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뒷풀이 파티엔 공식적으로 탄산음료가 주어졌지만 시간이 흐르자 기어이 술이 돌았다.

파티엔 무대에 섰던 거의 모든 아이들이 모였다. 처음 보는 사이, 말로만 듣던 사이, 이미 알고 있던 사이도 있었지만 술이 돌자 아이들은 바로 하나로 섞여 들어갔다.

수와 몽, 썹은 어느새 학교 앞 잔디밭에 누워있었다. 그들 뒤로 늦은 밤까지 환하게 밝았던 교실이며 강당의 불들이 하나 둘 씩 꺼져갔다. 세 학교의 공동 학예전도 이제 다 끝난 셈이었다. 정리를 하느라, 뒷풀이를 하느라 분주한 학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수는 약간 술이 올랐고 피곤했고 멍했다. 몽이 수의 오른쪽에 누워서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새인가 몽을 알아본 여학생 들이 다가오자 몽은 벌떡 일어나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수는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썹을 바라봤다. 밤하늘을 보는 눈동자가 초롱초롱했다. 썹은 홀로 무대에서 다섯 곡을 불렀다. 연주를 하고나면 오히려 에너지를 섭취하는 듯 썹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음악이 체질인 것이다. 일반인의 에너지 관점으론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제대로 먹지 않고 자지 않아도 자신과 딱 들어맞는 그 무엇에 열중하면, 그의 몸은 오히려 에너지를 얻어오는 것이었다. 썹의 앙상한 팔다리와 퀭한 눈동자. 그런 것들에서 신성한 힘이 느껴졌다. 수는 이런저런 생각에 잠시 눈을 감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썹 역시 몽처럼 뭔가를 이야기했지만 그것마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썹이 일어나더니 마실 것을 좀 가져오겠다며 잔디밭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썹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수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

 

수는 희미하게 눈을 떴다. 언제부터인지 누군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눈빛은 자신을 다그쳐 깨우는 거칠고 고압적인 눈빛은 아니었다. 자신을 지켜주고 있었다는 느낌. 한결 부드럽고 포근한, 어쩌면 어린 시절 자고 있던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을 엄마 같은 것이었다.

이건 꿈이야, 라고 느끼는 찰나 수는 뜨겁고 촉촉한 무엇인가가 자신을 입술을 내리 누르는 것을 느꼈다. 몽롱하게 늘어져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갑자기 느껴지는 압력 속에서 수는 눈을 떠서 상대를 바라보았다. 수는 한동안 무방비로 상대의 입술을 받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대의 입술에서 희미하게 술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아직 성숙하지 않는 여자의 체취. 더 나아가 상대는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줄 엄마와 같은 존재가 아닌 오히려 수에게 뭔가를 갈구하는 존재로 다가왔다.

수는 천천히 붙어있던 얼굴을 떼어냈다. 그리곤 술에 취한 채 눈물이 그렁그렁한 한 소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혜신. 네가 왜 나에게.’

수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굵은 눈물 방울이 기어이 수의 얼굴에 떨어지자 수는 자신도 모르게 앙상한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왜 이 철부지 소녀가 자신에게만은 그렇게 철부지처럼 굴지 않았는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잠시 동안 수는 혜신을 안아 주었다. 뜨거웠던 혜신의 입술이 떨어져 나간 후 수는 자신의 입술이 급격히 차가워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아이스 커피가 입술에 닿았을 때의 쿨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런 차가움은 뜨겁던 것이 싸늘하게 식은 후에 느껴지는 차가움이었다. 뜨겁던 것이 식으면 그 차가움의 밀도는 본래 차갑던 것보다 훨씬 깊고 치명적이었다.

 

썹은 오지 않았다. 수는 그것이 더 불안했다. 아마도 이 장면을 보았을 거란 불길한 예감과 함께 힘겹게 발길을 돌렸을 친구를 상상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그런 친구를 앞에 두고 그녀를 떼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받아주기까지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혜신은 안타까웠고 썹에겐 미안했으며 자신에겐 화가 났다.

