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지상으로

 

 

 

Cardigans, Love Fool

Deep Purple, Child In Time

Duke Jordan, Everything Happens To Me

 

 

 

 

 

1

먹고 살아야할 거 아니야?

 

이지로의 문자를 받은 건 악마의 광고가 전국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약 두 달 동안 꽤나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개그 프로에선 그 광고를 패러디 했고 시사프로그램은 대부업 문제를 다뤘으며 교양 프로그램에서 대부업의 역사를 조명하기도 했다. 이지로쪽에서도 마냥 쾌재를 부른 건 아니었다.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나친 열풍으로 인해 타 광고 대행사들의 시선이 썩 곱지는 않았다. 저속한 크리에이티브라며, 사회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광고라며 비난하는 크리에이터들도 많았다. 세간의 평가야 범법한 사실이 없었으므로 움츠려들 이지로가 아니었다. 어떻든 선풍적인 광고를 만든 저력은 평소보다 다양한 영업채널을 갖게 될 것이다. 광고를 문의하는 전화가 쇄도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 타짜 카피라이터가 필요하실 텐데요.”

 

수는 농담조로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함께 일하기 불편한 마음도 있었다.

 

“이제 숨겨두었던 재능에 눈을 뜬 건데 이대로 썩힐 거냐. 잘 생각해봐. 다 먹고 사는 문제니까.“

 

제안한 쪽도 먼저 전화를 끊는 쪽도 이지로였다. 이지로도 수의 근황에 대해 모르진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이지로 회사의 남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회사가 궤도에 올라서고 있으니 연봉수준도 괜찮을 것이고 근무방식도 예전 회사보다는 훨씬 자유로울 것이다. 막무가내인 이지로만 잘 다룬다면 말이다.

 

문제는 혜신이었다. 혜신에게 마음이 갈수록 이지로와 함께 일하기고 싶지 않았다. 친구들을 생각하면, 비록 어떤 계약도 약속도 없었지만 그것은 이미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아 버린 생활이 되어 버렸다. 비록 당장 한 달 뒤를 생각하긴 어렵지만 지금 영위하는 이 생활을 객관적인 조건 때문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불안했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이제 열렸는데, 이수는 선뜻 그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걱정하지 마. 다 알고 있으니까.”

 

어제 문득 혜신이 말했었다. 다 안다는 것이 어디까지인가.

 

“네가 저번에 일해서 번 돈이 소중하게 쓰여 졌다는 걸 알아. 그땐 몽도 벌이가 시원찮았고 유진 언니도 아직 직장을 못 구했을 때니 그때 생활비는 대부분 네가 번 돈으로 충당했다는 걸. 나야 뭐 내 사정인 거고 넌 정당히 일하고 정당한 몫을 받는 거니까. 내가 불편해 한다고 생각하지마.”

 

그리고 돌아서며 다시 한마디 했다.

 

“일단 버는 사람이 벌어줘야 우리도 이 생활을 좀 더 즐길 수 있잖아.”

 

혜신이 메롱을 하며 달아나듯 밖으로 나갔다.

수가 보기에 세상일은 그랬다. 필요가 없을 땐 아예 쳐다보지 않다가도 한번 눈에 띄기 시작하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 싶으면, 집요하게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 애썼다. 지금 수는 자신을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 내려는 세상의 끈질김 같은 걸 느끼고 있었다.

 

 

 

“음악은 잘 되어가나?

 

달라진 건 없었다. 회사의 광고가 히트를 쳤지만 회사도 그대로고 사장도 그대로였다. 말투도 행동도. 잘 되어가나, 에 대한 대답으로 잘 놀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일단 회사로 들어오란 말을 안 할 테니까. 일부터 하자. 자, 이번엔 좀 더 고상하고 품위있는 걸로.

 

수의 의견도 듣기 전에 결론부터 내려버리는 이지로의 태도가 거슬렸다. 하지만, 그랬다. 일단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줘야 한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이지로가 브리프를 내밀었다. ‘트리니티(Trinity)’라는 SPA 브랜드, 일명 패스트 패션 브랜드였다. 한 유럽의 패션 브랜드가 국내에 런칭을 하는 데 거기에 필요한 광고피티가 되는 셈이다.

