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 제15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동안 서랍장에 가려 어디에 꽂혀 있는지 눈에 띄지도 않았는데, '홀린 듯' 이 책이 눈에 띄었고,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냥 읽을 만하겠지,라는 다소 거만한(?)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으나

나도 모르게 집중하고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짧고 속도감 있는 문체에다가 밀도마저 높은 문장들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세상의 끝, 혹은 세상의 바닥을 이리저리 떠도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내게 좀 충격적이기도 했고,

꼼꼼하지 못한 독자인 탓에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문장들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중요한 내용이었음을 이해하고는

놀라기까지 했다. 

왜 주인공은, 진짜 엄마를 찾겠다면서 순간순간 자꾸 아빠를 떠올리는지, 소설책을 덮을 때쯤에서야 이해하다니,

나 참 무심한 독자다.

 

이런 책을 만나면,

이 책을 읽은 사람들과 '얘기'가 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라는 생각도 든다.

 

이 작가의 다른 소설책을 바로 주문했다. (책을 사는 것은 '과'소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 편리함;;;;;)

다음에 읽는 소설이 조금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 같다.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 이 작품이 약간의 실망을 상쇄하고도 남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이허우잉, 사람아 아, 사람아, 신영복 옮김, 다섯수레, 2011.

 

1980년에 발표된 다이허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는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와 90년대까지 꽤 많이 읽힌 소설이었고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소설이기도 했다. 2012년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는 어떨까. 이 소설은 문화혁명 당시 중국 지식인들의 정치와 역사, 사상에 대한 논쟁으로 가득해서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의 중요한 배경인 문화대혁명이라는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한다면 말이다.

문화혁명이 중국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왜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에도 반드시 알아야만 하는 사건인지 이해한다면 이 소설에 대한 이해와 재미는 두 배, 세 배가 될 것이다.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아마도 소설을 절반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혁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0년 동안 중국의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끈 사회주의 운동이다. 문화혁명은 상류계급과 가난한 농민들 할 것 없이 중국대륙 전체를 계급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이끌었고, 그 가운데 정치인들의 권력 다툼 역시 치열했으며, 소위 인민대중의 삶은 정치와 권력의 변화에 따라 부침(浮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하거나 평가하기가 곤란한 만큼 문화혁명은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에도 서로 엇갈리는, 매우 복잡한 평가들이 이어졌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80년대와 90년대에 이십대의 필독서로 여겨졌던 것은, 당시 우리 사회에도 민주화와 노동자의 해방 등을 인생의 목표로 하는 분위기가 젊은 세대에 팽배했었기 때문이다. 사람아 아, 사람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끊임없이 역사의 변화와 발전, 인민 개개의 행복에 대해 부단히 고심하고 논쟁한다. 인간이 역사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역사에 끌려다니기도 하고 때로 역사의 보이지 않는 일부가 되기도 하는 한, 이것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을 화두이다.

 

* “누구나가 각자의 역사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역사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말이지. 그러나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추진시키는 요인, 특히 인간은 구체적이고 복잡 다양하며 그야말로 신비로운 존재야. 더불어 시대의 무거운 짐을 질 사람을 우리가 기다려서는 왜 안 된다는 거지? 한 민족의 역사, 한 시대의 역사는 수천 수만 명의 역사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야. 그 모이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각자의 역사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자네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자네 혼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짊어질 생각인 거야?” (345)

 

사람아 아, 사람아는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의 장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모두 27개의 작은 장()으로 구성되는데,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돌아가며 각 장의 일인칭 서술자가 되어 사건을 이끌어 간다. 문화혁명 전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이상을 좇으며 패기만만했던 이십대를 지나 마흔을 훌쩍 넘긴 시절까지 각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함께 배웠다 하여 끝까지 같은 길을 가는 것도 아니며 길이 다르다 하여 반드시 다른 목적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다.”(256)라는 어느 인물의 말은 역사의 격동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지나온 이십여 년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주요한 등장인물인 쑨위에, 자오젼후안, 허징후, 쉬허엉종 등은 같은 학교에서 대학생활을 했던 사이였다. 다이허우잉은 문화혁명을 전후로 한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이들의 사랑과 이별, 결혼과 이혼, 우정 등을 이십여 년에 걸쳐 보여주는데, 결국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간략히 끄집어내자면 역사, 그리고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문화혁명을 전후로 해서 당의 사상과 정책에 따라 지극히 개인적인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사랑과 결혼, 우정의 문제에까지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자오젼후안과 쑨위에의 결혼과 이별, 쑨위에와 허징후의 사랑, 쑨위에의 딸 한한 등이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중심 서사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각자가 겪은 역사, 그리고 각자의 인생에 남겨진 역사의 의미 등을 개인적인 입장에서 다양하게 서술한다.

