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Q정전 외 - 루쉰 소설집
루쉰 지음, 박운석 옮김 / 열린시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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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이란 시대를 초월해서 그 가치를 발하는 작품을 말한다. 오랜 세월을 거쳐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변함없는 의미를 우리에게 알게 하면서 동시에 시대마다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작품이야말로 진정한 고전이 될 수 있다. 어느 출판 관련 저널에 의하면 일주일에 몇 백 권의 책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그중에서 몇 권이나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읽히게 되는지, 또 그 중에서 몇 권이나 세대를 초월해 읽히게 될지 생각해본다면, 1921년에 발표된 <아Q정전>이 아직도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일인 것이다.




<아Q정전>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한문학의 전통적 장르인 전(傳)의 형식으로 아Q라는 인물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아Q정전>은 신해혁명 전후의 중국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서, 서구 열강의 침략 앞에서 정신적 허영만 앞세우고 정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적극적인 대응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중국인의 모습을 풍자하고 싶었다고 한다.




아Q는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30여년을 살다가 결국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까지 자신이 처한 시대의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겪게 되는 삶의 곤란한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이나 터무니없는 자기 비하로 일관했다. 위의 제시문 (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는 건달들의 부당한 행패에 대해 적절한 대거리 한번 하지 못한다. 겨우 정신 승리법이라는 엉뚱한 자기 합리화를 통해 상황을 회피해 버릴 뿐이다. 정신 승리법이란 맹목적인 망상이나 자기 비하를 통해 자신이 당한 치욕과 실패를 억지로 잊으려 하는 것이다. 아Q는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거나 낭패를 당한 후에는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화풀이를 하거나 술을 마심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는 현실적인 인식 부족 때문이기도 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주체적으로 책임지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아Q의 모습은 해외 열강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 속에서도 근거 없는 우월감과 패배감에 빠져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면서 상황을 회피해 버리고 마는 중국 민족에 대한 풍자라고 할 수 있다.




아Q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혼란한 혁명기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우매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모든 국민에 대한 의무 교육이 시행되고, 정보의 홍수라 할 정도로 아침, 저녁으로 엄청난 정보를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지금은, 역사의식이 없는 우매한 사람들은 하나도 없는 것일까. 미국이 지구 반대편 어느 곳에 미사일을 쏟아 붓는지, 어느 나라에 자연재해가 생겼는지, 또 어느 나라에서 어떤 정치적 입장을 띤 대통령이 당선 되었는지, 우리는 가히 실시간으로 그런 사건들을 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이 우리 곁으로 매일 전달된다 한들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그런 정보들은 우리의 인식 변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즉 나를 둘러싼 주변 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성찰하면서 살지 않는 한, 역사의식이나 현실 인식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내가 듣고 싶은 것에만 귀를 기울이면서 나 좋을 대로만 상황을 받아들인다면, 아Q와 얼마나 다르게 살 수 있겠는가. 이 지구 위의 어떤 곳에서 얼마나 많은 어린이들이 굶어 죽고 있는지 보려하지 않는다면, 명분 없는 전쟁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는 세상은 정말 평화롭기 그지없노라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다. 거인(擧人) 어른과 웨이주앙 마을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것만 보고 무조건 혁명 당원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아Q처럼 우리도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무지함을 드러내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잠깐 눈을 돌려서 <아Q정전>에 등장하는 웨이주앙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웨이주앙 사람들은 아Q의 외모를 트집 잡아 그를 놀리고 이유 없이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날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아Q가 성안에 들어갔다 온 후에는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눈에 들려고 노력한다. 아Q가 성에서 가져온 좋은 물건을 값싸게 팔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 물건이 도둑에게서 사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되자 마을 사람들은 다시 아Q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혁명의 무리들이 저지른 일을 아Q가 했다고 뒤집어 씌워 결국에는 그를 죽게 만든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서 얼마든지 타인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웨이주앙 사람들이 보여준다.




웨이주앙 사람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은 아Q가 처형당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아Q가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에 불만족스러워 한다. 왜냐하면 총살은 목을 자르는 것만큼 볼 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웨이주앙 사람들은 아Q가 정말 ‘나쁜 놈’이었다고 말하는데, 그가 총살을 당했다는 사실을 그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믿어 버린다. 웨이주앙 사람들에게 아Q의 목숨은 그저 구경거리였을 뿐 그 처형이 공정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아Q와 같이 현실 인식도 없는 무지몽매한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면 이런 끔찍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는가. 아니 지금도 사회의 약자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웨이주앙 사람들과 같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한 개인의 삶은 어떤 형태로든지 역사적 현실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역사적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자세와 부단한 성찰을 갖춘 개인만이 역사적 인식을 지닌 존재가 될 수 있다. 아Q가 혁명당에 가입하려는 동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지한 현실 인식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시류를 쫓아가는 삶은 자기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에만 급급해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은 올바른 정체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개인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현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즉 시대적 현실과 무관한 개인의 삶은 불가능한 것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이유 하나만으로도 모든 개인은 자신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올바르게 대응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현실에 눈감고도 얼마든지 살 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당장은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개인의 삶은 결코 발전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존재로 진실하게 산다는 것이 모두에게 영웅이 되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의 삶을 살아있는 인식과 의지로 채워나간다는 것이야말로 진짜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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