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 - 문화마당 4-007 (구) 문지 스펙트럼 7
백욱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본 일이 있는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벌거벗은 남자’라는 말을 듣는다. 왜냐하면 <다비드>상이야말로 수없이 복제되어 여기저기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비드>의 진품은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청동으로 제작된 다른 작품은 미켈란젤로 광장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실물 크기의 복제품은 런던이나 일본, 캘리포니아 그리고 라스베이거스에서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마케팅 전략 덕분에 <다비드>를 연상시키는 그림이 들어간 스카프나 넥타이, 티셔츠, 앞치마는 물론 장난감이나 냉장고용 자석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한때는 사람들이 거의 숭배의 감정으로 감상하던 <다비드>상은 이런 조악한 복제품들 덕분에, 다양한 문구캐릭터로 여기저지 등장하는 해리포터와 동급이 된 셈이다.




인간 복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예술작품을 똑같이 만들어내는 것이 무슨 대수일까 싶다. 우리는 원하면 언제든지 고흐의 그림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인터넷 검색만 하면 고흐의 그림을 볼 수도 있고, 좀더 욕심을 낸다면 사진처럼 선명하게 인쇄를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흐의 ‘진짜’ 그림을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의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을 찾아가고, 모네의 ‘진짜’ 그림을 보기 위해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이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간다. 하지만 암스테르담, 파리나 뉴욕에 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고흐를 좋아하고 모네의 그림을 보면서 예술적 감흥을 느낀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들이 ‘가짜’ 그림을 보면서 느끼는 예술적 감흥도 가짜라고 해야 하나.




이런 상황을 생각해보자. 수학여행을 가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서른 명의 반 친구들은 똑같은 사진을 각각 한 장씩 갖게 된다. 그럼 서른 장의 사진 중 어떤 것이 ‘진짜’일까. 더 나아가서,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뒤, 그 사진을 친구들의 미니 홈피에 올려주었다면, 누구의 미니 홈피에 있는 사진이 원본이고 다른 것은 복제본인지를 구분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시대에는 더 이상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그런 구분 자체가 별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 ‘진짜’의 독특한 의미와 분위기 역시 의미가 없다. 그래서 백욱인은 『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에서 0과 1의 정보로 구성된 디지털 산물은 그것이 디지털 그림이든, 음향이든, 텍스트든 원본과 복제본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말한다. 원본과 복제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고, 원본이 복제본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는 원본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가 중요했다. 그러나 디지털 복제가 일상화된 요즘은, 아우라의 상실이 아니라 아우라의 중요성마저도 사라져버렸다.




『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는 네트워크 시대의 디지털 문화에 대해 전반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책을 이렇게 소개한다.



여기에 모아놓은 글들은 네트워크 시대의 문화와 디지털 문화에 관한 것들이다. 이 글들이 ‘남과 함께’라는 공동체 윤리와 ‘남과는 달리’라는 창조성이 함께 만나는 새로운 디지털 문화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래서 ‘남보다 먼저’라는 구시대의 생존법칙을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남과 함께’ 더불어 정보를 나누면서 ‘남과는 다른’ 자신만의 창의성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이 펼쳐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지는 디지털 문화 속에서 아우라는 정말 사라져버린 것일까. 고흐의 <해바라기>는 수없이 많지만, 내 방에 걸려있는 고흐의 <해바라기>는 단 하나뿐이다. 아침, 저녁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 그림이 내게 주는 감흥은 진품에 좀더 가까운, 좀더 크고, 좀더 색상이 화려한 다른 <해바라기>가 주는 감흥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암스테르담에 있는 고흐의 진짜 그림보다도 내 가까이에 있는 복제화가 내게는 더욱 의미가 있다. 똑같은 사진이 여러 친구들의 미니 홈피에 게시되어 있지만, 내 미니 홈피에 게시된 사진과 다른 친구의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사진은 그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 즉 디지털화된 시대의 복제품들은 모두 각각의 독특한 의미와 분위기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패션 70s>에서 더미가 만든 옷이 장봉실 여사의 옷과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은, 밤새 혼자서 땀 흘리며 바느질한 더미의 노력과 정성이 베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봉실 여사의 혼이 담긴 옷과는 절대 같아질 수 없는, 또다른 독특한 의미와 분위기를 지니게 된 것이다. 백욱인은 『디지털이 세상을 바꾼다』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진 원판이나 사진 작품, 혹은 현실의 특정 측면을 끌어내어 재구성한 대량 복제의 팝 아트 등에서는 복제품 자체가 나름의 아우라를 지니게 된다. 그리고 디지털 아우라는 디지털 복제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특징을 갖는다. 아날로그 시대의 기계 복제는 미술 작품에서 아우라를 앗아가는 기제로 작용하였지만 디지털 복제는 디지털 아우라를 만드는 기본 요소이다. (중략) 사람들은 단순히 진정성을 지닌 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일상의 상품과 사물에서도 소외된 아우라, 혹은 진정성이 결여된 반쪽 아우라, 혹은 일상의 새로운 아우라를 만들면서 살고 있다. 단순하고 쓰레기 같은 모조 미술품, 키치의 반진정성이 역겨울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특별한 시공간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디지털 시대에는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가짜들 역시 각각의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면, 이제 원본이 더 우월하고 복제본은 열등하다는 위계가 깨어지게 된다. 이는 인간의 실존 문제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때 아주 중요한 성찰을 제공한다. 고흐의 <해바라기>가 수없이 복제되었지만 그 그림이 걸린 자리와 그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의미와 분위기를 지닐 수 있다면, 하나하나가 다 ‘진짜’인 인간에 대한 성찰은 더욱 중요해진다.




디지털 복제 시대에 수많은 복제가 가능해졌고, 그것들이 개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는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다양한 개별적인 의미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결국 동일한 의미와 분위기를 다시 만들어내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뜻이 된다. 궁정 요리사가 아무리 훌륭한 산딸기 오믈렛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것이 50여년 전에 왕이 어느 오두막에서 먹었던 그 맛을 재현해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고흐의 그림이 내 방에 와서 걸리고, 베토벤의 음악이 내 핸드폰 속으로 들어와서 새로운 의미와 분위기를 획득했지만, 그것은 결코 고흐나 베토벤이 작품을 만들었을 당시의 의미와 분위기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물론 원래의 의미와 분위기가 새로 획득된 의미와 분위기 사이에는 어떤 것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가를 구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해도 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엄청난 속도로 달려나가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제동을 걸 수 있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이 진보한다고 해도 인간의 어떤 경험이나 감정을 그대로 재현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이 인간마저도 똑같이 복제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나 욕망에만 빠져 있다면, 우리 삶의 어떤 순간이나 대상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와 독특한 분위기를 잊어버릴 수도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