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더군. 하지만 대충 생각나는 것들이 있지 않니?”

 

“어쩜. 변태새끼!”

 

“돈은 충분히 주겠다는 거야. 사실 액수가 좀 많긴 했어. 순간적으로 유혹에 넘어갔지. 언듯 생각해보니 기껏해야 두들겨 맞는 거 아닐까. 아니면 뭐 이상한 걸 입히는 것? 학교 다닐 때도 그 정도 맞는 건 뭐, 회초리로 맞는 건 양반이었어. 지금껏 살면서 맞은 거 생각하면……이게 웬 떡이냐, 그런 생각도 들었지. 솔직히 성매매였다고 해도 어쩜, 그땐 넘어갔을 지도 몰라. 그 정도로 배가 고팠어.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런데 이렇게 버티다 굶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지. 그럴 때 남은 몸뚱이 하나 지켜봤자 뭐하냐, 는 생각은 당연한 거 아니겠어. 일단 먹고 자는 것부터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하루정도는 집에 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그런 게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자의 제안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에 홀렸는지 난 그러겠다고 하고 그 사람 차에 올라탔지. 차에 둘만 남았는데도 그 사람 전혀 흥분하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어. 그날따라 가을 하늘이 맑고 청명했지. 문이 두개 달린 차도 근사했고. 그런데 차를 출발하기 위해 시동을 거니 음악이 흘러나오더라. 근데 그때 음악이 너무 좋았어. 재즈풍의 피아노곡이었는데, 누구의 작품인지는 몰랐지만. 그땐 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지. 이정도의 음악을 들려줄 인간이면 믿어도 된다. 그런 마음으로 그 곡을 집중해서 들었지. 그런데 음악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조잡한 광고가 나오는 거야.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어. 이 사람이 튼 음악이 아니라 우연히 라디오가 들려준 음악이었다는 걸. 그래서 순간적으로 기도했지. 만약 이 차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선다면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도망가겠다고. 그날따라 차는 쌩쌩 달리더군.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통하는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어. 근데 그때 내 기도가 통했는지 고속도로로 접어들기 전 마지막 신호에 딱 걸리더군. 기회가 왔는데도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었지. 그래도 기어이 난 차문을 열고 도망쳤어. 아마 그때 차가 그대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유진이 남의 이야기하듯 한 숨을 한 번 쉬고는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넌 그 속물이랑 끝까지 간 거니?”

 

혜신이 어쩌면 피하려고 했던 뒷이야기를 유진은 유진답게 파고 들었다. 유진의 눈빛은 전혀 당황함이 없었다.

 

“그랬지. 갔어. 그런데 그때를 기억하면 참 이상해. 왜 그 사람 옆에서 술을 따르고 같이 잠자리까지 갔을까. 나는 내발로 거기를 걸어 나올 수도 있었지. 언니가 만난 그 사람처럼 내가 만났던 그 사람도 매너는 좋았거든. 하지만 내 몸은 그대로 사장과 이지로 팀장의 의도대로 움직였어. 어쩌면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 같은 게 있었을까? 난 그 무렵 직감했지. 나는 곧 이 시스템에서 배제될 거란 걸. 그럼에도 그 시스템에 분노하면서도, 거길 박차고 나오질 못했을까? 지난 시간들이 전부 날아가는 것이 두려웠겠지.

그 사람이 내 손을 잡고 호텔방으로 갔어.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 손이 따뜻했어. 조금 안도했고 평안했어. 거부하고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은 세상이 무서웠어. 그때 느꼈지. 세상은 힘없는 자를 누르는 방식에 있어 점점 더 세련되어 가는구나. 구역질나게.”

 

혜신의 눈에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서서히 맺혀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고여 있었던, 언제든 고름처럼 터져 나올 눈물이었다.

 

“이지로를 비롯한 모두를 증오했지만. 솔직히 한편으론 후회가 되기 시작했어. 왜 나는 별거도 아니면서 그들이 키워주는 방식에 충실하지 못했을까? 다른 애들처럼 오로지 그들만을 보고 믿었으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이지로는 똑똑한 사람이었어. 그 사람을 믿고 그대로 의지했다면, 그렇게 시스템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을 텐데.”

 

말을 잇지 못하는 혜신을 위해 유진이 입을 열었다.

 

“가끔 주위에서 그러더군. 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느냐고. 요즘은 그런 곳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실 나가지 않은 게 아니었어. 실제로 심사위원들 앞에도 서봤지.

솔직히 거기엔 내가 인정할만한 뮤지션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지. 난 다른 참가자들의 반응이 의아했어. 실력들이 정말 대단했거든. 긴 시간을 자신이 사랑해온 것들에 공을 들여온 사람들 말이야. 하지만 늘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판정을 기다리더군. 조금 건방지다면 건방지겠지만, 나에게 내 앞에 앉아있던 심사위원들은 모두 질투의 대상이었어. 벌써 저만큼 나아가고 다 이룬 사람들 말이야. 실력으로 갔던 운이 좋았던지 간에 지금은 나보다 한참을 앞서있는 사람들. 그래서 질투가 나고 어쩔 땐 화도 나지. 그러니까 그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기 싫었어.