위의 인용문은 허징후가 역사의 의미를 인간의 개별적인 삶과 관련해서 포괄적으로 서술하는 부분이다. 쑨위에와 더불어 허징후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작가를 대변하는 듯한 인물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에, 위의 말은 허징후의 말이면서 동시에 역사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목소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허징후의 말대로 역사는 매우 추상적이지만, 작가는 추상적인 역사를 지극히 구체적인 인간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허징후는 문화혁명 당시 우파로 몰려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다. 그후로 그는 호적이 없는 어둠 속의 인간’(55)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식용유와 식량배급은커녕 통상적인 사회생활도 할 수 없어서 전국을 떠돌며 살 수밖에 없었다. 긴 유랑의 시절을 통해 허징후는 역사와 인간에 대해 좀더 거시적인 통찰을 얻게 되었다. 역사의 발전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실천을 수반하는 적극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20대의 씨왕에게 마흔이 넘은 허징후는 위의 인용문에서 기다림을 말하고 있다. 수천 수만 명의 개인이 각자 자신의 역사를 걸어갈 때에, 한 민족의 역사와 한 시대의 역사가 만들어지며 비로소 움직이는 것이므로 역사의 발전은 그런 기다림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런 역사 인식은 허징후의 것이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에게 역사는 각기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작가는 어느 한 인물의 역사 인식을 옹호하지도 않고, 어느 인물의 역사 인식의 옳고 그름을 말하지도 않는다. 다만, 각자의 상황에서 얻어낸 개인적인 역사인식과 교훈을 따듯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쑨위에의 딸 한한에게 역사는 이혼한 후에 엄마가 찢어버린 가족 사진과 같다. 아버지는 찢어진 사진 속의 얼굴로만 기억될 뿐이고, 부모님의 이혼은 자신의 책임이 아님에도 그 짐은 자신에게도 남겨졌기 때문이다. 한한에게 역사는 본 적도 없고 사귀어 본 일도 없는데 갑자기 자신의 어깨에 무거운 짐부터 지우는, 불공평한 존재이다.

쑨위에에게 역사는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어떤 힘처럼 느껴진다. “나에게 있어서 역사는 과거가 될 수 없어. 역사와 현실이 하나의 배를 공유하고 있어서 어느 누구도 떼어낼 수가 없어. 그리고 그 배는 나의 미래까지도 삼켜 버리고 있는 거야.”(40) 당이 추구하는 사상을 따라 충실하게 살아왔지만, 역사는 옳고 그름에 따라 인간들에게 공평한 보상을 주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큰 잘못을 저지르고도 권력을 쥐고 있으며 작은 잘못 때문에 글을 쓸 자유조차 박탈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당에 대한 충성과 사회주의 사상의 실천 여부와 상관없이 과거의 연애사가 끊임없이 그를 곤란에 빠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쉬허엉종이 역사를 설명할 때는 “‘뒤엎고’ ‘뒤엎혀진다는 단 두 마디가 전부다.”(68) 과거에는 그가 다른 사람을 뒤엎어 자리를 빼앗았고, 현재는 자신이 다른 사람한테 뒤엎혀져 수입도 변변치 못한 채로 글을 쓸 기회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역사의 책임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가 설령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진다 하더라도 역사는 자신을 책임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에게 역사는 오직 이긴 자만을 위한 것이다.

만약 다이허우잉이 역사에 대한 단 하나의 의미만을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사람아 아, 사람아의 감동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별 인물들이 생각하는 역사의 의미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역사와 인간에 대한 좀더 풍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2012년 한국 사회에서 나는 역사와 어떤 관계인가, 나에게 역사는 어떤 의미인가. 자오젼후안처럼 역사는 언제나 밤의 어둠을 틈타 습격해오는 만만치 않은 상대(25)인가, 리이닝처럼 역사는 폐품처럼 끈으로 묶어서 구석에 내던져 버리면 그만인 것(206)인가, 씨리우처럼 틀림없이 행복한 만년을 보장해줄 줄 알았는데 불초자식을 들이미는(101) 불공평한 것인가. 하루하루 살아내기도 바쁜 생활 속에서 역사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 먼 존재일 뿐인가.

