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 구체적으로 밝히진 않더군. 하지만 대충 생각나는 것들이 있지 않니?”

 

“어쩜. 변태새끼!”

 

“돈은 충분히 주겠다는 거야. 사실 액수가 좀 많긴 했어. 순간적으로 유혹에 넘어갔지. 언듯 생각해보니 기껏해야 두들겨 맞는 거 아닐까. 아니면 뭐 이상한 걸 입히는 것? 학교 다닐 때도 그 정도 맞는 건 뭐, 회초리로 맞는 건 양반이었어. 지금껏 살면서 맞은 거 생각하면……이게 웬 떡이냐, 그런 생각도 들었지. 솔직히 성매매였다고 해도 어쩜, 그땐 넘어갔을 지도 몰라. 그 정도로 배가 고팠어.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그런데 이렇게 버티다 굶어 죽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 때였지. 그럴 때 남은 몸뚱이 하나 지켜봤자 뭐하냐, 는 생각은 당연한 거 아니겠어. 일단 먹고 자는 것부터 해결하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하루정도는 집에 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그런 게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자의 제안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에 홀렸는지 난 그러겠다고 하고 그 사람 차에 올라탔지. 차에 둘만 남았는데도 그 사람 전혀 흥분하거나 하는 기색이 없었어. 그날따라 가을 하늘이 맑고 청명했지. 문이 두개 달린 차도 근사했고. 그런데 차를 출발하기 위해 시동을 거니 음악이 흘러나오더라. 근데 그때 음악이 너무 좋았어. 재즈풍의 피아노곡이었는데, 누구의 작품인지는 몰랐지만. 그땐 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지. 이정도의 음악을 들려줄 인간이면 믿어도 된다. 그런 마음으로 그 곡을 집중해서 들었지. 그런데 음악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조잡한 광고가 나오는 거야.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어. 이 사람이 튼 음악이 아니라 우연히 라디오가 들려준 음악이었다는 걸. 그래서 순간적으로 기도했지. 만약 이 차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선다면 주저 없이 문을 열고 도망가겠다고. 그날따라 차는 쌩쌩 달리더군.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통하는 고속도로를 향해 달렸어. 근데 그때 내 기도가 통했는지 고속도로로 접어들기 전 마지막 신호에 딱 걸리더군. 기회가 왔는데도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었지. 그래도 기어이 난 차문을 열고 도망쳤어. 아마 그때 차가 그대로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유진이 남의 이야기하듯 한 숨을 한 번 쉬고는 팔짱을 낀 채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넌 그 속물이랑 끝까지 간 거니?”

 

혜신이 어쩌면 피하려고 했던 뒷이야기를 유진은 유진답게 파고 들었다. 유진의 눈빛은 전혀 당황함이 없었다.

 

“그랬지. 갔어. 그런데 그때를 기억하면 참 이상해. 왜 그 사람 옆에서 술을 따르고 같이 잠자리까지 갔을까. 나는 내발로 거기를 걸어 나올 수도 있었지. 언니가 만난 그 사람처럼 내가 만났던 그 사람도 매너는 좋았거든. 하지만 내 몸은 그대로 사장과 이지로 팀장의 의도대로 움직였어. 어쩌면 여기서 살아남아야겠다는 본능 같은 게 있었을까? 난 그 무렵 직감했지. 나는 곧 이 시스템에서 배제될 거란 걸. 그럼에도 그 시스템에 분노하면서도, 거길 박차고 나오질 못했을까? 지난 시간들이 전부 날아가는 것이 두려웠겠지.

그 사람이 내 손을 잡고 호텔방으로 갔어. 솔직히 말하면, 그 사람 손이 따뜻했어. 조금 안도했고 평안했어. 거부하고 싶었지만 거부할 수 없게끔 만들어 놓은 세상이 무서웠어. 그때 느꼈지. 세상은 힘없는 자를 누르는 방식에 있어 점점 더 세련되어 가는구나. 구역질나게.”