 

누군가는 내 노래 부르는 걸 보며 불쾌한 투로 말하더라. 왜 그렇게 힘을 들여가며 부르냐고. 진실한 음악은 완전히 힘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나온다고. 맞긴 해. 힘이 많이 들어가는 거. 하지만 진실? 그 사람이 나에게 진실을 운운할 수 있나? 난 그때 정말 하나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불렀던 건데 말이지. 그 누구도 내 앞에서 실력을 운운할 순 있어도 진실을 이야기 할 순 없어.

 

무대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면서 느꼈지. 나는 아직도 많이 멀었다는 걸. 내 몸에서 끊어 오르는 질투와 인정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걸. 거기에 비해 나보다 어린 애들은 훨씬 나았어.

 

“언니와 그들의 차이가 뭐지?”

 

혜신이 겨우 눈물을 그치고 유진의 말에 집중했다.

 

“질투를 극복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질투를 느끼는 상대를 완전히 존경의 대상으로 바꾸는 거야. 요즘 아이들은 그걸 알더군. 자신이 가진 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을 바꿔줄 누군가가 더 소중하다는 걸. 실제로 그래. 그렇게 상대를 존경의 대상에 놓으면 모든 걱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지. 신을 만난 사람처럼, 마약을 먹은 것처럼, 오로지 그 사람만 바라보면 되는 거야.”

 

“자기 것을 품으면 혼나는 세상이야. 모두들 그래. 네가 생각하는 너를 내려놔라. 우리가 너의 진짜 색을 찾아주겠다. 확실히 효과가 있긴 해. 정말 퀄리티가 바뀌거든. 그게 진정한 퀄리티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우린 완전 바보인거네.”

 

“바보. 그걸, 이제 알았어?”

 

혜신이 어느새 눈물을 닦고 여유를 찾았다. 유진이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혜신을 바라보았다.

 

6

 

이지로가 알려준 스튜디오는 신사동에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겨우 찾아낸 곳은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유사한 지하실이었다. 하지만 차원이 틀렸다. 그들의 공간이 유희와 소비적이었다면 그곳은 다분히 생산과 업무의 공간이었다.

 

천정엔 조명들이 달려있었고 정면엔 커다란 카메라가 있었다. 뒷벽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넷은 그 벽 앞에 섰다. 그리고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여러 포즈를 취했다. 감독은 특히 유진과 혜신을 많이 테스트 했는데 혜신이 기존의 시스템에 적응했던 탓인지 자연스러웠다면 유진은 뭔가 위태위태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겼다. 감독은 유진의 정면과 오른쪽 그리고 왼쪽 얼굴을 카메라에 담고 유심히 관찰했다. 무슨 이유인지 오른쪽 보다 왼쪽이 낫다고 했고 감독은 유진에게 치렁치렁하게 늘어져있던 머리칼을 머리위로 틀어 올리게 했다. 목선과 턱선 따위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감독과 이지로가 바짝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지로는 곧 넷을 자신의 회사로 불렀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수는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선 여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전혀 들뜨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사람처럼 고요하기까지 했다.

언젠가 유진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심정은 이래. 절대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것과 꼭 해내고 싶은 것이 똑같은 크기로 눈 앞에 있어. 보통은 어느 한쪽이 크잖아. 절대 해낼 수 없는 것이 너무 크면 포기하게 되고 꼭 해내고 싶은 것이 크면 도전을 이어가지. 지금은 절대적인 반반이야. 어떤 하루는 아무것도 안 될 거라는 좌절감, 또 하루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가득 차. 어두운 터널에 발을 내밀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마다 두렵고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왔지. 그런데도 오늘 같은 날은 빛은 보이질 않아. 그래도 어떻해? 주저앉을 수 없고 돌아설 수도 없으니 그냥 걸어 나가는 거지.”

 

어쩌면 지금 그토록 기다리던 한줄기 빛이 유진에게 비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잠시 후에 감독이 합석했다. 이지로는 감독이 앉자마자 말했다.

 

“찍어서 갑시다.”

 

원래 이지로는 모델 제안 정도만 생각했다. 모델과 함께, 만들게 될 광고를 이미지와 스토리 보드 중심으로 제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지로는 승부수를 던지 것이다. 실제로 완성된 광고를 만들어서 제시하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였다. 피티를 받는 광고주 입장에선 제작비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 최대한 경제적으로 제작한다고 해도 족히 억을 넘길 것이다. 하지만 선택이 옳았다면 보여주는 것만으로 다른 회사의 제안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랬습니다. 제가 가진 소스가 있으니 최대한 인물 위주로 찍어서 편집을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감독 역시도 유진에 대한 인상이 강렬했던 것일까? 그저 이지로에 맞춰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감독입장에선 시안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이윤은 더 많이 남는다. 결코 나쁠 게 없다. 대행사의 제안을 거절 할 이유는 없었다. 감독은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을 설명했다.

 

일렉트로닉 음악에 아방가르드한 느낌과 몽환적인 매력을 살립니다. 이지로는 그저 고개만 까닥거릴 뿐 쉽게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때 유진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노래 부르는 걸 찍어요. 그냥 그런 걸 찍는 편이 나을 거예요.”

 

마치 예전에 작업을 해본 것처럼 말했다.

 

“자신 있어?”

 

감독이 건방지다는 듯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를 잡아주면 뭔가를 뽑아낼 수 있을 거예요.”

