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유진

 

 

 

Fiona Apple, Across the Universe

Elliott Smith, Clementine

Elliott Smith, Ballad of Big Nothing

Travis, Why does it always rain on me

Alanis Morissette, Thank You

Nuno Bettencourt, Midnight Express

어떤날, 오후만이 있던 일요일

 

 

 

   

 

1

미친년.

 

유진은 투덜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벽을 쏘아봤다. 기타로 전주부분을 친 후 막 노래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자신의 감정이 망쳐진 탓에 유진은 털썩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아무래도 이 기타소리 때문이겠지.

나라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유진이 자신의 기타 소리가 부끄러워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미친년. 어딜 가나 미친년이었다. 옆집 아줌마 뿐만 아니라 술에 미쳐 사는 아버지도, 유진을 미친년이라 불렀다. 그건 늘 미친 짓을 해서 미친년이 아니었다. 평소엔 새초롬하게 있다가도 뭔가 발동이 걸리면 180도로 바뀌기는 이른바 ‘잠재형 사이코’였다.

 

유진은 방바닥에 널브러진 채 그냥 잠이 들 뻔 했다. 시계를 한 번 본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따끈한 바닥에 손바닥을 대어보았다. 벽으로 새어든 바람 탓인지 냉기가 등 주변을 감돌았다. 유진은 답답한 듯 티셔츠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유진의 손에 브래지어가 들려졌다.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칠 땐 이상하게도 브래지어를 하기가 싫었다. 답답해서 노래가 잘 나오지 않았다. 뛰쳐나오려는 힘을 브래지어가 붙잡아 두려는 것 같았다.

 

어제 그가 일러 준 코드를 잡으려고 왼 손가락에 힘을 줘보지만 결국 오른 손가락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후들후들 코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힘껏 줄을 내려쳐보지만 둔탁한 소리만 가득했다. 기본 코드는 제법 소리가 나는데 왜 하이 포지션 코드만 잡으면 그런 건지. 혹시 기타가 너무 후져서 그런 건 아닐까? 하지만 사부가 시범을 보이던 순간을 생각하곤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똑같은 기타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걸까? 기타를 배우려 했던 건 기타 자체 보다는 기타에 자신의 노래를 얹어보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기에 유진은 기타를 접고 노래만 불렀다. 곧 짜증 섞인 욕지기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지금 시각은 일요일 오전 6시.

아버지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놈의 술에 미쳐서. 죽지는 않았겠지. 오빠는 완전히 떠났다. 그건 확실했다. 엄마도 떠났다. 하지만 곧 돌아올 것이다. 돌아올 사람들과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 때문에 유진의 머릿속이 잠깐 복잡했다.

 

유진은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기타를 잡았다.

 

 

 

2

 

유진은 검은색 회사 점퍼의 지퍼를 목 끝까지 채웠다.

 

왼쪽 가슴에 자수로 회사 이름이 박힌 점퍼는 여직원들이 저주하는 패션 아이템 중 으뜸이었지만 유진은 사무실에 오면 이 점퍼를 고집했다. 자신의 치수보다 두 사이즈 정도 큰 점퍼의 지퍼를 끝까지 올리면 두 눈을 빼고는 거의 모든 부분이 가려졌다.

갓 스물을 넘긴 여자는 회사의 남자들이 유달리 발육이 좋았던 자신의 가슴을 힐끔거린다는 것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달았다. 본능적으로 잔뜩 웅크린 채 유진은 늘 주변을 경계했다.

 

남자들은 수시로 유진에게 다가와 시시껄렁한 말장난을 걸어오곤 했다. 그때마다 유진은 한 숨을 쉬고 싶었지만 참았다. 고스란히 한 숨을 삼키는 동안 유진은 종종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만 같았다. 하루 종일 유진은 꼭 필요한 말을 빼곤 입을 다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유진을 믿었다.

 

그럼에도 유진은 자신의 가치가 목소리에 있다고 믿었다. 어쩌다 들린 읍내 노래방 화면에 찍혔던 점수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전기적인 장치를 통해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 보다 마을 뒷산의 산책길을 홀로 걷다가 나직이 새어나오는 자연스런 목소리를 좋아했다.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부르게 되는 노래에 자신이 치유되곤 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주변의 자연 속으로 잘 녹아들어가는 느낌이 좋았다. 유진은 자신의 목이 명기라고 할 순 없겠지만 어떤 음악을 실어도 거슬리지 않는 무난한 악기라고 생각했다.

 

유진의 목을 타고 다양한 노래들이 흘러나왔다. 비록 듣는 폭은 좁아서 흘러들었던 트로트나 가요 혹은 음악시간에 배웠던 가곡들도 더러 있었지만 두서없이 목을 통해 나오는 노래들을 유진은 허투루 부르지 않았다.

 

집안 사정이 더 어려워지고 음악적으론 할 수 없는 것들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곡 하나하나에 더 신경을 쓰고 불렀다. 그렇게 수없이 몰입하여 노래를 부르다 보면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시간들이 저만치 흘러가고 있음을 보았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봄을 앞두고 있었지만 겨울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따스했다 추워지고 다시 기온이 올라갔지만 스산한 기운은 여전했다. 날씨가 요동칠수록 몸의 호르몬도 제멋대로 분비되는 듯했다. 유진의 기분은 늘 타보지도 않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일과시간이 끝날 무렵 사장님은 회사 앞 삼겹살집으로 모이기를 명령했다. 회식을 할 만한 일도 없었지만 사장님을 비롯하여 모두들 오락가락한 봄 날씨에 마음이 심난 했을 것이다.

삼촌뻘 아버지뻘 되는 사내들 사이에서 유진은 말없이 고기를 뒤집었다. 남자친구는 없냐. 시집을 언제 갈거냐. 좋은 하는 남자는 어떤 타입이냐. 귀에 못이 박힐 듯 반복되는 영양가 없는 질문들을 적당히 쳐내며 유진은 술과 고기를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 누구도 자신의 미래나 하고 싶은 것을 묻지 않았다. 모두들 그녀가 가진 육체와 그 육체를 바탕으로 꾸며낼 수 있는 가장 재미없고 일반적인 이야기만 상상했다. 유진은 공짜로 씹는 고기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술을 홀짝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소리와는 상관없이 유진은 자신의 소리만 들리는 공간을 머릿속에 만들었다.

 

‘언젠가는 떠난다.’

 

이곳이 정말 내 인생의 최종 무대일 리가 없다.

술이 조금 오르자 유진의 머릿속에 멜로디 라인 하나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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