록 몸의 호르몬도 제멋대로 분비되는 듯했다. 유진의 기분은 늘 타보지도 않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일과시간이 끝날 무렵 사장님은 회사 앞 삼겹살집으로 모이기를 명령했다. 회식을 할 만한 일도 없었지만 사장님을 비롯하여 모두들 오락가락한 봄 날씨에 마음이 심난 했을 것이다.

삼촌뻘 아버지뻘 되는 사내들 사이에서 유진은 말없이 고기를 뒤집었다. 남자친구는 없냐. 시집을 언제 갈거냐. 좋은 하는 남자는 어떤 타입이냐. 귀에 못이 박힐 듯 반복되는 영양가 없는 질문들을 적당히 쳐내며 유진은 술과 고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미래나 하고 싶은 것을 묻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가 가진 육체와 그 육체를 바탕으로 꾸며낼 수 있는 가장 재미없고 일반적인 이야기만 상상했다. 유진은 공짜로 씹는 고기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홀짝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소리와는 상관없이 유진은 자신의 소리만 들리는 공간을 머릿속에 만들었다.

 

‘언젠가는 떠난다.’

 

이곳이 정말 내 인생의 최종 무대일 리가 없다.

술이 조금 오르자 유진의 머릿속에 멜로디 라인 하나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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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졸업식 끝나고 밴드부실에 봐.

 

문자를 받고 온 수에게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혜신이 밴드부실 창가에 걸터 앉아 길쭉한 비닐 봉지 속에서 동그란 뻥과자를 꺼내 씹고 있었다. 수가 온 것을 본 혜신은 씩 웃더니 동그랗고 넓적한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뜬금없는 과자 광고의 한 장면 같아 수는 어색하기만 했다. 수도 혜신도 말없이 과자를 씹었다. 바삭바삭한 과자가 음미를 하기도 전에 혀끝에서 녹아버렸다. 수의 손에서 과자가 다 사라지도록 혜신도 그저 창밖을 보며 뻥튀기 과자만 먹어댔다. 언젠가 칼로리가 거의 없어서 여자들이 다이어트용으로 이런 걸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샤금, 샤금, 샤금

샤금, 샤금, 샤금

 

수 역시 졸업식이 끝난 교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패턴이 되어버린 혜신의 소리에 집중했다. 3박자로 끊어지는 소리. 어찌하여 ‘바삭바삭’이 아니라 ‘샤금샤금’으로 들리는 걸까? 수는 혜신에게 용건을 묻기보다 그 소리에 더 빠져들었다.

 

갑자기 혜신의 손바닥이 덥석 수의 손등을 눌렀다. 확실히 손을 잡았다라고 하기보단 눌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아직 뭔가 다가가기에 어색한 몸짓이었다. 수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보단 그저 누르기만 했던 것처럼.

수는 갑자기 먹먹해짐을 느꼈다. 일정한 리듬으로 만들어지고 있던 소리가 혜신의 마르고 가는 손길을 타고 수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뻥튀기 과자는 이제 절반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소리는 여전히 똑같았다. 리듬은 느슨해지지 않고 일정했다.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일정한 리듬에서 쏟아대는 래퍼의 랩 같았다. 그 소리는 자신에게 말하지 못했던 무엇인가의 고백인 듯도 했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같기도 했고 지난날 밴드부에서 함께 공유했던 추억담인 듯도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수는 ‘샤금’거리는 소리에서 혜신의 베이스 소리를 떠올렸다. 혜신은 남자처럼 터프하게 치진 못하지만 곡의 섬세한 부분까지도 잘 듣고 카피해 내곤했다. 혜신의 서툰 베이스음이 귀에 거슬리다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편안하게 들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수는 자신을 손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그리곤 혜신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자신의 의지로 혜신에게 다가가간 첫 번째 행동이었다. 순수한 동감의 표현 같은 것이었다.

수는 자신이 혜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혜신 또한 그 감정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사랑하는 사람만이 손을 잡는 건 아니다. 음악을 나눈 사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과자를 다 먹은 혜신이 수의 손 밑에 깔려있던 자신을 손을 툭 뽑더니 비닐봉지를 둘둘 말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수를 몇 초간 바라봤다.

 

“대학가서 공부 잘 하라구.”