 

9

 

썹은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따라 싸락눈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지독하게 휘날렸기 때문인지, 트럭 운전석에서 시동도 끄지 않은 채 경적을 울려대는 썹의 아버지 때문인지, 수는 썹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얼마 전 혜신과 자신의 입맞춤을 보았을 썹을 상상하니 더욱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썹은 기어이 자신의 기타를 수에게 건넸다. 깁슨 레스폴과 똑같이 생긴 국산 일렉 기타는 이미 처분했고 가장 아끼던 마틴 기타를 수에게 맡겼다. 수는 어정쩡하게 기타를 받아 들었다. 썹은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움츠린 채 추위 속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꼭 찾으러 올 거니까 잘 간직 해줘. 혹시 생활이 더 어려워지면 팔아버릴지도 모를 것 같으니까. 그럼 더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썹은 단호했다. 수는 혼란스러웠다. 이것이 썹의 기타를 지키는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30평대의 아파트에서 살던 가장이 어떤 사연으로 쫓기듯이 이곳을 떠나야하는지 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썹은 수의 어깨를 한 번, 자신의 기타를 한 번 쓰다듬고는 곧장 몸을 돌려 아버지가 기다리는 트럭으로 걸어갔다. 썹이 탄 차가 눈길 속으로 사라져갔다. 큰 길은 포기한 채 썹의 아버지는 국도로 이어지는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택했다.

썹이 탄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수는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낯선 길을 가야하는 썹에 비하면 남겨진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일지 모른다고 수는 생각했다.

‘사는 건 늘 상대적인 거야.’

애써 자신의 길을 긍정해보았지만 눈 속으로 묻혀가는 발길은 계속 무거워져만 갔다. 돌아오는 동안 몇 번이고 썹이 갔던 그 길을 무작정 따라나서고 싶어졌다. 그리고 그 길로 자신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10

 

형섭의 전학을 시작으로 나머지 아이들의 길도 나눠지기 시작했다. 몽과 혜신은 소속사와 계약을 했다. 몽은 인디계열의 기획사에 소속 되었다. 혜신은 기존 소속사와 결별하고 새로운 소속사와 만났다. 이전 소속사가 단순히 일을 연결시켜주는 수준이었다면 이번 소속사는 조련과 투자를 통해 시장에 내놓을 상품으로 만들어 줄 예정이었다.

치맛바람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혜신 엄마는 딸을 연기자로 만들고 싶어 했지만 혜신은 음악 쪽으로 고집했다. 밴드부에서 이룬 음악적인 발전이 소속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예쁜 얼굴과 악기를 다루는 음악적인 재능을 조합하여 어떤 상품성을 가늠했을 터였다.

밴드부의 길도 나눠지기 시작했다. 기존의 핵심멤버였던 몽과 썹. 혜신이 떠나고 잠시 짱을 맡았던 수도 후배들에게 자리를 넘겼다. 기존 멤버들이 꾸렸던 밴드부가 자유방임에 기초한 놀이터였다면 차기 밴드부의 색깔은 선후배의 관계에 기초하여 나름의 전통 있는 동아리로 만들어보자는 쪽으로 정해졌다.

자유의사에 기초한 동아리였기에 인원은 늘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했고 소속감은 타 동아리에 비해 약했다. 결국 몇몇 핵심멤버들만 득세했다고 후배들은 분석했다. 신학기엔 오디션을 통해 쓸 만한 재목을 뽑고 그 인원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기수 운영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좋다.’, ‘연습하면 살아남고 하지 않으면 도태 된다’라는 기존 방식은 ‘하기 싫어도 계속 할 수 있게 한다.’ ‘연습하지 않으면 연습하게 한다.’쪽으로 바뀌어 갈 것이다. 몇 달 전 보여준 선배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그들의 방식을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 현 멤버들의 분위기였다.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에 왜 전통과 시스템이 필요한지 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쩐지 어른들 흉내를 내는 것 같아 내키진 않았지만 수는 어떤 의견도 말하지 않았다. 지난날이 우리들의 자유였다면 지금은 그들 방식대로 즐길 자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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