 

* “‘인간이라는 요소가 제1이라고.”

 

내가 이런 뒷바라지나 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하지만 그의 부인이 내 동급생이었고 임종 때는 내게 아이를 부탁한다고 했거든. 그런 말을 듣고 모른 척할 수 있겠어? 게다가 나 역시 몇 년 동안 정치 문제로 따돌림을 당해왔었잖아. 친척들도 친구들도 찾아오지 않고 아는 사람을 만나도 상대해주지 않았었어. 정말로 괴로웠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태도를 취할 수는 없어. 그래 가지고는 적과 분명한 선을 그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닝, 너는 철학을 하고 있지? 가르쳐 줘.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어떤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는 거지? 우리들은 과오를 범한 동지와는 꼭 선을 긋고 자기의 혁명성을 나타내야만 하는 거야? 우리들은 전체 인류를 해방하려 한 게 아니었어?

 

다이허우잉은 문화혁명이라는 큰 사건이 개별 인물들에게, 그리고 그 인물들이 맺고 있었던 인간관계(가정, 학교, 직장 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보여주고, 동일한 역사적 사건이 개별 인물들의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고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도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놓치지 않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간이다. 역사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도, 역사를 바르게 움직여 나가는 것도 “‘인간이라는 요소가 제1이라고.”(443) 강조한다.

당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며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인류의 해방을 꿈꾸었던 쑨위에를 갈등하게 만드는 것도 인간인간관계에 대한 우선순위 때문이다. 쑨위에는, 지도부로부터 글을 발표할 자유를 박탈당하고 요주의(要注意) 인물이 되어 다들 기피하는 쉬허엉종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쑨위에는 쉬허엉종과 그의 죽은 아내에 대한 인간적인 의리와 애정으로 그들의 어린 아들의 신발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쉬허엉종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아들에게 새 신발을 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은 C시 대학 학부의 총지부 서기인 쑨위에의 정치적 입장을 생각해서 그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리이닝의 염려에 쑨위에가 답하는 말이다. 정치적인 혁명성과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그만 잘못이라도 있는 이들과는 인간적인 어떤 관계도 냉혹하게 끊어야 하는 것인지, 그렇게까지 하면서 당의 사상과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쑨위에는 묻고 있다. 당의 노선과 입장도 중요하지만 쑨위에에게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인간이라는 존재자체의 귀함도 의미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허징후가 출간하려는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이라는 책은 쑨위에의 이런 갈등에 대한 이론적인 답을 작가가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은 계급투쟁을 통한 혁명을 강조하고 있지만 두 위인의 마음속에는 인간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씌어”(129) 있으며 혁명의 목적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향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작품 속에서 당위원회 서기인 씨리우가 이 책의 출간을 막았던 것처럼, 이런 작가의 사상과 내용이 사람아 아, 사람아를 한때나마 중국에서 금서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사상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철학보다도 다이허우잉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 그리고 인간다움이다.

씨리우의 아들 씨왕이 시종일관 아버지를 비판하는 것도 당위원회 서기로서 아버지가 말하는 정책은 그저 조문(條文)일 뿐 인간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간을 상대로 하는 것”(109)이어야 한다는 씨왕의 말에서도 인간이 제1요소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강조된다. 이처럼 사람아 아, 사람아인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소설의 감동은 여러 나라의 언어로 번역되며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문화혁명 이후에 사상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면서도 희망적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밀밭의 파수꾼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28
J.D. 샐린저 지음, 김재천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호밀밭의 파수꾼은 성장소설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성장소설이란, 흔히 인생의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을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홀든 코울필드는 열일곱 살, 학교에서 네 번째 퇴학을 당한 학생이다. 성장소설의 방식대로라면, 이 소설은 홀든이 퇴학을 당하고 반성을 통해 어른스럽게 성장하는 결과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홀든이 네 번째 퇴학을 당한 후에,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심리상태를 고스란히 보여줄 뿐이다. 홀든이 다섯 번째 학교에 들어가서 잘 적응하고 열심히 공부를 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홀든의 심리적인 고민과 방황에 대한 자세한 묘사이다.