 

수를 보는 눈엔 눈물이 맺힌 듯도 했지만 수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 예전처럼 밝고 명랑했던 표정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고되게 보였다. 위로할 말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학교를 나온 둘은 하염없이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말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발길은 혜신이 먼저 옮겼고 수가 따라가는 형식이었으므로 방향은 혜신이 잡은 대로 가는 셈이었다. 그렇게 혜신의 2보 뒤에서 줄기차게 걷는 동안, 수는 혜신을 생각하다 몽을 생각하기도 했고 썹을 생각하기도 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부질없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리고 발바닥이 후끈해질 무렵 자신의 왼쪽 눈썹 위에서 뭔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까지야.’

 

이건 말하자면 ‘워킹하이(Walking high)’같은 걸까? 수가 문득 정신을 차려 둘러본 곳은 혜신의 어느 건물 앞 이었다. 연습실과 사무실, 간단한 녹음실 심지어 합숙실 까지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서울 아닌 신도시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 아마도 저곳에 들어가면 쉽사리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겠지. 수는 혜신에게 밥이라도 함께 먹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혜신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 오늘 너무 과식했어.”

 

너무 말라서 앙상하기만 혜신의 입에서 과식이란 말이 나오자 수는 혜신의 뒤에서 버티고 있는 건물에서 풍겨 나오는 기묘한 광기에 몸을 떨었다.

 

‘저런 곳으로 가면 안 돼. 이런 건 아니지 않아?’

 

수의 입이 하지 못한 말로 떨렸다. 지난 1년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난 시절 함께 연주하며 쌓였던 혜신의 자존감은 어느새 기성의 시스템이 이끄는 방식에 매몰되어갔다. 몸은 더 말라있었고 그 속에서 노래를 배우고 심지어 춤을 배웠을지 모르지만 혜신 특유의 천진함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혜신은 작별을 고했다.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또 보자.“

 

혜신은 수를 등 뒤에 두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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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뒷풀이 파티엔 공식적으로 탄산음료가 주어졌지만 시간이 흐르자 기어이 술이 돌았다.

파티엔 무대에 섰던 거의 모든 아이들이 모였다. 처음 보는 사이, 말로만 듣던 사이, 이미 알고 있던 사이도 있었지만 술이 돌자 아이들은 바로 하나로 섞여 들어갔다.

수와 몽, 썹은 어느새 학교 앞 잔디밭에 누워있었다. 그들 뒤로 늦은 밤까지 환하게 밝았던 교실이며 강당의 불들이 하나 둘 씩 꺼져갔다. 세 학교의 공동 학예전도 이제 다 끝난 셈이었다. 정리를 하느라, 뒷풀이를 하느라 분주한 학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수는 약간 술이 올랐고 피곤했고 멍했다. 몽이 수의 오른쪽에 누워서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새인가 몽을 알아본 여학생 들이 다가오자 몽은 벌떡 일어나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썹을 바라봤다. 밤하늘을 보는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썹은 홀로 무대에서 다섯 곡을 불렀다. 연주를 하고나면 오히려 에너지를 섭취하는 듯 썹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음악이 체질인 것이다. 일반인의 에너지 관점으론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자신과 딱 들어맞는 그 무엇에 열중하면, 그의 몸은 오히려 에너지를 얻어오는 것이었다. 썹의 앙상한 팔다리와 퀭한 눈동자. 그런 것들에서 신성한 힘이 느껴졌다. 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썹 역시 몽처럼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그것마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썹이 일어나더니 마실 것을 좀 가져오겠다며 잔디밭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썹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수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

 

수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지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눈빛은 자신을 다그쳐 깨우는 거칠고 고압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느낌. 한결 부드럽고 포근한, 어쩌면 어린 시절 자고 있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엄마 같은 것이었다.

이건 꿈이야, 라고 느끼는 찰나 수는 뜨겁고 촉촉한 무엇인가가 자신을 입술을 내리 누르는 것을 느꼈다. 몽롱하게 늘어져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갑자기 느껴지는 압력 속에서 수는 눈을 떠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수는 한동안 무방비로 상대의 입술을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술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아직 성숙하지 않는 여자의 체취. 더 나아가 상대는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줄 엄마와 같은 존재가 아닌 오히려 수에게 뭔가를 갈구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수는 천천히 붙어있던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곤 술에 취한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한 소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혜신. 네가 왜 나에게.’