 

유진이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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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럽에 놀러 왔나봐.”

 

마치 어제 만난 사람처럼 말을 건넸다. 술에 취한 듯 약간 비틀거리는 이지로는 야비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클럽에 올 복장은 아니었다. 정장에 넥타이까지 맸다.

 

“수한테 들었어요. 같이 일한다죠.”

 

이지로가 다소 놀란 듯 혜신을 봤다.

“맞아 니가 친구였구나. 이런 우연이 있나. 역시 비슷한 애들은 비슷하게 만나는 법인가봐.”

 

“요즘도 무슨 프로젝트 중이라죠.”

 

“수가 그런 것도 이야기하던가?”

 

“이번엔 대부업 같은 건 아니라며 좋아하던데요.”

 

“너도 대부업 광고나 해주는 업자라고 우습게 아는구나.”

 

이지로가 이를 드러내며 한층 더 비열하게 웃었다.

 

“그런 적은 없어요. 과거는 과거고 일은 일이니까.”

혜신이 인사도 없이 돌아섰다.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1층 스테이지에서 여전히 몽과 유진 이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혜신이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지로가 어느새 다가와 있었다.

 

“친구들 말이야. 참 독특해. 난 너도 꽤나 독특하다고 생각했지.”

 

“내 개성 같은 건 안중에서 없었어요.”

 

“네가 생각하는 개성과 내가 발견한 개성이 좀 달랐지.”

 

“내가 생각하는 건 들어보려고도 안했죠.”

 

“물론 그랬지. 그건 유치한 발상이었으니까. 안 그래? 이제 시간이 흘렀으니까 알 때도 되지 않았나? 아마추어란 자신이 가진 뭔가를 쥐고 놓지 않는 사람이란 걸 말이야.”

 

이지로는 테이블에 앉아 았는 혜신에게 등을 내보인 채 난간에 기대어 스테이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너도 실패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깨끗하게 실패했지. 그러니까 너무 몰아세우진 말아줘. 너를 이용해 성공한 것도 아니잖니?”

 

이지로가 그 자세 그대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다시 말하지만 넌 확실히 눈에 걸리는 구석이 있었어. 그 시절 사장은 널 그저 그런 광고모델정도로 생각했지만 말이야.”

 

이번엔 이지로가 혜신을 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이지로가 완전히 사라진 후 둘의 만남을 지켜보았던 수가 자리로 돌아왔다.

 

심야의 술집 테이블은 어느새 오디션장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피티를 앞두고 이지로도 가만히 있을 수만 없었다. 자신도 홍대나 트랜디한 지역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이지로가 앉아 있는 맞은 편엔 수와 몽과 혜신 그리고 유진이 나란히 앉았다.

 

이지로의 눈길을 끈 건은 단연 유진이었다. 수는 혜신과 불편한 관계의 인간임을 진작알고 있었지만 유진은 이제야 냄새를 맡은 듯 보였다. 혜신은 거의 정신을 잃고 테이블 위에 엎어진 상태였다. 간단한 인사 후에 몽과 유진이 혜신을 부축해서 클럽을 나가는 동안 수와 이지로만 테이블에 남았다.

 

“우리 중 누군가를 광고 모델로 쓰겠다는 건가요?”

 

“글쎄, 흥미는 있어보였어. 후보로 말이야.”

 

“그건 우리의 진면목은 아닐 텐데요.”

 

수가 당차게 되받았다.

 

“진면목? 그래? 그럼 어떤 모습이 진면목이지? 노래 부르는 모습? 연주하는 모습?

음반은 내봤나? 오디션 프로에 나가서 생방송이라도 해본건가?“

 

이지로가 쏘아 부쳤다. 그도 술에 많이 취한 듯 보였다.

 

“아니요. 어쩌면 그쪽이 말씀하신게 우리의 진면목일 수도 있어요,”

 

유진과 혜신을 보내고 다시 들어온 몽이 끼어들었다.

 

“그래? 진면목이라면?”

 

“우리들이 놀던 모습이요.”

 

이지로는 너털 웃고는 담배를 물었다.

 

“어쨌든 난 검은 옷의 그 아가씨가 눈에 띄었어. 어떤 에너지가 특별하다고 느꼈지. 자네도 꽤 재밌는 캐릭터고 앞에 있는 이 친구는 내가 좀 아는 친구인데다 쓰러졌던 그 아가씨도 잘 알고 있지.

난 자네가 뭘 하는지 뭘 말하고 싶은지는 몰라. 솔직히 말해 관심도 없어. 세상이 그렇지 않아? 단지 보이는 것만 본다고.“

 

“아까 그 모습이 우리의 진면목이죠. 아직 밴드를 만든 것도 아니고. 세상에 내놓을 곡이 있는 것도 아니죠. 그저 하루하루 즐겁게 노래 부르고 사는 것, 그 정도밖엔 아직 할 줄 아는게 없어요.”

 

“솔직해서 좋구만. 그래 어쨌든 그런 걸로도 세상에 내보일 것이 있다면, 그거로도 훌륭하지 않아? 수와 잘 이야기해 보라구.”

 

이지로는 남은 맥주를 들이키더니 몽과 수를 남겨두고 그대로 밖으로 사라졌다.