발표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이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의 날것이다시피한 상태로 홀든의 심리가 드러날 수 있는 이유는, 어른이 된 홀든이 자신의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열일곱 살의 홀든이 바로 일 년 전에 네 번째 퇴학을 당한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전달되는 홀든의 방황은 서술 그 자체로 갈 곳 몰라 헤매는 홀든의 심리상태를 드러낸다.

 

* 네 번째 퇴학, 이틀 동안의 방황

 

드디어 결심한 것이 있었는데, 어딘가 멀리 가버리자는 것이었다. 집에 돌아가지 않고 다른 학교에도 가지 않기로 결심했다. 피비만 만나서 잘 있으라고 말하고 크리스마스 용돈을 돌려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차를 얻어 타고 서부로 떠나자고 결심했던 것이다. 우선 홀랜드 터널까지 가서 그곳에서 무임승차하여 다음 역에서 다른 차로 갈아타고 가면 며칠 안으로 서부의 어느 곳엔가 도착하게 될 것이다.

그곳은 매우 아름답고 햇볕이 따사할 것이고, 나를 알아볼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할 생각이었다. 어느 주유소에서 남의 차에 휘발유를 넣어주거나 오일을 칠하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단지 아무도 나를 모르고 나도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이면 그만이었다. (263)

 

위의 인용문은, 열일곱 살 홀든 코울필드가 생각하는 가출에 대한 아름다운 상상이다. 홀든은 네 번째로 전학 간 고등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홀든은 다음주 수요일에 퇴학처리가 되어 기숙학교를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홀든은 토요일 밤 충동적으로 미리 학교를 나온 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틀 동안 뉴욕에서 떠돈다. 토요일 밤부터 월요일 낮까지 홀든의 방황이 호밀밭의 파수꾼의 이야기이다.

홀든은 부모님의 얼굴을 볼 자신도 없고, 새로운 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할 생각도 없다. 방황 끝에 홀든이 내린 결론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작은 오막을 지은 채,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사람 행세를 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홀든은 아마도 서른다섯 살쯤에는 가족들을 만나러 올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는데, 열일곱의 홀든에게 서른다섯이란 아마도 자신에게는 오지 않을’, 까마득한 나이인 셈이다.

가출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품은 홀든은 대책없는 문제아인가. 솔직하게 말하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가출이라 이름을 붙이든 아니든, 학교나 집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 나를 아는 이가 없는 어떤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안해본 사람이 있을까. 홀든이 뉴욕 센트럴파크 호수에 사는 야생오리들이 겨울이면 어디로 떠나는지를 끊임없이 궁금해 하는 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학교를 포함한 모든 상황에서 떠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홀든의 궁금증에 대해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홀든의 마음 역시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이 소설은 홀든의 1인칭 서술로 되어 있는데, 조금 과장해서 말한다면, 홀든은 말끝마다 이건 정말이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이건 사실이다.”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자신의 심정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홀든의 불안은 이런 습관적인 말투로 표현된다. 게다가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홀든의 기분은, 갑자기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었다, 정말 슬프고 외로웠다, 울고 싶었다, 지독히 우울했다,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등으로만 표현된다. 그러나 홀든은 자신의 감정을 살피기보다는 마치 지나가는 말처럼 반복해서 슬쩍 언급하고 지나갈 뿐이다.

외롭지만, 누군가가 함께 있어주었으면 하고 바라지만, 홀든은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인정하기를 꺼리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에게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성인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니, 홀든이 자기 감정에 서툰 것은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겠다. 자기 감정에 서툰 홀든이 할 수 있는 말은 택시 기사들에게 차를 세워두고 한 잔 하고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하는 것뿐이었다. 누가 봐도 고등학생임이 분명해 보이는 홀든이 한 잔 사겠다는 제안이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다. 그러니 홀든은 또다시 버림받은 느낌이 들 뿐이고, 의기소침해지고 자기비하에 빠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토요일 밤부터 월요일 낮까지, 그 누구와도 속깊은 대화를 나눠보지도 못했고 - 어쩌면 대화를 통한 이해와 인정은 홀든이 간절히 바란 한 가지였을지도 모르는데 -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홀든은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서부로 가서 오두막을 짓고 살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지만 홀든이 가출에 대한 낭만적인 상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간 것은, 열 살 동생 피비가 보여준 오빠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

