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 - 작은 것들 속에 깃든 신의 목소리
조안 엘리자베스 록 지음, 조응주 옮김 / 민들레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어디선가 날벌레 한 마리가 날아 들었을 때, 또는 소리도 없이 바퀴벌레 한 마리가 슬그머니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벌레의 출현을 심상하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심상하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위협적이라고 느끼거나 혹은 소리를 지르며 공포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의 저자 조안 엘리자베스 록은 사람들의 이런 반응을 ‘문제적’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벌레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하는 게 왜 문제적일까. 토마스 베리는 이 책을 추천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11세기 중국의 관료였던 장재는 『서명(西銘)』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늘을 아버지라 부르고 땅을 어머니라 부르니, 우리 모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서로 섞여 있는 미미한 존재들이다. 천지의 기가 나의 몸체를 이루고 천지의 근원이 나의 본성이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모두가 한 배에서 나온 형제이며 만물은 나의 친구다.” 우리는 이런 사상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곤충을 떠올리면 애매한 태도로 돌변한다. 곤충이 종의 다양성으로 보나, 개체로 보나 그 어마어마한 숫자로 보나, 나머지 동물을 합친 것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곤충이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지배 욕구를 곤충에게 투사해놓고는 그들을 두려워한다. 곤충이 지구의 기능과 모든 생명체의 생존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들은 쉽게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지구 공동체 속에서 벌레를 제외시키고 있다는 점을 조안 엘리자베스 록은 지적한다. 그는 우리가 모든 벌레를 지구공동체의 일원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부제가 ‘작은 것들 속에 깃든 신의 목소리’인 것은 그런 의미이다.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의 저자는 파리, 바퀴벌레, 개미, 딱정벌레, 벌, 모기, 거미, 나비, 사마귀 등의 예를 구체적으로 들면서 이들에 대한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와 혐오가 어떤지를 설명한다. 벌레들의 생태를 설명하면서 벌레들에 대한 우리의 편견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 존재들이 지구공동체라는 관점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려주고, 이들을 인간과 동등하게 지구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부족들이 보이는 태도나 전설 등을 소개하면서 벌레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좋은 벌레는 죽은 벌레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벌레들에게 마음을 열어라라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록은 모든 벌레들에 대한 막연한 공포, 적의, 혐오의 태도를 없애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벌레들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우리가 흔히 해충(害蟲)과 익충(益蟲)이라고 분류하는 것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사고일 뿐이지 지구공동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세상에 나쁜 벌레는 없다는 얘기다.

 

곤충에 대한 혐오와 공포는 곤충이나 인간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실 곤충 자체와 관련된 이유는 별로 없다. 우리가 흔히 보는 소설이나 영화에서 악당을 묘사할 때 동원되는 것이 곤충의 모습이다. <인디펜던스 데이>, <맨 인 블랙> 등에서처럼 지구를 위협하는 외계의 생물체나 악의 세력을 묘사할 때는 곤충의 모습을 한 존재들을 등장시킨다. 신문에서 테러범이나 정치적으로 비하하려는 대상을 묘사할 때도 인간과 벌레를 결합시킨 형상으로 만들어낸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은 이렇게 벌레가 공히 인류 공통의 적이 된 것은 벌레가 가장 만만한 투사 대상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물론 기이하게 생긴 곤충을 보면 의심을 품고 자기방어를 하려는 우리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 수 있지만, 곤충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단순한 자기방어나 의심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아와 공동체의 경계를 너무 좁게 설정한 나머지 그 선 너머 우리를 두렵게 하는 또다른 세상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종족보존을 위한 적절한 경계심과 조심성을 길러준 우리의 생존본능, 다시 말해 건강한 두려움을 과장하고 왜곡했다.”는 것이 엘리자베스 록의 지적이다.

 

게다가 벌레에 대한 근거없는 혐오와 공포는 다음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학습된다는 점도 문제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부모가 벌레를 보고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지켜보고 그대로 흉내내기 마련이다. 그런 식으로 곤충에 대한 혐오나 두려움을 학습하면 아이는 곤충과의 관계를 더 이상 탐색해보려는 욕구를 갖지 않게 된다. 곤충에 대해서뿐 아니라 무엇에 관련된 것이든지 혐오감은 학습의 결과이다. 각각의 문화 전통은 구성원들에게 무엇이 혐오스럽고 무엇이 혐오스럽지 않은지를 가르친다. 엘리자베스 록이 강조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벌레에게 투사하는 혐오와 공포는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투사는 우리의 행동이나 동기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제임스 힐만은 곤충에 대한 두려움, 예컨대 떼지어 다니는 습성, 흉측한 모습, 통제불가능성, 기생적 기질에 대한 두려움이 사실은 우리 자신의 특성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환경을 병들게 한 것은 곤충이 아니라 우리가 남용하는 화학 독극물이라고 말한다. 힐만은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만들어놓은 ‘적’을 닮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반사적으로 서식지를 오염시키고 살충제를 뿌려대며 스스로 위험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자는 우리들이 파리나 바퀴벌레에게 투사하는 부정적인 감정들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벌레라는 대상을 향한 오해와 학대, 증오에 시달리는 우리 안의 모습을 어떻게 끌어안고 치유할 것인지도 묻고 있다. 곤충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에서 벗어나, 꽃이나 나무들을 대하는 것처럼 곤충에 대한 새로운 감성을 개발하겠다는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한다고 강조한다. 그런 선택이 곤충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혹사당한 우리의 정신적 부분을 치유하는 큰 걸음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한다.