 

 

5

 

혜신의 집은 겨우 두 번째인데도 낯설지가 않았다. 유진은 혜신을 겨우 침대에 눕히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 다 듣고 있었어. 잠들었던 게 아니라.”

 

혜신이 웅크린 자세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그 사람 너랑 꽤 불편한 관계였나 봐.“

 

“자신은 대단한 기획가라고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다 속물이었어.”

 

“어떤 뜻에서?”

 

“사장과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언젠가 나를 보고 관심을 가졌나봐. 근데 이지로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는 거야. 알고 봤더니 사장과 그 친구가 술을 마시는 자리였어. 물론 나에게 술을 따르라는 둥 그런 일은 시키지 않았지.”

 

“그럼 뭐가 문제였지?

 

“사장이랑 이지로가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어. 그 사람과 둘만 남게 된 거지.”

 

“암묵적인 접대명령?”

 

“그런 거 같아. 그때가 내가 속한 팀이 슬슬 프로젝트에서 배제되기 시작할 무렵이었어. 어쨌든 그들이 나를 마지막으로 활용할 용도를 찾았다는 느낌이 들었지. 어쩌면 내가 그 사람을 스폰서 삼기위해 적극적으로 술도 마시고 잠자리까지 가는 그런 걸 당연하게 생각했는지도 몰라. 내가 그땐 세상물정을 몰랐지. 그게 나에게 주는 암묵적인 기회인지도 모르고.”

혜신은 머뭇거리더니 결론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다만 질문으로 자신의 뒷이야기를 비껴갔다.

 

“언니도 어지간히 속물들에 꼬이지 않았어?”

 

“난 이런 적이 있었지. 그땐 직장도 없었고 먹고 살기가 빠듯했어. 면접을 봤는데 사장이란 사람이 인상이 나쁘진 않았지. 그런데 그 사람 채용하겠다는 말을 안하고 나에게 은밀한 제안을 하는 거야. 난 직감적으로 성매매 같은 걸 예상했지. 결과는 뭐 비슷했지만 좀 특이했어.

 

“일반적인 성매매는 아니었다는 건가?”

 

“섹스는 하지 않겠다. 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럼?”

 

유진이 좀 황당하다는 지으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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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연주가 시작되었다. 비주얼들과는 달리 연주만큼은 기계처럼 정교했다. 마치 수 십 년을 맞춰온 밴드처럼 자연스러웠다. 초반에는 70년대 하드록 밴드들의 곡들을 연주했고 뒤로 갈수록 자신들이 만든 곡들을 연주했다.

 

마지막 곡은 경쾌하고 직선적인 느낌에서 벗어나 몽환적이고도 음울한 느낌의 해먼드 오르간의 연주로 시작했다. 악마를 모셔오는 듯한 엄숙함이 지하공간의 밑바닥까지 낮게 가라앉았다. 딥퍼플의 명곡 ‘차일드 인 타임(Child in time)'이었다.

 

중반 이후부터 보컬은 ‘우~우우’와 ‘아~아아’와 같은 흐느낌만으로 노래를 채웠다. 키보드의 반주는 점차 음역대를 높여가며 동일한 멜로디 라인을 연주했다. 키보드가 마치 보컬의 발성연습을 시키는 것 같았다. 멈추지 않는 키보드의 행진이 보컬의 에너지를 마지막까지 짜내려 했다. 보컬의 음은 ‘우우우’ 같은 읊조림에 가까운 흐느낌으로, 중반엔 절규로 바뀌었고 후반부엔 비명에 가까워졌다. 보컬은 초고음역대에 이르자 노래를 멈췄다. 상승을 멈추지 않는 악기들만이 연주를 이어갔다. 저 나이에 저런 음역대를 소화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번 저렇게 실패하면서도 연주는 계속되었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연주는 계속될 것이다. 키보드 주자는 곡의 흐름을 바꿔서 베토벤의 ‘엘리제의 위하여’를 연주하는 것으로 여유를 부렸다.

 

마지막에는 격렬한 기타 솔로 연주가 있었다. 파워와 몰입도에 있어서 리치 블랙모어가 연주했던 원곡에 전혀 밀리지 않았다. 유진이 알고 있다던 기타리스트를 수는 유심히 보았다. 노쇠해가는 육체 속에서도 날카로운 연주는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물리적인 노쇠는 피할 수 없지만 정신의 젊음은 단지 열심히 부지런히 닦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바탕 공연이 끝났다. 관객과 뮤지션이 따로 없었다. 듣는 사람이 곧 연주자가 되고 연주자는 곧 듣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수 일행처럼 듣기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문제될 것은 없었다.

 

정식 공연 이후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있었고 무대에 올라와 부르고 싶은 곡을 부르거나 즉석 잼을 하는 밴드도 있었다. 유진이 구면인 기타리스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기타리스트 역시 유진을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그런 인연으로 그 팀과 수 일행이 합석하게 되었다.

 

그들은 ‘노인과 바다’로 불렸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나오는 노인처럼 얻는 것은 없지만 끝까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이 비슷했다. 그 이름이 정식 밴드명은 아니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밴드를 이뤘지만 정식 밴드명은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곡에 도전하는 이유가 뭐예요?”

 

멤버 중 가장 무게감 있어 보이던 베이시스트가 대답했다.