피비는 홀든을 향해, “오빠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지?” “오빠는 어느 학교든 다 싫어해. 오빠가 싫어하는 것은 백만 가지는 될 거야. 안그래?”(227)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피비는 홀든이 서부로 가겠다면 자신도 집을 나오겠다고 한다. 혼자뿐이라고 생각했던 홀든을 붙잡아준 유일한 사람이 피비인 셈이다. 피비는 홀든의 생각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변함없이 홀든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해나 인정보다 사랑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 결국 사랑이라는 결론이 너무 진부하게 느껴지는가. 그러나 모든 인간은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니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힘을 얻게 되는 것은 누군가에게 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가 나에게 보내주는 작은 애정일 뿐이다.

 

* 인생은 경기, 학교는 규칙을 배우는 곳

 

, 인생이란 경기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규칙에 따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꽤 부드럽게 대해 주셨습니다. 말하자면 성을 내거나 역정을 내시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인생이란 경기일 뿐이라는 말씀만 계속하셨습니다.”

그럼, 인생은 경기야. 누구든 규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경기야.”

그렇습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경기 좋아하네. 굉장한 경기로군! 만약 우수한 놈들이 모두 끼어있는 측에 속한다면 인생은 경기일 것이다. 나도 그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우수한 놈이라곤 하나도 없는 측에 속한다면 그게 어찌 경기가 되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무슨 경기란 말이냐. (17)

 

홀든은 돌아오는 수요일에 퇴학처리가 될 예정이다. 한 과목을 제외하고 모든 과목에서 낙제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홀든은 학교를 떠나기 전에 역사 담당의 스펜서 선생님에게 작별인사를 드리러간다. 위의 상황은 홀든이 교장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 들었던 이야기를 스펜서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있는 중이다.

인생은 규칙을 따라야만 하는 경기라는 교장선생님의 말에 홀든은 마음 속으로 강하게 반발한다. 우수한 선수들로만 구성된 팀의 일원이라면 규칙을 지키면서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팀에 소속되어 있다면 이미 실패가 예정되어 있는데 규칙을 지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뜻일 것이다. 홀든은 학교 안에는 이미 승리가 예정되어 있는 학생들과 그렇지 않은 학생들로 나뉘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학교 생활에 대한 홀든의 강한 거부감은 여자 친구인 샐리와 만났을 때에도, 앤톨리니 선생님과의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홀든이 생각하는 학교는, “장차 캐딜락을 살 수 있는 신분이 되기 위해 공부”(178)하는 학생들로 가득한 곳이고, 끼리끼리 뭉쳐 파벌을 만드는 곳이고, 시시한 이야기들을 지껄이는 엉터리 자식들이 우글”(179)거리는 곳일 뿐이다.

정해진 교육제도 안에서 학교는 홀든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학교에 진학하고 취직을 하기 위한 역할을 하며, 기본적으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갖춰야할 소양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은 국가의 근간이 되는 사업이다. 하지만, 여자 친구 샐리가 말하는 것처럼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학교 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앤톨리니 선생님은, 학교 교육을 통해 학식을 갖춘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창조력을 훨씬 더 가치있게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학교 교육을 통해 자신의 적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찾기에도 쉽다는 것이다. 앤톨리니 선생님의 말씀은 지극히 옳다. 대학진학률로 학교의 서열을 매기고 대학진학이 학교교육의 최고 목표가 되어버린 현재 우리 사회가 돌아봐야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도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는 학생의 신분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니 그 부분은 일단 차치하고, 대학진학 외에 학교 생활을 통해 내가 얻을 수 있는 것, 얻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그렇지 않다면 공부를 열심히 하기는커녕, 홀든처럼 학교에 왜 다녀야하는지 이유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학교라는 공간에서의 생활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이유가 대학진학과 캐딜락을 살 수 있을 만큼의 직업적인 성공을 위한 것뿐이라면, 위에서 홀든이 말하는 것처럼 학교 안에는 이미 이긴 자와 진 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샐리의 말처럼, 앤톨리니 선생님의 말처럼 학교 생활을 통해 그 이상의 것을 얻으려고 노력한다면 학교 안에는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경기뿐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경기가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더 읽어보기: 김려령, 완득이