 

혜신의 눈에서 굵은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서서히 맺혀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고여 있었던, 언제든 고름처럼 터져 나올 눈물이었다.

 

“이지로를 비롯한 모두를 증오했지만. 솔직히 한편으론 후회가 되기 시작했어. 왜 나는 별거도 아니면서 그들이 키워주는 방식에 충실하지 못했을까? 다른 애들처럼 오로지 그들만을 보고 믿었으면 되지 않았을까? 사실 이지로는 똑똑한 사람이었어. 그 사람을 믿고 그대로 의지했다면, 그렇게 시스템 밖으로 밀려나지 않았을 텐데.”

 

말을 잇지 못하는 혜신을 위해 유진이 입을 열었다.

 

“가끔 주위에서 그러더군. 왜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지 않느냐고. 요즘은 그런 곳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사실 나가지 않은 게 아니었어. 실제로 심사위원들 앞에도 서봤지.

솔직히 거기엔 내가 인정할만한 뮤지션도 있었고 아닌 사람도 있었지. 난 다른 참가자들의 반응이 의아했어. 실력들이 정말 대단했거든. 긴 시간을 자신이 사랑해온 것들에 공을 들여온 사람들 말이야. 하지만 늘 자신의 차례가 끝나면 무슨 죄나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판정을 기다리더군. 조금 건방지다면 건방지겠지만, 나에게 내 앞에 앉아있던 심사위원들은 모두 질투의 대상이었어. 벌써 저만큼 나아가고 다 이룬 사람들 말이야. 실력으로 갔던 운이 좋았던지 간에 지금은 나보다 한참을 앞서있는 사람들. 그래서 질투가 나고 어쩔 땐 화도 나지. 그러니까 그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기 싫었어.

 

누군가는 내 노래 부르는 걸 보며 불쾌한 투로 말하더라. 왜 그렇게 힘을 들여가며 부르냐고. 진실한 음악은 완전히 힘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나온다고. 맞긴 해. 힘이 많이 들어가는 거. 하지만 진실? 그 사람이 나에게 진실을 운운할 수 있나? 난 그때 정말 하나도 꾸밈없이 있는 그대로 불렀던 건데 말이지. 그 누구도 내 앞에서 실력을 운운할 순 있어도 진실을 이야기 할 순 없어.

 

무대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면서 느꼈지. 나는 아직도 많이 멀었다는 걸. 내 몸에서 끊어 오르는 질투와 인정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분노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걸. 거기에 비해 나보다 어린 애들은 훨씬 나았어.

 

“언니와 그들의 차이가 뭐지?”

 

혜신이 겨우 눈물을 그치고 유진의 말에 집중했다.

 

“질투를 극복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질투를 느끼는 상대를 완전히 존경의 대상으로 바꾸는 거야. 요즘 아이들은 그걸 알더군. 자신이 가진 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을 바꿔줄 누군가가 더 소중하다는 걸. 실제로 그래. 그렇게 상대를 존경의 대상에 놓으면 모든 걱정이 다 사라지는 것 같지. 신을 만난 사람처럼, 마약을 먹은 것처럼, 오로지 그 사람만 바라보면 되는 거야.”

 

“자기 것을 품으면 혼나는 세상이야. 모두들 그래. 네가 생각하는 너를 내려놔라. 우리가 너의 진짜 색을 찾아주겠다. 확실히 효과가 있긴 해. 정말 퀄리티가 바뀌거든. 그게 진정한 퀄리티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우린 완전 바보인거네.”

 

“바보. 그걸, 이제 알았어?”

 

혜신이 어느새 눈물을 닦고 여유를 찾았다. 유진이 여전히 팔짱을 낀 채 혜신을 바라보았다.