 

“그래, 그건 확실히 우리 나이에 무리야. 하지만 악착까지 부르지. 오기 같은 거야.”

 

“무엇과 그렇게 싸우는 겁니까?“

 

수가 물었다.

 

“뭐? 음악 하는 놈들이 싸우긴 왜 싸워? 그냥 즐기고 놀지. 그렇게 목이 안 따라주는 현실까지도 즐기는 거야. 왜? 나이든 게 서글퍼 보여? 그러고 보니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있다면 즐거움을 방해하는 것들이지.”

 

“싸운다는 것도 말은 되지. 어쩌면 우리 인생은 싸움으로 점철된 거야. 그냥 놀려고 해도 세상이 우리를 놀게 내버려두지 않지.”

 

보컬의 대답에 드러머가 맥주 뭍은 입가를 닦으며 끼어들었다.

 

“정말 논다는 게 뭔지 아나?”

 

구석에서 무게를 잡으며 말을 아끼던 보컬이 무거운 입을 열었다.

 

“논다는 건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니란 말이지. 진짜 놀이엔 슬픔이 서려있어. 광대의 웃음에 슬픔이 있는 것처럼 말이지. 그런 슬픔을 딛고 노는 것이 진짜 놀이야.”

 

혜신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기분 날 때만 놀아선 안 된다는 거지. 논다는 건 신념에 가까운 거야. 기쁘나 슬프나 화날 때나 배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언제나 노는 거야. 늘 노는 상태에 있는 거야. 그러다 보면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놀 수 있는 법을 배우지.”

 

“왜 그렇게 노는 거에 매달리세요?”

수가 묻자 보컬이 한숨을 쉬며 길게 담배를 뿜었다.

 

“이런 멍청이 같이. 지금껏 뭘 들은 거야! 노는 게 인생의 전부라니까.“

유진의 눈에 기타리스트의 안색은 예전 보다 좋아보였다.

 

“좋은 친구를 둔거 같아.”

 

“아저씨도요.”

 

“그런 게 재산이지. 우리처럼 별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에겐 말이지.”

 

“행운이죠. 그러니까 세상은 공평한 거죠?”

 

노인은 웃으며 말했다.

 

“그걸 벌써 깨달아버린 거야?”

 

“그런데 왜 그땐 홀로 거리로 나오셨어요?”

 

“우리에게도 이런 저런 이유로 위기가 찾아오지. 늙으나 젊으나 갈등은 있기 마련이지. 우리 팀도 한동안 방황을 많이 했었어. 돈벌이나 하고 살자는 생각도 했고 그래서 거리를 떠돌아본 거야. 물론 젊었을 때도 그랬지만 나이가 먹어도 철이 들지 않나봐. 늘 사는 게 그래.

 

“늙은 날의 방황, 나쁘지 않은데요.”

 

“그런가?”

 

“굳어버리는 건 슬픈 일이니까요.”

 

“하긴, 이젠 손가락도 예전 같지 않아.”

 

젊은 노인이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웃었다. 유진이 기타리스트와 떠드는 사이 수와 혜신 ,몽이 나머지 멤버들과 질펀한 술자리를 이어갔다. 노인들이 사라지자 술기운이 오른 아이들은 마포에서 홍대로 넘어갔다.

 

4

 

레이저 불빛이 현란한 무대 가운데로 몽이 모습을 드러냈다.

꽁지머리에 페도라를 썼다 벗어다하는 실루엣이 마이클 잭슨처럼 보였다. 유진이야 그 정도 술에 끄덕도 없었지만 혜신은 꽤 취해버렸다. 반복되는 리듬과 비트가 빠른 트랜스 음악 속에서 스테이지에 나온 사람들은 춤이라기보다 퍼포먼스에 가까운 행동을 보여줬다. 전위 예술가들의 집합소 같았다. 몽이 몸을 흔들며 이층에 자리 잡은 일행들을 향해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갑자기 수의 등짝을 때리는 손이 있었다. 유진이었다.

 

“이렇게 자리나 지킬 거면 오지도 않았을 거야.

 

유진과 수가 스테이지로 내려왔다. 마치 펄프픽션의 존 트라볼타가 우마서먼을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몽이 장난스럽게 고개를 들이밀며 유진에게 다가오자 유진도 느끼한 눈빛을 일부러 만들어 보였다. 그리곤 몸을 대책 없이 흔들기 시작했다. 별명이 ‘미친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수가 보기에도 둘은 확실히 자신에게 몰입하는 힘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몇 곱절은 강했다. 몽이 미친놈으로 불리진 않았던 건 유진의 몰입감이 한 수 위였기 때문일 것이다. 유진은 짧고 타이트한 검정색 티셔츠 자락을 살짝 쥐고는 마치 배꼽을 드러낼 것처럼 들어올렸다. 풍성한 머리를 살짝 흔들기도 하다가 감정이 오르면 과감하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녀가 뿜고 있는 내면의 에너지까지 더해지니 신비스런 아우라가 움직이는 그녀의 둘레를 감싸고 있었다.

 

몽이 장난스런 모습에 머문 반면 유진은 좀 기괴하고 파괴적인 면이 있었다. 몽과 유진이 아슬아슬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몽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몽은 유진의 허리를 부여잡기도 했고 스키니한 청바지 라인을 손으로 쓸어내리기도 했다. 유진이 킥킥거리는 몽을 향해 니킥이라도 하듯 몽의 배를 향해 무릎을 들어 올리자 몽이 얼른 유진의 다리를 잡아 자신의 허리에 붙였다.