 

완득이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과 동갑이다. 홀든이 뉴욕의 중산층 가정에서 유복하게 자란 데 비해 완득이는 학교와 가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으며 자랐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홀든의 내면적인 상처에 집중하고 있다면 완득이는 완득이의 내면뿐 아니라 도시빈민이나 장애인, 이주노동자 등의 사회적인 문제로도 확장된다. 공통점이라면 열일곱 살 남자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보니 욕설을 포함하여 거친 언어들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점일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십대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장소설의 고전이라고는 하지만 뉴욕을 배경으로 몇 십 년 전에 발표된 소설보다는, 최근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성장소설에서 더 많은 공감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기농 선언 - 지구를 치유하고 세계를 먹여 살리고 우리를 지키는 첫 번째 실천
마리아 로데일 지음, 장호연 옮김, 조완형 감수 / 백년후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지구를 치유하고

세계를 먹여 살리고

우리를 지키는

첫 번째 실천'

 

 

이게 <유기농 선언>의 부제이자, 유기농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아주 간명하게 설명해주는 말이다.

세계를 먹여살린다는 말은, GMO 기업들도 하는 말인데

이 책을 읽어보면 GMO작물은 세계를 살리는 게 아니라는 분명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유기농 먹을거리를 사는 일이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이들의 호사가 아니라,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현재 당면하고 있는 식량, 환경, 질병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설명하는 책이다.

이 책에서는 유기농 먹을거리가 더 맛이 있고 영양가가 있느냐는 문제는 부차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저자를 설명하는 '유기농 명문가'라는 말이 재미있었는데,

실제로 저자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유기농업과 화학농업을 비교,연구하며 대대로 농사를 짓는 집안이라고 한다.

 

 

"농업의 경우 지난 100년 동안 농업 기관을 차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국민의 안전보다는 업계의 이익을 지키는 데 더 헌신했다. 혹시 화학기업과 정부 기관 사이에 난 ' 회전문' 얘기를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새 정부가 출범할 때마다 문이 다시 열리면 화학기업을 지지하는 새로운 인물이 툭 튀어나온다는 뜻이다. GMO를 시장에 도입하기로 한 결정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 사악한 술책 가운데서도 최악으로 꼽힐 만하다." (169~170쪽)

 

이 '회전문' 비유는 국가의 식품 정책과 업계의 유착관계를 설명할 때마다 쓰이는 표현인가보다. <먹지 마세요 GMO>라는 책에서도 읽은 적이 있는데, <맛있는 식품법 혁명>을 읽다보니, '회전문'이라는 표현만 쓰지 않았지 우리나라의 사정도 미국의 '회전문' 현상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부의 정책이나 기업의 광고에 속지말고 소비자가 똑똑해져야 한다는 것,

유기농 식품을 구입하는 것은 내 한 몸의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실천이고 운동이라는 것,

유기농 식품은 비싸지만(이 책을 보면 이런 가격 책정또한 '정책적임'을 알 수 있다) 그만한 비용을 지불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것,

변할 수 없는 결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칼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 지나간 시대의 인물을 후대의 사람들이 회고하는 글을 쓸 때는 사실적인 자료에 입각해서 쓰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고, 그 인물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낸 사람의 입을 빌어 고인의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하기도 한다. 어떤 식이든, 후대의 사람들이 고인을 회고하는 데에는 글쓰는 이의 가치관이나 이상적 자아상 등이 투영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런 글쓰기의 한계일 수도 있고,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칼의 노래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실존 인물에 입각해서 쓰여졌다. 그리고 칼의 노래, 작가가 일러두기와 부록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고 있듯이 허구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실은 역사책을 통해, 그리고 영화나 뮤지컬, 드라마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통해 우리가 읽어야할 것은 이순신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김훈이라는 작가가 새롭게 그려내는 이순신이라는, 소설 속 인물의 의미이다. 칼의 노래를 통해서 우리는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 김훈의 가치관과 자의식이 투영된 인물로서의 이순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자연사, 가장 다운 삶이자 죽음

 

그 저녁에도 나는 적에 의해 규정되는 나의 위치를 무의미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힘든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결국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지는 어느 날, 내 몸이 적의 창검에 베어지더라도 나의 죽음은 결국은 자연사일 것이었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지는 풍경처럼, 애도될 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다만 임금의 칼에 죽기는 싫었다. 나는 임금의 칼에 죽는 죽음의 무의미를 감당해낼 수 없었다. (78~79)

