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


유진은 인터넷 검색을 하다 우연히 보게 된 뮤직비디오를 떠올렸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어떤 공간으로 들어오더니 그곳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한구석에서 처연하게 노래를 부르는 소녀가 있었다. 그때 그 아이는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내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소녀는 무기력해 보였지만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은 채 낮은 목소리로 멜로디를 중얼거렸다. 화면 안에서 소녀가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비디오를 찍는 카메라가 아니라 바로 유진, 자신이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가사였지만 그 노래가 자신을 이야기한다고 확신했다.

상상에서 현실로 돌아오니 술판은 질펀해졌다. 나사 풀린 듯이 아무 말이나 내뱉고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어깨를 치고 맥주와 소주를 섞은 술잔을 건네는 사람들. 화면 속의 풍경보다는 평화로운 편이었지만, 만약 유진이 그 소녀처럼 이 삼겹살집 한 켠에서 홀로 앉아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화면으로 구현해 낸다면 이것 역시 뮤직비디오가 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랬다. 술이 만취하여 들어온 아버지가 가재도구를 집어던졌고 엄마가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로 되받는 아수라장 속에서 유진은 홀로 이 노래를 흥얼거린 적이 있었다. 노래를 중얼거리다 아버지의 욕지기가 커지자 자신도 모르게 크게 노래를 내지를 뻔 했다.

비가 그친 거리로 유진과 회사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다음 코스가 어딘지는 뻔했다. 몇몇 술이 약한 사람들과 여직원들이 자리를 떴지만 유진은 오히려 심호흡을 했다.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시간이 왔기 때문이었다.

노래방에서 자리를 잡자 곧 테이블 위로 맥주 캔이 쏟아졌다.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18번을 불러댔다. 혼자 구석에 앉아 맥주 캔을 한 번에 털고 캔을 우그러뜨린 유진이 마이크를 잡았다.

언제나처럼 전주가 시작되기 전 어떤 팽팽한 긴장감이 유진과 주변을 감쌌다.

 

비 내리는 호남선 완행열차에

흔들리는 차창 너머로

 

정말 비가 내리는 날엔 열차라도 집어타고 뛰쳐나가고 싶었다. 바로 그런 감정을 그대로 실어서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이 뒤집어 졌다. 꽁꽁 숨겨둔 자신의 몸을 맘껏 드러내고 유진은 진짜 가수 윤수희가 된 것처럼 화면을 등진 채로 아저씨들을 바라보며 불렀다. 그리고 이내 테이블 위로 뛰어 올라섰다.

유진이 비틀거리며 테이블 위에서 중심을 잡았다. 중심을 잡는 다는 것이 테이블 위의 맥주 캔 몇 개를 발로 걷어차는 꼴이 되어 버렸지만 누구도 나무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유진의 노래를 기점으로 광란의 상태로 접어들었다.

 

저 사이코 년.

 

유진은 노래가 잠깐 쉬는 사이 여직원의 목소리가 자신의 귀에 닿는 걸 느꼈다. 내면의 소리를 들은 지도 몰랐다.

그래. 미친년. 그렇게 미친년이 한 번씩 되어줘야 살 수가 있지. 술이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어떤 끼를 건드린다는 것을 유진은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끼가 넘쳐오를 때 그것을 가장 저급한 형태로 풀어놓는 것은 그녀의 생존전략이었다.

 

노래가 2절로 접어들자 난리 부르스가 연출되었다. 앉아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다. 사장님은 입을 헤벌리고 어디서 저런 복순이가 왔나 흐뭇해했다. 유진이 띄워놓은 분위기에 남녀는 자연스럽게 엉켰고 유진 역시 자신에게로 붙는 남자들을 느꼈다. 딸뻘되는 여자의 가슴과 엉덩이에 손을 대는 아버지뻘의 남자들. 유진은 처음엔 단호하게 밀어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선에선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그것이 별다른 능력도 없고 사교성도 없으며 근무 내내 필요한 말 외엔 거의 하지 않고 온몸을 회사점퍼로 꽁꽁 싸맨 여자가 쥐꼬리만한 월급을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무리 술에 절었어도 그녀를 더듬던 손길은 정확히 기억했다. 그리곤 다음 회식자리까지 다시 비사교적인 모드로 돌아갔다. 회사 내에서 유진은 미친년, 사이코 년으로 불렸지만 적어도 사내 중엔 그녀가 나가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이는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