 

가까이선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적당한 거리에서 보면 둘은 옥신각신하며 충분히 즐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스테이지 주변을 서성이며 둘의 춤에 한동안 정신이 팔려있던 수가 문득 2층의 테이블을 올려다 봤다. 혜신이 보이지 않았다.

혜신은 자신의 어깨에 손이 닿자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거기엔 단박에 술을 깨울만한 인물이 서있었다. 요즘 원수는 화장실 앞 복도에서 만나는 건지도 몰랐다. 혜신의 눈앞에 있는 건 한때는 자신의 매니저였던 이지로였다. 혜신이 한동안 말없이 그를 보는 동안 이지로는 천천히 담뱃불을 붙이는 여유를 보였다. 담배연기를 그녀에게 훅 뿜지 않은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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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적당한 햇빛과 구름이 어우러진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었다. 평상 위에 눕자 엄청난 공간이 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유진이 건물주에게 잘 이야기한 덕분에 특별히 개방된 옥상이었다. 햇살이 좋을 땐 직접 내린 커피를 들고서 이곳에 오는 게 큰 위안이 되었다. 건물은 낡을 대로 낡았다. 최근 경기를 반영하는 듯 빈 층도 많았다. 수는 하늘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잠시 긴장의 끈을 내려놓았던지 꽤 달콤한 잠이 찾아왔다.

 

언제부터인지 유진과 몽, 혜신까지 모두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셋은 장난을 치고 있었다. 뭔가 즐거운 일이 있는 듯 셋은 유쾌하게 웃으며 옥상 위를 뛰어다녔다. 수는 그들 틈에 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몸이 피곤했고 그저 그들을 바라만 보고 싶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수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볼륨을 소거한 채 비디오 화면을 보는 것 같았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몽이 물 호스를 가져와 뿌려대기 시작했다. 저런, 여긴 잔디밭도 아닌데. 혜신과 유진이 물에 흠뻑 젖자 둘은 다시 몽을 공격했다. 엎치락 뒤치락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 듯이 그렇게 장난을 치는 동안 옥상 위로 다시 사람들이 나타났다. 모히칸과 경호 그리고 형섭까지 나타났다.

 

수는 형섭을 보는 순간 숨이 컥 막혔다. 일어나고 싶은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수는 저항을 그만 두고 그저 지켜보기로 했다. 아이들은 겉치레 같은 인사는 생략하고 모이는 데로 놀이에 뛰어들었다. 서로 물을 뿌리고 술래잡기를 했다. 수는 형섭을 자세히 보려 애썼다. 그도 많이 커버렸다. 키는 더 훌쩍 자랐다. 왜 이제 나타난 거니. 하지만 형섭은 아이들과 어울릴 뿐 수를 보지 못했다.

 

겨우 눈을 떴을 땐 역시 파란 하늘 아래 있었다. 평상의 반대 끝엔 유진이 엉덩이를 걸치고 기타를 튕기고 있었다. 수는 그것이 길몽인지 흉몽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기분이 좋은 듯 했지만 슬프기도 했고 아련하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시원한 바람에 머리를 맡겼다. 혜신이 옥상 난간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날씨가 차가워 졌는지 원피스 위에 스카프 대신 카디건을 걸쳤다. 부는 바람에 머리칼이 날리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몽이 올라왔다. 유진이 부탁한 빨래들을 짊어지고 와서는 하나씩 널기 시작했다. 유진은 자주 이불들을 빨아서 널었다. 몽은 요즘 부쩍 머리가 많이 길어져서 질끈 묶고 다녔다. 군대를 다녀온 후 짧은 머리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특유의 축 처진 눈은 여전했고 가슴팍이 많이 파여진 티셔츠와 어디서 구해왔는지 굽이 10센티는 되어 보이는 워커를 신고 빨래를 널고 있었다.

 

현실은 평온했다. 여러 가지 코드를 바꿔가며 들릴 듯 말 듯 줄을 튕기는 유진의 기타소리 외엔 다른 소리는 없었다. 지금은 모두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꿈에서 그렇게 뛰어놀던 아이들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수는 셋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 진짜 잘 생겼지?”

 

눈이 마주친 몽이 느끼한 윙크를 날렸다. 무례하게 동의를 구하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수는 오늘만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뒤끝이 은근이 있는 녀석이니까.

 

혜신이 추워졌는지 머그잔을 들고 먼저 사라졌다. 몽이 사라지고 유진도 사라졌다. 아마도 모두들 연습준비를 할 것이다. 수를 기다리거나 어쩌면 자기들끼리 먼저 맞춰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규칙은 없었다. 다만 규칙적인 행동들이 꾸준히 적립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3

 

클럽 킬리만자로.

 

몽이 소개한 그곳은 홍대에서 조금 떨어진 마포근처였다. 골목길을 헤집고 들어간 곳은 수 일행이 거처하는 곳과 비슷한 허름한 건물 지하였다. 아크릴로 조악하게 붙여놓은 간판이 보였다. 이런 곳은 둘 중 하나였다. 깜짝 놀랄만한 음악이 나오거나 아예 꽝이거나.