 

작가는 이순신1인칭 서술자로 내세워 소설을 전개하고 있다. 이순신을 1인칭 서술자로 내세움으로써 작가는 무인(武人) 이순신의 내면적인 갈등과 고뇌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소설의 주요한 목적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칼의 노래에서는 이순신이 오직 무인(武人)으로서 죽을 수 있기를, 죽음의 순간까지 무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기를 갈망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위의 인용문은 이순신이 자신의 존재 의미가 적군과의 관계, 적군과 자신의 위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을 인식하는 부분이다. 이순신은 이런 자기 인식이 전장에서 죽는 순간에도 실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적의 적으로서 죽는 것은 무인의 운명이자 정체성이므로 적과의 싸움에서 일어날 자신의 죽음은 특별히 애도하거나 추모해야할 일이 아님을 강조한다. 소설에서 이순신은 그런 죽음을 자연사라고 이름 붙인다.

살아있을 때에나 죽을 때에나 오직 무인으로 남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가장 충실한 죽음을 원하는 것이며 가장 자신답게 죽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다만 적의 적으로서 살아지고 죽어지기를 바랐다.”(82), “나는 나의 자연사로서 적의 칼에 죽기를 원했다.”(313)는 문장은 소설에서 자주 반복된다. 이처럼, 가장 나답게죽을 수 있다면, 사후에 사람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든 임금이 어떤 칭호를 내리든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이순신은 이미 여한이 없는 죽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칼의 노래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자연사’, 가장 나다운죽음을 이순신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는 적이 아닌 아무것도 없을 듯 싶었다.”(350)거나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날들이 계속 되었다.”(352) 등 반복되는 문장들을 통해 그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다.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배 위에서, 중국과 일본, 심지어 조정의 임금까지도, 사방이 적인 듯 느껴진다는 이순신의 독백은 직장과 가족을 비롯한 복잡한 인간관계의 한가운데서 삶을 이어가야하는 현대인들의 고달프고 고독한 내면에 대한 비유이기도 할 것이다. 칼의 노래의 출간 이후에 3,40대들이 재테크나 자기 개발서가 아니라 소설의 독자로 돌아온 상황은 이런 자기 동일시(자기 연민이 뒤섞인)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칼의 노래의 이순신이 보여준 내면적인 고독과 번민은 많은 이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순신의 내면에 대한 섬세하고 구체적인 서술과 묘사는 작가 특유의 유려한 문장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세상과 나의 대결구도를 극한으로 밀어붙인 이 소설의 비장함은 물질적인 몸으로 존재하는 개별적인 인간이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이나 죽음의 공포 등을 간과한 면이 없지 않다. 세상과의 대결 속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내면은 충실하게 묘사되었지만, 그 때문에 그 고독한 존재는 관념적인 인물이 된 듯한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이 소설에서 밥, , 냄새 등 물질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다양한 묘사가 자주 반복되는데도 관념적인 분위기를 지울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 맛과 냄새, 감성적인 묘사들

 

아낙이 멍석 위에 밥상을 차렸다. 나는 그 장터에서 송여종, 안위와 함께 점심을 먹었다. 아낙이 국밥 열 그릇을 말아서 나룻배 편으로 격군들에게 보냈다. 말린 토란대와 고사리에 선지를 넣고 끓인 국이었다. 두부도 몇 점 떠 있었다. 거기에 조밥을 말았다.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듯했다. 그 국물은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진액처럼 사람의 몸 속으로 스몄다. 무짠지와 미나리 무침이 반찬으로 나왔다. 좁쌀의 알들이 잇새에서 뭉개지면서 향기가 입 안으로 퍼졌다. 조의 향기는 안쓰러웠다. 아낙이 뜨거운 국물을 새로 부어주었다. 나는 짠지를 씹었다. 봄의 짠지 속에 소금의 간은 가볍고 싱싱했다. 안위는 세 번째 밥그릇을 내밀었다. 국에 만 밥을 넘길 때 창자 속에서 먹이를 부르는 손짓을 나는 느꼈다. 나는 포식했다.