수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굵은 눈물 방울이 기어이 수의 얼굴에 떨어지자 수는 자신도 모르게 앙상한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왜 이 철부지 소녀가 자신에게만은 그렇게 철부지처럼 굴지 않았는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수는 혜신을 안아 주었다. 뜨거웠던 혜신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후 수는 자신의 입술이 급격히 차가워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아이스 커피가 입술에 닿았을 때의 쿨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차가움은 뜨겁던 것이 싸늘하게 식은 후에 느껴지는 차가움이었다. 뜨겁던 것이 식으면 그 차가움의 밀도는 본래 차갑던 것보다 훨씬 깊고 치명적이었다.

 

썹은 오지 않았다. 수는 그것이 더 불안했다. 아마도 이 장면을 보았을 거란 불길한 예감과 함께 힘겹게 발길을 돌렸을 친구를 상상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런 친구를 앞에 두고 그녀를 떼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받아주기까지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혜신은 안타까웠고 썹에겐 미안했으며 자신에겐 화가 났다.

 

9

 

썹은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따라 싸락눈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휘날렸기 때문인지, 트럭 운전석에서 시동도 끄지 않은 채 경적을 울려대는 썹의 아버지 때문인지, 수는 썹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얼마 전 혜신과 자신의 입맞춤을 보았을 썹을 상상하니 더욱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썹은 기어이 자신의 기타를 수에게 건넸다. 깁슨 레스폴과 똑같이 생긴 국산 일렉 기타는 이미 처분했고 가장 아끼던 마틴 기타를 수에게 맡겼다. 수는 어정쩡하게 기타를 받아 들었다. 썹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추위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꼭 찾으러 올 거니까 잘 간직 해줘. 혹시 생활이 더 어려워지면 팔아버릴지도 모를 것 같으니까. 그럼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썹은 단호했다. 수는 혼란스러웠다. 이것이 썹의 기타를 지키는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30평대의 아파트에서 살던 가장이 어떤 사연으로 쫓기듯이 이곳을 떠나야하는지 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썹은 수의 어깨를 한 번, 자신의 기타를 한 번 쓰다듬고는 곧장 몸을 돌려 아버지가 기다리는 트럭으로 걸어갔다. 썹이 탄 차가 눈길 속으로 사라져갔다. 큰 길은 포기한 채 썹의 아버지는 국도로 이어지는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택했다.

썹이 탄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수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길을 가야하는 썹에 비하면 남겨진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일지 모른다고 수는 생각했다.

‘사는 건 늘 상대적인 거야.’

애써 자신의 길을 긍정해보았지만 눈 속으로 묻혀가는 발길은 계속 무거워져만 갔다. 돌아오는 동안 몇 번이고 썹이 갔던 그 길을 무작정 따라나서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길로 자신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0

 

형섭의 전학을 시작으로 나머지 아이들의 길도 나눠지기 시작했다. 몽과 혜신은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 몽은 인디계열의 기획사에 소속 되었다. 혜신은 기존 소속사와 결별하고 새로운 소속사와 만났다. 이전 소속사가 단순히 일을 연결시켜주는 수준이었다면 이번 소속사는 조련과 투자를 통해 시장에 내놓을 상품으로 만들어 줄 예정이었다.

치맛바람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혜신 엄마는 딸을 연기자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혜신은 음악 쪽으로 고집했다. 밴드부에서 이룬 음악적인 발전이 소속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예쁜 얼굴과 악기를 다루는 음악적인 재능을 조합하여 어떤 상품성을 가늠했을 터였다.

밴드부의 길도 나눠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핵심멤버였던 몽과 썹. 혜신이 떠나고 잠시 짱을 맡았던 수도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겼다. 기존 멤버들이 꾸렸던 밴드부가 자유방임에 기초한 놀이터였다면 차기 밴드부의 색깔은 선후배의 관계에 기초하여 나름의 전통 있는 동아리로 만들어보자는 쪽으로 정해졌다.

자유의사에 기초한 동아리였기에 인원은 늘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고 소속감은 타 동아리에 비해 약했다. 결국 몇몇 핵심멤버들만 득세했다고 후배들은 분석했다. 신학기엔 오디션을 통해 쓸 만한 재목을 뽑고 그 인원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기수 운영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연습하면 살아남고 하지 않으면 도태 된다’라는 기존 방식은 ‘하기 싫어도 계속 할 수 있게 한다.’ ‘연습하지 않으면 연습하게 한다.’쪽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몇 달 전 보여준 선배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현 멤버들의 분위기였다.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에 왜 전통과 시스템이 필요한지 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쩐지 어른들 흉내를 내는 것 같아 내키진 않았지만 수는 어떤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지난날이 우리들의 자유였다면 지금은 그들 방식대로 즐길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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