 

몽이 앞장서 지하계단을 내려갔다. 철문을 밀고 들어가니 어두컴컴한 공간이 드러났다. 정면에 밴드가 공연할 수 있는 자그마한 스테이지가 있었고 스테이지 옆으로 바가 있었다. 바 앞으로 테이블이 대여섯 개가 조밀하게 붙어있었다.

 

“운이 좋은 편이야. 조금만 늦으면 앉을 자리가 없다고.”

 

꽉 들어차야 서른 명 정도가 될까? 6시가 다가오자 자리가 차기 시작했다. 다들 악기를 들거나 메고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했고 간단한 음료를 마시거나 김밥이나 빵으로 요기를 했다. 특별히 뭘 주문하고 내오고하는 건 없었다. 시킬 수 있는 건 병맥주나 콜라 정도가 전부인 듯 했다.

 

6시가 되자 순서라도 정한 듯 팀별로 공연이 시작되었다. 첫 타자가 통기타 하나만 들고 무대로 올라왔다. 얼핏 보아도 서른 중반정도 보이는 아저씨였고 옷차림은 놀랍게도 정장 자켓과 정장바지를 입었다. 그가 들려주는 음악은 의외였다. 블루스인지 재즈인지 흑인 필이 강한 기타 반주에 자신이 만든 곡을 불렀다. 기타 솜씨는 훌륭했지만 소위 된장녀를 비하하는 가사는 장난스러웠다. 다들 낄낄거리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 뒤로 밴드 공연이 이어졌다. 키보드와 베이스로만 이뤄진 팀은 몽환적이고 탐미적인 음악을 들려주었고 일본 펑크밴드처럼 보였던 3인조 밴드는 진짜 일본 젊은이들로 이뤄진 팀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로 등장하는 밴드가 있었다.

 

“저분들이 이곳의 주인이자 메인 밴드지.”

 

몽이 손짓하는 곳에서 다섯 명의 연주자들이 등장했다. 놀랍게도 중년을 넘어 이제 거의 노년에 가까운 사나이들이 등장했다. 청바지에 해골 무늬가 들어간 티셔츠를 입은 남자, 가죽바지에 징이 박힌 부츠를 신고 백발이 섞인 긴 머리를 묶지도 않고 길게 늘어뜨린 남자. 자신들의 기분대로 자신들을 꾸몄지만 어쩐지 전혀 꾸밈이 없어 보였다. 긴 세월 고생을 많이 한 듯 주름이 지고 얼굴빛이 거뭇거뭇했다.

 

“아! 저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유진이 무대의 한 사람을 쳐다보고 손짓했다. 멤버 중 가장 수수한 차림에 기타를 맨 남자였다.

 

“예전 홍대에서 노래할 때 내 옆에서 같이 기타를 치셨던 분이야.”

 

“저분, 이 바닥에선 꽤 유명해. 기타리스트 황석호 알지? 그분 형님이란 말이지.”

 

“실력은 어쩌면 저분이 더 좋을지 몰라. 밖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몽이 유진과 수를 보며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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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지상으로

 

 

 

Cardigans, Love Fool

Deep Purple, Child In Time

Duke Jordan, Everything Happens To Me

 

 

 

 

 

1

먹고 살아야할 거 아니야?

 

이지로의 문자를 받은 건 악마의 광고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약 두 달 동안 꽤나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개그 프로에선 그 광고를 패러디 했고 시사프로그램은 대부업 문제를 다뤘으며 교양 프로그램에서 대부업의 역사를 조명하기도 했다. 이지로쪽에서도 마냥 쾌재를 부른 건 아니었다.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나친 열풍으로 인해 타 광고 대행사들의 시선이 썩 곱지는 않았다. 저속한 크리에이티브라며,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광고라며 비난하는 크리에이터들도 많았다. 세간의 평가야 범법한 사실이 없었으므로 움츠려들 이지로가 아니었다. 어떻든 선풍적인 광고를 만든 저력은 평소보다 다양한 영업채널을 갖게 될 것이다. 광고를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타짜 카피라이터가 필요하실 텐데요.”

 

수는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함께 일하기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이제 숨겨두었던 재능에 눈을 뜬 건데 이대로 썩힐 거냐. 잘 생각해봐. 다 먹고 사는 문제니까.“

 

제안한 쪽도 먼저 전화를 끊는 쪽도 이지로였다. 이지로도 수의 근황에 대해 모르진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이지로 회사의 남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가 궤도에 올라서고 있으니 연봉수준도 괜찮을 것이고 근무방식도 예전 회사보다는 훨씬 자유로울 것이다. 막무가내인 이지로만 잘 다룬다면 말이다.

 

문제는 혜신이었다. 혜신에게 마음이 갈수록 이지로와 함께 일하기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비록 어떤 계약도 약속도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아 버린 생활이 되어 버렸다. 비록 당장 한 달 뒤를 생각하긴 어렵지만 지금 영위하는 이 생활을 객관적인 조건 때문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불안했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이제 열렸는데, 이수는 선뜻 그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

 

어제 문득 혜신이 말했었다. 다 안다는 것이 어디까지인가.