벌레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와 관련해서 저자는 제인 구달의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희망의 이유』에서 제인 구달은 가족들에게 들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 하나를 들려준다. 유모가 가게에 들러 물건을 살 동안 어린 구달은 유모차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때 잠자리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왔고 구달은 소리를 질렀다. 마침 지나가던 아저씨가 신문지로 잠자리를 쳐서 떨어뜨리고는 밟아죽였다고 한다. 그걸 본 구달은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울어서 결국 의사를 불러 진정제를 투여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어린 구달은 유모로부터 잠자리 꼬리에는 독침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잠자리를 본 구달은 무서워서 소리를 지렀던 것이다. 그러나 잠자리가 겁이 난다고 해서 누가 잠자리를 죽여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구달은 어렸지만 자신이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잠자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화가 치밀고 죄책감이 느껴져 쉬지 않고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엘리자베스 록은 두려움이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에 반응하는 방법을 결정짓는 강력한 힘이라고 말한다. 어린 구달처럼 잠자리를 무서워하도록 교육 받는다면, 잠자리가 가까이 왔을 때는 당연히 위험을 느끼게 된다. 잠자리가 단지 우리 냄새가 궁금해서, 아니면 우리 옷 색깔이 신기해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할 수가 없다. 때문에 벌레들의 생태에 대해 많이 아는 것은 벌레들을 향한 막연한 적의와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바퀴벌레가 잘 날기는 하지만 방향 조절을 잘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바퀴벌레가 방향조절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바퀴벌레가 서툴게 날다가 자신과 부딪힌다 해도 이를 공격 행위로 간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퀴벌레에게 적의와 혐오를 드러내느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파리에 대한 좋은 감정을 키우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적으로 교정하기 위한 아주 작은 걸음일지도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 조안 엘리자베스 록은 ‘일시적인 듯하면서도 영구적인 자연세계, 죽음과 부패의 순환, 우리 몸의 변화 등에 대한 기존의 낡은 해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파리가 여기저기 옮겨다니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똥이나 썩은 살이 섞여있을지도 모르는 소화액을 토해낸다는 생각에 파리에 대한 혐오감을 정당화해왔다. 그러나 실은 꿀벌도 먹은 것을 토해 꿀을 만들고 나비도 다른 동물의 오줌과 땀을 빨아먹지만 우리는 이런 사실을 문제삼지 않는다. 더구나 우리의 몸 역시 수많은 분비물로 이루어져 있는 게 사실이다. ‘음식을 씹을 때 고이는 침, 체온조절을 위해 흘리는 땀, 종족 번식을 위해 필요한 각종 점액, 위벽이 소화액 때문에 헐지 않게 감싸주고 숨을 들이킬 때마다 먼지와 세균이 폐로 들어가지 못하게 보호막을 형성하는 점액’이 다 분비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잊은 채 우리 몸의 혐오스럽거나 외면하고 싶은 생물학적 작용이나 특징을 파리한테서 발견하고 파리에게 우리의 혐오과 적의를 투사해왔다는 점을 조안 엘리자베스 록은 지적한다.

 

모든 생명체는 소중하며 지구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고 믿으면, 우리 문화는 심오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그 변화는 우리 인생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쳐 헛된 안전의식과 삐뚫어진 우월감 위에 성립된 안팎의 관념들을 무너트릴 것이다.

지구를 통제하고 지배하겠다는 망상을 버리면, 우리는 지구공동체에 참여하는 법을 배우게 되고, 모든 것이 항상 우리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 우리가 설 자리를 찾는다면, 우리는 인간과 만물의 상호의존성에 즐거워하고, 살아 숨쉰다는 것이 기적임을, 그리고 파리의 존재도 똑같은 기적임을 인정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다.

 

즉 지구라는 거대한 공동체 속에서 하나가 된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가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괴물이나 돌연변이나 우연 따위는 없으며, 단지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조안 엘리자베스 록은, 벌레가 정말 우리를 위협할 때, 집안에 있는 벌레를 죽이는 것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때는 죽여도 괜찮다고 말한다. 무조건 벌레를 죽이면 안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벌레를 잡아야할 때는 잡되, 저주를 하거나 악의를 품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증오의 기운은 곧 사람의 마음을 헤치는 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설령 곤충을 죽이더라도, 곤충을 관용과 애정으로 대하면 곤충과의 만남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줄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이도 처음에는 조안 엘리자베스 록의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책을 끝까지 읽고 난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배부른 소리로만 들렸다. 북한 아이들이 굶어죽고 이라크 아이들이 폭탄에 맞아 사지가 절단되는 마당에 파리나 모기의 생명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차츰 깨닫게 되었다. 파리나 모기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만큼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파리나 모기에 대한 증오심과 북한과 이라크 어린이들의 비극을 불러온 증오심이 같다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