 

“이번에도 역시 자유분방한 영혼이 필요할 것 같아서.”

 

이지로가 담배를 물며 몸을 돌렸다.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자 자신의 생각도 거기에 타고 있는지 한동안 연기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저인간은.’

 

패션 쪽이라면 혜신이 잘 알 텐데. 혜신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까? 광고 제안엔 아무런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심지어 예산까지도. 그것이 어쩌면 국내 브랜드와 다른 면일지 몰랐다. 예산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따로 없다는 것은 그만큼 돈을 퍼부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었다. 자신의 브랜드가 갖고 있는 장단점과 기회, 혹은 위협 요소를 잘 파악하여 최적의 예산을 제안해 달라는 뜻이다. 상대가 가진 전문성을 신뢰한다는 의미였다.

 

“분명 돈을 많이 쓰는 건 반대할 거야. 윗선의 생각은 몰라도 마켓팅 실무 쪽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아마도 이지로가 그쪽 업체의 누군가와 미리 접촉을 했을 것이다. 대략적인 느낌과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

 

“그래서 말인데. 사실 널 부른 건 조금 다른 문제야. 난 이미 이 광고가 접근해야 될 방향엔 확신이 섰어. 일반적인 광고형태는 안될 것 같아. 가령 패스트 패션 브랜드라면 싼 가격에 괜찮은 패션감을 내세우잖아. 내가 보기엔 그런 전략은 이 브랜드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 이 브랜드쯤 되면 국내에 매장은 없어도 이미 알만한 애들은 해외구매 같은 걸로 많이들 알 테니까.”

 

이지로가 다시 숨을 고르며 담배를 다시 물었다. 제법 긴 장초를 비벼 끄더니 다시 담배를 피워 물고는 다급히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말이 필요없는 광고를 만들고 싶은거야. 노이즈를 일으킬만한”

 

“말하자면 90년대 말 닉스 광고 같은 거요?”

 

“그렇지. 그 광고가 한편의 뮤직비디오였지. 그때 그 광고 인기가 대단했었다. 그 후론 의류광고가 확 줄었지. 난 이 브랜드도 그런 가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말이 필요 없이 감각에만 호소하는 광고.”

 

“그래서 제가 할 역할이 뭔가요?”

 

“광고가 아닌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만들면 좋을까. 어떤 애들을 출연시키고 내용은 뭘로 하지? 물론 이런 건 감독하고 상의하는 게 맞지만 난 너와 네 주변인물들이 이런 감각에 더 닿아있을 거라 생각해. 어차피 이 브랜드의 핵심 타겟도 너희들 나이대 언저리니까.”

 

회사를 나오면서 수는 매번 당황하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왜 늘 생각지도 않은 과제들이 주어지는 걸까. 이번 건도 도무지 머리에 그려지지가 않았다.

 

‘늘 준비된 대로 온다면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늘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수는 생각을 추스르느라 이미 가로수길이 있는 신사동을 지나가고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패스트 패션을 선호하지 않아.“

 

어렵게 꺼낸 일 이야기에 혜신은 싫다, 좋다 보다 먼저 자신이 알고 있는 걸 이야기했다.

 

“개성들이 강하기 때문에 대량생산한 옷들을 별로 좋아하질 않지. 그래도 글로벌 시대니까 프랑스에서도 그런 브랜드가 생기는 건 놀랄 일은 아니지. 이미 들어본 브랜드이긴 해. 하지만 너네 사장님 말대로 일반 SPA와는 좀 다른 거 같아. 저렴한 가격을 내세우지도 않고 그다지 대중적인 스타일도 아닌 것 같아. 그래서 20대 중반 이후를 노린다는 건가?”

 

“그건 잘 모르겠어. 아무튼 20대들이 원하는 것, 그런 이상향을 잘 반영해 주는 광고. 뭐 그런 게 아닐까?”

 

혜신이 생각보다 전략적인 언급을 했다. 수는 차라리 속이 후련했다. 둘 다 어느 정도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싫은 것도 감내해 가는 것이다.

 

더 좋은 것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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