 

“네가 저번에 일해서 번 돈이 소중하게 쓰여 졌다는 걸 알아. 그땐 몽도 벌이가 시원찮았고 유진 언니도 아직 직장을 못 구했을 때니 그때 생활비는 대부분 네가 번 돈으로 충당했다는 걸. 나야 뭐 내 사정인 거고 넌 정당히 일하고 정당한 몫을 받는 거니까. 내가 불편해 한다고 생각하지마.”

 

그리고 돌아서며 다시 한마디 했다.

 

“일단 버는 사람이 벌어줘야 우리도 이 생활을 좀 더 즐길 수 있잖아.”

 

혜신이 메롱을 하며 달아나듯 밖으로 나갔다.

수가 보기에 세상일은 그랬다. 필요가 없을 땐 아예 쳐다보지 않다가도 한번 눈에 띄기 시작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싶으면, 집요하게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 애썼다. 지금 수는 자신을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 내려는 세상의 끈질김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음악은 잘 되어가나?

 

달라진 건 없었다. 회사의 광고가 히트를 쳤지만 회사도 그대로고 사장도 그대로였다. 말투도 행동도. 잘 되어가나, 에 대한 대답으로 잘 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일단 회사로 들어오란 말을 안 할 테니까. 일부터 하자. 자, 이번엔 좀 더 고상하고 품위있는 걸로.

 

수의 의견도 듣기 전에 결론부터 내려버리는 이지로의 태도가 거슬렸다. 하지만, 그랬다. 일단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줘야 한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지로가 브리프를 내밀었다. ‘트리니티(Trinity)’라는 SPA 브랜드, 일명 패스트 패션 브랜드였다. 한 유럽의 패션 브랜드가 국내에 런칭을 하는 데 거기에 필요한 광고피티가 되는 셈이다.

 

“이번에도 역시 자유분방한 영혼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지로가 담배를 물며 몸을 돌렸다.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자 자신의 생각도 거기에 타고 있는지 한동안 연기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저인간은.’

 

패션 쪽이라면 혜신이 잘 알 텐데. 혜신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까? 광고 제안엔 아무런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심지어 예산까지도. 그것이 어쩌면 국내 브랜드와 다른 면일지 몰랐다. 예산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따로 없다는 것은 그만큼 돈을 퍼부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신의 브랜드가 갖고 있는 장단점과 기회, 혹은 위협 요소를 잘 파악하여 최적의 예산을 제안해 달라는 뜻이다. 상대가 가진 전문성을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분명 돈을 많이 쓰는 건 반대할 거야. 윗선의 생각은 몰라도 마켓팅 실무 쪽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아마도 이지로가 그쪽 업체의 누군가와 미리 접촉을 했을 것이다. 대략적인 느낌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래서 말인데. 사실 널 부른 건 조금 다른 문제야. 난 이미 이 광고가 접근해야 될 방향엔 확신이 섰어. 일반적인 광고형태는 안될 것 같아. 가령 패스트 패션 브랜드라면 싼 가격에 괜찮은 패션감을 내세우잖아. 내가 보기엔 그런 전략은 이 브랜드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이 브랜드쯤 되면 국내에 매장은 없어도 이미 알만한 애들은 해외구매 같은 걸로 많이들 알 테니까.”

 

이지로가 다시 숨을 고르며 담배를 다시 물었다. 제법 긴 장초를 비벼 끄더니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는 다급히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말이 필요없는 광고를 만들고 싶은거야. 노이즈를 일으킬만한”

 

“말하자면 90년대 말 닉스 광고 같은 거요?”

 

“그렇지. 그 광고가 한편의 뮤직비디오였지. 그때 그 광고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론 의류광고가 확 줄었지. 난 이 브랜드도 그런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말이 필요 없이 감각에만 호소하는 광고.”

 

“그래서 제가 할 역할이 뭔가요?”

 

“광고가 아닌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어떤 애들을 출연시키고 내용은 뭘로 하지? 물론 이런 건 감독하고 상의하는 게 맞지만 난 너와 네 주변인물들이 이런 감각에 더 닿아있을 거라 생각해. 어차피 이 브랜드의 핵심 타겟도 너희들 나이대 언저리니까.”

 

회사를 나오면서 수는 매번 당황하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늘 생각지도 않은 과제들이 주어지는 걸까. 이번 건도 도무지 머리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늘 준비된 대로 온다면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늘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수는 생각을 추스르느라 이미 가로수길이 있는 신사동을 지나가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패스트 패션을 선호하지 않아.“

 

어렵게 꺼낸 일 이야기에 혜신은 싫다, 좋다 보다 먼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이야기했다.

 

“개성들이 강하기 때문에 대량생산한 옷들을 별로 좋아하질 않지. 그래도 글로벌 시대니까 프랑스에서도 그런 브랜드가 생기는 건 놀랄 일은 아니지. 이미 들어본 브랜드이긴 해. 하지만 너네 사장님 말대로 일반 SPA와는 좀 다른 거 같아.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지도 않고 그다지 대중적인 스타일도 아닌 것 같아. 그래서 20대 중반 이후를 노린다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어. 아무튼 20대들이 원하는 것, 그런 이상향을 잘 반영해 주는 광고. 뭐 그런 게 아닐까?”

 

혜신이 생각보다 전략적인 언급을 했다. 수는 차라리 속이 후련했다. 둘 다 어느 정도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싫은 것도 감내해 가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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