 

6

 

이지로가 알려준 스튜디오는 신사동에 있었다. 골목길을 따라 겨우 찾아낸 곳은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과 유사한 지하실이었다. 하지만 차원이 틀렸다. 그들의 공간이 유희와 소비적이었다면 그곳은 다분히 생산과 업무의 공간이었다.

 

천정엔 조명들이 달려있었고 정면엔 커다란 카메라가 있었다. 뒷벽은 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넷은 그 벽 앞에 섰다. 그리고 감독이 지시하는 대로 여러 포즈를 취했다. 감독은 특히 유진과 혜신을 많이 테스트 했는데 혜신이 기존의 시스템에 적응했던 탓인지 자연스러웠다면 유진은 뭔가 위태위태하면서도 묘한 매력을 풍겼다. 감독은 유진의 정면과 오른쪽 그리고 왼쪽 얼굴을 카메라에 담고 유심히 관찰했다. 무슨 이유인지 오른쪽 보다 왼쪽이 낫다고 했고 감독은 유진에게 치렁치렁하게 늘어져있던 머리칼을 머리위로 틀어 올리게 했다. 목선과 턱선 따위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감독과 이지로가 바짝 붙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지로는 곧 넷을 자신의 회사로 불렀다.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수는 유진의 표정을 살폈다. 처음 카메라 앞에 선 여자가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전혀 들뜨지도 위축되지도 않았다.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사람처럼 고요하기까지 했다.

언젠가 유진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심정은 이래. 절대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것과 꼭 해내고 싶은 것이 똑같은 크기로 눈 앞에 있어. 보통은 어느 한쪽이 크잖아. 절대 해낼 수 없는 것이 너무 크면 포기하게 되고 꼭 해내고 싶은 것이 크면 도전을 이어가지. 지금은 절대적인 반반이야. 어떤 하루는 아무것도 안 될 거라는 좌절감, 또 하루는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으로 가득 차. 어두운 터널에 발을 내밀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 마다 두렵고 돌아가고 싶지만 이미 돌아가기엔 너무 많이 왔지. 그런데도 오늘 같은 날은 빛은 보이질 않아. 그래도 어떻해? 주저앉을 수 없고 돌아설 수도 없으니 그냥 걸어 나가는 거지.”

 

어쩌면 지금 그토록 기다리던 한줄기 빛이 유진에게 비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잠시 후에 감독이 합석했다. 이지로는 감독이 앉자마자 말했다.

 

“찍어서 갑시다.”

 

원래 이지로는 모델 제안 정도만 생각했다. 모델과 함께, 만들게 될 광고를 이미지와 스토리 보드 중심으로 제안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지로는 승부수를 던지 것이다. 실제로 완성된 광고를 만들어서 제시하는 것이다. 모 아니면 도였다. 피티를 받는 광고주 입장에선 제작비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 최대한 경제적으로 제작한다고 해도 족히 억을 넘길 것이다. 하지만 선택이 옳았다면 보여주는 것만으로 다른 회사의 제안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랬습니다. 제가 가진 소스가 있으니 최대한 인물 위주로 찍어서 편집을 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감독 역시도 유진에 대한 인상이 강렬했던 것일까? 그저 이지로에 맞춰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감독입장에선 시안을 영상으로 제작하면 이윤은 더 많이 남는다. 결코 나쁠 게 없다. 대행사의 제안을 거절 할 이유는 없었다. 감독은 자신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을 설명했다.

 

일렉트로닉 음악에 아방가르드한 느낌과 몽환적인 매력을 살립니다. 이지로는 그저 고개만 까닥거릴 뿐 쉽게 동의하지는 않았다. 그때 유진이 끼어들었다.

 

“우리가 노래 부르는 걸 찍어요. 그냥 그런 걸 찍는 편이 나을 거예요.”

 

마치 예전에 작업을 해본 것처럼 말했다.

 

“자신 있어?”

 

감독이 건방지다는 듯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를 잡아주면 뭔가를 뽑아낼 수 있을 거예요.”

 

유진이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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