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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끝나고 밴드부실에 봐.

 

문자를 받고 온 수에게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혜신이 밴드부실 창가에 걸터 앉아 길쭉한 비닐 봉지 속에서 동그란 뻥과자를 꺼내 씹고 있었다. 수가 온 것을 본 혜신은 씩 웃더니 동그랗고 넓적한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뜬금없는 과자 광고의 한 장면 같아 수는 어색하기만 했다. 수도 혜신도 말없이 과자를 씹었다. 바삭바삭한 과자가 음미를 하기도 전에 혀끝에서 녹아버렸다. 수의 손에서 과자가 다 사라지도록 혜신도 그저 창밖을 보며 뻥튀기 과자만 먹어댔다. 언젠가 칼로리가 거의 없어서 여자들이 다이어트용으로 이런 걸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다.

 

샤금, 샤금, 샤금

샤금, 샤금, 샤금

 

수 역시 졸업식이 끝난 교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패턴이 되어버린 혜신의 소리에 집중했다. 3박자로 끊어지는 소리. 어찌하여 ‘바삭바삭’이 아니라 ‘샤금샤금’으로 들리는 걸까? 수는 혜신에게 용건을 묻기보다 그 소리에 더 빠져들었다.

 

갑자기 혜신의 손바닥이 덥석 수의 손등을 눌렀다. 확실히 손을 잡았다라고 하기보단 눌렀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아직 뭔가 다가가기에 어색한 몸짓이었다. 수의 입술에 입을 맞추기보단 그저 누르기만 했던 것처럼.

수는 갑자기 먹먹해짐을 느꼈다. 일정한 리듬으로 만들어지고 있던 소리가 혜신의 마르고 가는 손길을 타고 수의 가슴으로 들어왔다.

뻥튀기 과자는 이제 절반 정도를 남기고 있었다. 소리는 여전히 똑같았다. 리듬은 느슨해지지 않고 일정했다.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일정한 리듬에서 쏟아대는 래퍼의 랩 같았다. 그 소리는 자신에게 말하지 못했던 무엇인가의 고백인 듯도 했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같기도 했고 지난날 밴드부에서 함께 공유했던 추억담인 듯도 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수는 ‘샤금’거리는 소리에서 혜신의 베이스 소리를 떠올렸다. 혜신은 남자처럼 터프하게 치진 못하지만 곡의 섬세한 부분까지도 잘 듣고 카피해 내곤했다. 혜신의 서툰 베이스음이 귀에 거슬리다가 어느덧 익숙해지고 편안하게 들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수는 자신을 손을 슬그머니 빼내었다. 그리곤 혜신의 손위로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자신의 의지로 혜신에게 다가가간 첫 번째 행동이었다. 순수한 동감의 표현 같은 것이었다.

수는 자신이 혜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혜신 또한 그 감정을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꼭 사랑하는 사람만이 손을 잡는 건 아니다. 음악을 나눈 사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드디어 과자를 다 먹은 혜신이 수의 손 밑에 깔려있던 자신을 손을 툭 뽑더니 비닐봉지를 둘둘 말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곤 수를 몇 초간 바라봤다.

 

“대학가서 공부 잘 하라구.”

 

수를 보는 눈엔 눈물이 맺힌 듯도 했지만 수는 자세히 보지 않았다. 예전처럼 밝고 명랑했던 표정은 거의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고되게 보였다. 위로할 말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학교를 나온 둘은 하염없이 걸었다. 목적지도 없이 말도 없이 그저 걷기만 했다. 발길은 혜신이 먼저 옮겼고 수가 따라가는 형식이었으므로 방향은 혜신이 잡은 대로 가는 셈이었다. 그렇게 혜신의 2보 뒤에서 줄기차게 걷는 동안, 수는 혜신을 생각하다 몽을 생각하기도 했고 썹을 생각하기도 했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 부질없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리고 발바닥이 후끈해질 무렵 자신의 왼쪽 눈썹 위에서 뭔가가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여기까지야.’

 

이건 말하자면 ‘워킹하이(Walking high)’같은 걸까? 수가 문득 정신을 차려 둘러본 곳은 혜신의 어느 건물 앞 이었다. 연습실과 사무실, 간단한 녹음실 심지어 합숙실 까지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서울 아닌 신도시에도 이런 곳이 있었다. 아마도 저곳에 들어가면 쉽사리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겠지. 수는 혜신에게 밥이라도 함께 먹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혜신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나, 오늘 너무 과식했어.”

 

너무 말라서 앙상하기만 혜신의 입에서 과식이란 말이 나오자 수는 혜신의 뒤에서 버티고 있는 건물에서 풍겨 나오는 기묘한 광기에 몸을 떨었다.

 

‘저런 곳으로 가면 안 돼. 이런 건 아니지 않아?’

 

수의 입이 하지 못한 말로 떨렸다. 지난 1년간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난 시절 함께 연주하며 쌓였던 혜신의 자존감은 어느새 기성의 시스템이 이끄는 방식에 매몰되어갔다. 몸은 더 말라있었고 그 속에서 노래를 배우고 심지어 춤을 배웠을지 모르지만 혜신 특유의 천진함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혜신은 작별을 고했다.

 

“시간이 안 될 것 같아. 또 보자.“

 

혜신은 수를 등 뒤에 두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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