(220~221)

 

이 소설에는 먹을거리에 대한 서술이 자주 등장한다. 거의 모든 절()마다 등장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순신 자신이 먹은 음식들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병사들의 끼니와 야식으로 어떤 음식을 주었는지, 근처 백성들이 철을 따라 먹는 음식은 어떻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도, 심지어 바다에서 죽은 병사들에게 제사밥 삼아 던져주는 주먹밥에 대한 언급까지도 자세하다.

마찬가지로 위의 인용문에서도 작가는 음식의 종류와 만드는 방법까지 아주 구체적으로 전달하면서 동시에 음식의 의미와 분위기를 정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백성의 국물은 깊고 따듯했다든지, 국물이 몸 속으로 스민다든지, 또는 조의 향기가 안쓰럽다거나 소금 간이 가볍고 싱싱하다는 등의 표현은 단지 음식의 맛과 향을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음식을 몸과 마음으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오감과 감성을 동원해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이나 냄새에 대한 감각적인 묘사는 칼의 노래전체를 통하여 탁월하게 드러난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송장이 썩는 냄새는 간고등어의 냄새로, 한때 잠자리를 같이 했던 여인은 젓국 냄새로, 살아 생전 어머니의 몸은 오래된 아궁이의 냄새로, 요절한 아들의 죽음은 아들이 갓난아이 시절에 쌌던 푸른 똥의 덜 삭은 젖냄새로 묘사된다. 작가의 감각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은 군더더기 없는 특유의 짧은 문장과 어우러지면서 독자들을 매혹하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 작용한다. 감각적인 묘사와 작가 특유의 짧은 문장은 이 소설을 읽는 큰 재미 중의 하나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칼의 노래와 이순신 소재로서의 역사

 

작가는 소설의 첫 페이지에 일러두기여섯 가지를 쓰고 있다. 첫째는 이 글은 오직 소설로서 읽혀지기를 바란다.”는 것이고 여섯째는 책의 부록으로 첨부한 <인물지><연보>에서 소설과 사실의 차이가 드러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실제로 책의 뒷부분에는 부록으로 충무공 연보, 인물지, 해전도 등이 실려있고, 다시 한번 작가는 소설이 불가피하게 변형시키거나 재편성한 사실들이 여기에서 복원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이고 있다.

둘째부터 다섯째까지의 일러두기는 소설에서 사실 그대로를 쓴 부분과 사실이 아닌 부분을 구체적으로 하나씩 지적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여진이라는 인물은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실명의 여인이지만, 소설 속에서 여진이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지어낸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순신이라는 실존인물과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칼의 노래는 허구적인 창작물인 소설이다. 작가는 이순신이 정유년 41일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한 때부터 전사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을 떼어왔을 뿐이다. 즉 이 소설에서 이순신이라는 인물과 그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은 소재로서의 역사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 선조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단편적이라거나 당쟁에 대한 식민사관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식의 지적은 별로 의미가 없다. 칼의 노래는 작가가 거듭 강조하고 있다시피 소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재로서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은, 과거의 역사적 진실을 새롭게 밝혀낸다거나 과거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거나 하는 목적과는 무관하다. 역사의 어느 한 시기를 오려내어 작가가 현재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적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칼의 노래이순신은 역사 속의 실존인물이 아니라 작가 김훈이 만들어낸 이순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가가 이 글이 소설임을 거듭 강조하고, 소설로서만 읽혀지기를 바란다면서도 굳이 허구와 사실을 조목조목 짚어서 구분해주려고 애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앞부분에는 이순신의 표준영정사진, 이순신이 사용했다는 칼의 사진, 난중일기(아산 현충사 소장) 사진과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 국립중앙 박물관 소장의 <수군조련도>, <충무공 팔진도> 등의 사실 자료들이 실려있다.

이러한 사실적인 자료들은 거짓꾸며냄이라는 태생적 특성을 지닌 소설과 묘하게 병치되는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소설들이 마치 논픽션인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 액자식 구성 등을 활용했던 것과는 달리, 역사적인 소재를 빌려오는 요즘의 소설들은 사실적인 근거들을 들이대며 굳이 꾸며낸 이야기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허구와 사실, 리얼리티와 리얼리티가 아닌 것, 소설과 소설이 아닌 것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세상 속에서 소설이 스스로의 본성을 잃지 않으려는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패트릭 2012-08-05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니리 2012-08-05 19:37   좋아요 0 | URL
아....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